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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은 "무엇이든 정답은 없어요"

2021.09.16전희란

기묘하고 웃기고 웅숭깊은 박병은의 바다.

남색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 드레익스. 니트 폴로 셔츠, 사르토리아 준 at 유니페어. 포켓스퀘어, 스카프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성선설, 성악설 그런 거 믿어요?
BE 그보다는 타고나는 본성을 믿는 쪽이에요. 정말 착하게 태어난 사람에게도 악한 면이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발현되는가의 문제죠.
GQ <킹덤: 아신전>의 민치록이란 인물에 대한 관객 반응이 흥미로웠어요. 민치록이 과연 선인인가, 악인인가에 대한 논쟁도 많더군요.
BE 선악. 요즘 화두잖아요.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 강연도 찾아본 적 있어요. 거기서도 말하지만 선악을 가르는 건 단순한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킹덤: 아신전>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민치록이 어떤 인물이고, 어떤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였어요. 조선이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 나라를 지키는 장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누군가에겐 선으로, 어떤 상황에선 악으로 비쳐질 수 있겠죠. 인물을 선악으로 구분 짓지 말고 작품 전체의 맥락에서 봐주시면 좋겠어요.
GQ 박병은 씨의 연기는 뭐랄까, 좀 기묘해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선 의사인데 환자 같은 연기를 했고, <암살>에서는 군인인데 가장 군인답지 않은 행동을 궁리했죠.
BE 정형화된 것과는 다른 것을 보는 기쁨을 좋아해요. 배우들은 대부분 의사 역할이면 정형화된 의사 연기를 해요. 제가 자주 가는 안과가 있는데요, 눈병 걸리면 의사 선생님이 호들갑을 떨며 타박해요. 아유, 그러게 손 좀 씻고 다니지 드러워 죽겠어, 라면서요. 현실에는 그렇게 흔히 생각하는 전형에서 벗어난 사람도 많아요. 평소에 유심히 관찰하고 기록해두죠. 전형의 바탕 위에서, 뭔가 다른 게 있는지 찾아가는 여정이에요.

니트 카디건, 라코스테. 오픈 칼라 셔츠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니트 베스트, 라코스테. 코듀로이 팬츠, 수박빈티지. 스펙테이터 페니 로퍼, 크로켓 & 존스 at 유니페어. 티셔츠, 헌팅 캡은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원래부터 그랬어요?
BE 대학교 때도 그랬어요. 말도 안 되는 것 좀 하지말라고 욕도 많이 먹었죠. 양반 역인데 뒤로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막 그랬거든요. 그런데 사극 말투는 도대체 누가 만든 거죠? 조선시대, 고려시대 각각 말투가 달랐을 텐데 말이죠. 우리가 사는 시대, 한 20~3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지금과는 말투가 완전히 달라요. 요즘 SNS에 밈처럼 떠도는 그 시절 뉴스 인터뷰만 봐도 그래요. 그러니까 배우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폭넓은 캐릭터가 나올 수 없죠.
GQ 관찰하는 게 즐거워요?
BE 어렸을 때부터 흉내 내고 그런 거 좋아했어요. 요즘 준열이랑 SNS 음성 메시지로 성대모사 대결하고 그래요. 준열이랑 통하는 부분이 많아요.
GQ 어떤 점이?
BE 후회는 잘 안 한다는 것. 이미 지나간 촬영에 대해 후회하거나 얽매이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 쏟아 부었으면 거기서 끝.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더 많은데 돌이켜 곱씹으면서 뭐 해요. 오늘은 좀 아쉽지만 어차피 내일 또 촬영해야 하는데. 내일 잘하자, 다짐하죠.
GQ <암살>의 가와구치 역 오디션을 보면서는 ‘이 역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면서요. 후회는 안 하지만, 후회할 것 같은 직감은 있는 거예요?
BE 그건 닥치기 전이니까요. 간절함이죠. 당시 내로라하는 배우들도 그 역할에 달려들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가진 게 없었어요. 열심히 하고 잘할 수 있다는 믿음밖에는. 그러니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어요. 그때 설사 떨어졌더라도 시원하게 흘려보냈을 거예요.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그건 나의 문제를 떠난 거니까요.
GQ 어복이란 말처럼, 배우에게도 작품 복이란 게 있다고 생각해요?
BE 있죠. 그런데 어복도 그렇지만 배우에게 기본적인 선구안이 있어야 해요. 작품을 바라보는 눈이 있을 때 행운도 같이 오는 거죠. 작품 복이 있는 배우를 보면 시나리오도 잘 보고, 이 시점에서 이 작품을 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해요. 그것이 모여 작품 복, 캐릭터 복이 되는 거죠.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사람한테는 복이 한정적으로 올 수밖에 없어요. 어복도 마찬가지. 붕어 낚시의 미끼만 해도 아주 다양하거든요. 지렁이, 새우, 옥수수, 떡밥…. 낚시를 많이 안 해봤는데 도 고기를 잘 잡는 사람이 있어요. 사람들은 어복이 많다고 말하죠. 그런데 그 사람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남들이 지렁이를 미끼로 쓸 때 옥수수를 한번 끼워 볼까? 이런 시도를 해요. 그건 전체적인 상황을 바라보는 눈, 감이 있다는 거예요. 어복이든 작품 복이든, 결국 작품과 물을 바라보는 능력, 그리고 감각이 있다는 거죠.
GQ 박병은 씨에겐 그런 감각이 있나요?
BE 겨우 조금씩 트여가는 정도예요. 이제 시작이죠.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작품이 끊이지 않은지 얼마 안 됐어요. <암살> 이후에야 오디션이 아닌 시나리오를 받아봤으니까. 지금이 40대 중반인데, 50대로 가는 과정에서 멋진 작품, 캐릭터를 계속 만나고 싶어요. 계속 배고파요.

크리켓 스웨터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흰색 옥스퍼드 셔츠, 체크 볼 캡, 모두 폴로 랄프 로렌. 테리 스웨트 팬츠, 헤리티지 플로스. 블랙 볼 캡, 이벳 필드.

니트 카디건, 라코스테. 오픈 칼라 셔츠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긴 무명의 터널 안에서는 지치지 않았나요?
BE 아니요.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언젠가는 분명히 대한민국에서 좋은 배우로 활동할 수 있을 거다, 그런 믿음이 있었어요. 박병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속 바쁘게 움직였으니 사실 무명은 아니었죠. 이러다 내가 70대까지 오디션 보러 다니면 어떡하지? 다행히 이런 무서운 생각은 안 했어요.(웃음)
GQ 좀처럼 주변 상황에 동요하지 않는 편인가 봐요.
BE 맞아요. 그럼에도 동요하는 순간? 촬영할 때 제가 생각한 방향과 감독의 디렉션이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혼란이 오죠. 그럴 땐 서로의 입장을 듣고 양보하며 만들어가요.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어요. 나의 정답만 중요했죠. 사람들이 왜 이해를 못 하지? 내가 이렇게까지 오래 고민했는데?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무엇이든 정답은 없어요. 특히 연기가 그래요. 연기는 상대방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인데, 그걸 무시하고 내 것만 하면 앙상블이 깨져요. 그럼 결코 좋은 신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GQ 아까 어복 얘기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네요.
BE 20대에는 신에서 나만 돋보이고, 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여기서 잘해야 또 캐스팅이 될텐데, 하는 절박함도 있었으니까요. 30대 중반 지나서야 깨달았죠. 내 연기가 이 신에서 조금 미흡해도 이 신에 있는 누군가가 잘해주면 나와 함께 상승한다는 걸. 추구하는 연기도 달라졌어요.
GQ 어떻게요?
BE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보다, 진심을 담아 툭 던질 때 더 울림이 크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랬니, 참 속도 좋다.” 김혜자 선생님이 툭 한마디 던지면 그 감정이 다 전해져 오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기. 정말 어렵고,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시작부터 간결한 건 아니에요. 하나의 캐릭터에 오만 가지 해석과 장치들, 설사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다 붙여보면서 일단 나무를 풍성하게 키워요. 숲이 울창해져야 잘라낼 게 있잖아요. 앙상한 채로는 자랄 수 없으니까. 울창한 나무를 정원 다듬 듯이 정성스럽고 예쁘게 커팅하면 마지막에 오롯이 남는 것들이 나와요. 농축된, 순수한 결정체들. 그것만을 가지고 촬영장으로 가는 거죠. 그럼에도 아직도 현장 가면 욕심이 생겨요. 여전히 줄여가는 과정이에요. 흐허허.

리넨 하운드 투스 재킷, 팬츠, 모두 드레익스. 모헤어 스웨터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운동화, 반스.

니트 베스트, 폴로 랄프 로렌. 옥스퍼드 셔츠, 수박빈티지. 니트 타이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안경, 옐로우비.

GQ 이번 드라마 <인간실격>에서 아주 보통의 평범한 사람, 정수로 분해요. 평범한 사람의 연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BE 부정 역의 전도연 선배, 강재 역의 류준열, 온통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평범한 사람에게 어떤 극단적인 아픔, 슬픔, 괴로움이 있겠어?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 가닿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죠. 평범한 사람들의 아픔에 다가가는 이야기예요.
GQ 대본의 어떤 부분이 특히 좋던가요?
BE 굉장히 필력 좋은, 잘 쓴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너무나 사실적인 말투, 다른 글에서 보지 못했던 표현들을 읽으면서 어찌나 울다가 웃다가 했는지. 그 덕분에 배우로서 감정에 더욱 진하게 물들 수 있었어요. 작가가 아픔을 달리 표현하는 방식, 태도도 좋았고요.
GQ 그 방식이 어땠나요?
BE 전도연 선배가 맡은 부정과 제가 부부 관계인데, 둘 사이에는 아픔이 있어요. 정수는 덤덤한 데 비해 부정은 여전히 자주 슬퍼하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작가님이 “사실은 정수가 더 아픈 거예요. 슬픈 내색을 하면 아내가 더 힘들 게 뻔하니까 애써 삼키는 거죠.” 하시는데 소름이 쫙 돋았어요. 그 한마디가 정수라는 캐릭터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되었거든요. 정수를 향한 작가의 애정,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어요. 마치 작가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이 들더군요. “정수야 힘들지? 잘하고 있어, 힘내.” 누군가 나의 뒤에서 묵묵히 나를 봐주는 것처럼요.
GQ 박병은 씨도 정수와 닮은 구석이 있죠?
BE 비슷한 면이 있어요. 다른 면이라면, 정수는 개애-그감이 없다는 점, 그거 하나 아쉬워요.
GQ 그렇죠. 박병은은 개애-그감으로 정평이 나 있죠.
BE 남자든 여자든, 개그 잘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좋아요. 재밌는 사람 만나면 기분 좋잖아요. 촬영할 때도 즐겁게 하고 싶고, 이왕 사는 거 재밌게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GQ 연기도, 낚시도 여전히 즐겁고 설레요?
BE 설레죠. 가만 있어봐, 내일 모슬포항 가서 무늬 오징어랑 참돔 잡아야 하는데 기상 상태가 이래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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