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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언택트!

2021.09.05전희란

언택트 시대, 패션쇼가 새로운 방향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핵심에 ‘패션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숨겨져 있다.

패션쇼에 한두 번 가본 적이 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뻘쭘해서 그 이후로는 가지 않았다. 영상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는데, 어떤 패션쇼 영상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항상 궁금한 것은 ‘이 행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였다.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는 그런 고민이 필요 없다. 당연히 선수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객석을 메운 관객은 승부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패션쇼는 다르다. 조명을 받으며 시크한 표정과 절도 있는 캣워크로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들이 주인공인 것 같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이 과연 승부를 ‘결정’할까. 패션쇼의 승부란 어떤 것일까. 시장에서의 매출이 있지 않겠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창작 분야의 승부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얼마나 팔리냐’가 진정한 승부처라면 애초에 패션쇼에 등장하는 옷들의 상당수는 만들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말과 글, 그리고 이미지가 복합되어 형성되는, “왠지 이 옷이 다른 옷에 영향을 줄 것 같다”는 소위 ‘인싸’들의 의견 같은 것들이야말로 먼지가 가라앉은 전장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최후의 승자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말과 글을 내놓는 사람들은 패션쇼라는 행사의 스펙터클에서는 한참 뒷전에 밀려 있다. 그들 속에 섞여 앉아 있던 해당 패션쇼의 디자이너가 마지막에 일어나 조명과 환호를 받기는 하지만, 다수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패션쇼라는, 극도로 비주얼이 컨트롤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필요하되 드러나지 않는 존재다.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고 펜을 끼적이다가 흩어질 뿐이다. 그러니 형식과 내용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그들도 진정한 주인공은 아니다. 결국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옷이다. 옷이 혼자 걸어 다닐 수 없으니 모델이 필요하다. 모델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표준화된 체형에 표정이 제거된 얼굴, 그리고 고도로 훈련된 보행으로 ‘옷으로 하여금 걷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생명체가 모여 이렇게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지우고 대신 무생물을 숭배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패션쇼 말고는 없지 않을까. 이 원칙은 옷을 제외한 패션쇼의 모든 구성 요소에 예외 없이 적용된다. 복종의 하이어라키는 엄격하며, 그 어떤 것도 적어도 시각적으로 옷과 경쟁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여기서 패션은 숙명적으로 건축을 만난다.
패션과 건축은 상극이다. 일단 평가의 시간적 잣대가 다르다. 패션은 이를테면 제철 과일이다. 몇 년 전 글로벌 패션 브랜드의 한국 플래그십 스토어를 설계하는 지명 현상공모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패션을 과일 나무에 철마다 달리는 열매에 비유해 풀었고, 그래서 제목도 ‘무슨 무슨 트리’였다. 건축은 이러한 시간적 흐름에서 상당히 비껴나 있다. 매사의 시간적 잣대가 현저히 짧아지는 요즘이지만, 건축의 시간은 적어도 패션처럼 사계절 단위는 아니다. 규모가 좀 크고 복잡한 건물은 하도 시간이 오래 걸려 완성될 시점이면 오히려 시대에 뒤처지기도 한다. 이 패션과 건축이 만나면 승부는 뻔하다. 패션은 모델들에게 그렇듯이, 심지어 객석의 인싸들에게도 그러하듯이, 제 눈앞의 경쟁자를 두고 보지 못한다. 그래서 패션은 장소가 아닌 ‘상황’만을 필요로 한다. 패션에 장소이자 구조이자 공간이자 그 자체로 누군가의 ‘작품’이기도 한 건축 같은 것은 필요 없다. 패션쇼의 무대는 대부분 가설 구조이며 그것도 고도로 추상화되고 미니멀한 바닥, 벽, 천장에 불과하다. 이것을 무대 디자인이라고 해야 할지 인테리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건축은 아니다.(미안하지만 건축은 이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 의미를 담은 것을 말한다.)‘미장센’ 정도가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이 모든 것에 변화 혹은 균열을 가져온 것은 엉뚱하게도 코로나 바이러스와 범지구적 셧다운이다. 모델들은 숫자도 적고, 게다가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을 하고 의견을 만들어내는 인싸의 무리들은 더 이상 파리, 밀라노, 뉴욕을 오가며 단체로 모여 앉을 수 없게 되었다. 어쨌든 옷은 걸어야 했다! 그리고 모델의 얼굴처럼 무표정 일변도의 면으로 구성된 가설무대의 멸균된 미학으로는 이 복잡하고 답답한 시대의 미학을 담기 어려워졌다. 세상이 변했다!
새로운 경향 중 하나는 무대 디자인에 집중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에르메스가 있다. 돌출 격자무늬로 장식한 벽을 배경으로 수많은 원형 기둥이 놓여 있고 그 사이를 모델들이 걸어 다닌다. 원형 기둥은 자세히 보면 에르메스의 모자 상자를 쌓아놓은 것인 듯하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너무 자주 특별히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는 것 또한 어떤 브랜드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인 듯하다. 펜디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가상의 무대를 화려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패턴의 유리벽을 세우고 그 안을 두상, 플루팅 Fluting된 기둥, 주두 같은 서구 고대 문명의 파편으로 채웠다. 로마에 본사를 둔 이 브랜드가 자기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보여주는 설정이다. 물론 모델과 옷을 제외한 모든 것은 철저하게 무채색으로 통일되어 감히 경쟁하려 들지 않는다. 또 다른 경향은 과감하게 건축을 소환하는 것이다. 프라다는 모델과 옷을 어떤 건물의 기계실로 데려갔다. 기계의 소음과 물성, 조형이 혹은 무심하게, 혹은 절묘하게 장면마다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화면은 흑백과 컬러를 오가며 이완과 집중을 반복한다. 오디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한 편의 잘 짜인 실험적 영상을 보는 느낌이다. 루이 비통은 실제 건물을 동원했다. 부천의 아트벙커 B39다. 그 거대한 내부 공간을 공사용 비계로 채우고 각 층을 아이콘적인 붉은색 사다리로 연결했다. 거기에 역시 붉은색의 ‘Hope’라는 글자가 적힌 작은 비행선이 떠다님으로써 미장센은 완성되었다. 그 사이사이를 앰배서더 BTS 멤버와 모델들이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옷을 입고 걸어 다닌다. 역시 모델과 옷 이외의 색상이나 물성은 철저하게 제한되었다. 아마 일부러 이런 공간을 찾았을 것이다. 이 공간의 리모델링 설계는 건축가 김광수가 했는데 그의 이름은 길게 이어지는 엔딩 크레딧에도 나오지 않는다. 패션과의 경쟁에서 배제되는 것은 건축가라고 예외가 아니다. 마지막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다. 생 로랑은 아예 문명을 버리고 사막으로 갔다. 하이힐이 푹푹 빠지는 모래 위 능선을 모델들이 걸어 다닌다. 여기서는 오히려 모델과 옷이 절제의 대상이다. 배경인 사막은 마음껏 자신의 색, 그리고 부드러운 선과 면의 조형을 과시한다. 거기에 더하여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고 밤하늘을 밝히는 불은 모래 능선의 이국적 관능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이 모든 것은 패션쇼라는 장르의 문법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듯하다. 드디어 옷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고나 할까. 자연 앞에서 결국 우리는 굴복하는 것일까.
예상대로,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모든 영상에 관객들, 그러니까 승부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무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가는 귓속말이나 종이 위를 달리는 펜의 소음이 사라지자 이제 옷과 배경, 그리고 모델만이 남았다. 눈앞에 모여 앉은 평가단의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벗어난 이들은 이 새로운 작업 환경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장면들을 기획하고 연출해낸 사람들 또한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상황을 설정하고 서사를 구성했음직하다. 적어도 어둠 속에 모여 있는 사람의 무리라는 비주얼적 고민 덩어리를 영상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서로 무언의 인사를 주고받으며, 이제 그들이 비로소 주인공이 되었음을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지긋지긋한 소위 ‘언택트’ 상황이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은근히 즐거운, 해방의 기회가 아니었을까. 글 / 황두진(건축가)

    피처 에디터
    전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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