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꿈 같은 마을 '도싯' | 지큐 코리아 (GQ Korea)

진짜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꿈 같은 마을 ‘도싯’

2021-09-28T15:53:46+00:00 |travel|

고속도로도 없고, 번화가도 없으며, 사람들이 모여 사는 큰 마을도 드문 곳. 잉글랜드 남서부의 마을 도싯은 매혹적인 여행지와는 거리가 멀다. 도싯으로 이사한 여행 작가 스탠리 스튜어트가 마을을 걸었다. 여행가는 왜 도싯에 머무르게 됐을까.

잉글랜드 도싯 Dorset의 해안가 풍경.

오두막은 도싯 Dorset에서도 아주 깊숙한 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 크기는 작았고, 진저브레드 맨이나 망토 두른 늑대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책장으로 벽을 메운 방이 나타났다. 고요하나 오두막 주인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열어둔 창문 너머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오두막 안쪽 끝 벽면에는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빛나는 눈빛을 지닌 청년들의 사진이었다. 오두막 주인의 사진도 있었다. 알라딘처럼 사우디 헤자즈 지방 베두인족의 전통 머리 장식을 하고 있는 사람, 아라비아 로렌스라고도 불리던 남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다.
오늘날 내셔널 트러스트가 소유한 오두막 클라우즈 힐 Clouds Hill은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마지막 거처다. 로렌스 앞에 붙는 칭호는 여러 가지다. 영국의 군인, 고고학자, 그리고 아랍의 독립을 위해 싸운 아라비아 민족 운동의 원조자 등등.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가 개봉할 만큼 로렌스는 특히 중동 국가에서 이룬 위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유명세가 달갑지 않았던 로렌스는 이름을 토머스 에드워드 쇼로 바꾼 후 이곳 도싯에 은거했다. 영국의 여러 주 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곳이라는 인식이 컸을 것이다. 로렌스는 피들 강가의 조그마한 마을인 터너스 퍼들 Turners Puddle에 자리한 이 아담한 오두막에서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 이른 그에게 도싯은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안식처였다. 소박하고 전원적인 아름다움, 평화롭고 조용한 일상. 해가 지고 그림자가 드리우면 로렌스는 오두막 뒤편 언덕에 올라 굽이치는 프롬강과 모레턴 마을 Moreton까지 펼쳐진 황야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1935년 어느 봄, 그는 모레턴 마을에 묻혔다.
클라우드 힐을 찾은 저명 인사 중에는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를 쓴 소설가 토머스 하디도 있다. 도싯의 도체스터 Dorchester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하디는 고향 도싯의 곳곳을 여러 작품에 녹여낼 만큼 아꼈는데, 그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이 지역은 “진짜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꿈 같은” 곳이다.

나의 경우에도 목가적 이상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도싯의 이미지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 한적한 시골길과 정원,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 석회암과 어지러이 빛이 내리는 숲, 아담한 마을 공원과 은은한 교회 종소리까지, 마치 영국이라는 나라의 이상적인 모습만을 추출해 모아둔 것만 같았다.
딸아이에게 케네스 그레이엄이 쓴 동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소개해주고 나서 우리는 마을 풍경 속을 걸으며 책을 읽었다. 두더지가 사는 들판, 쥐가 사는 강기슭, 오소리가 사는 숲, 그리고 두꺼비의 집까지 이어진 먼지투성이 길 등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과 비슷한 장소를 함께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도싯에는 유년기를 풍요롭게 채워주고, 훗날 그러한 유년기를 향한 그리움에 호소하는 어떤 순수함과 기쁨이 있다.
도싯은 딱히 주류 세계를 따른 적이 없다. 고속도로를 갖추지 않은 몇 안 되는 주 중 하나이고, 도심이라 할 만한 곳도 없고 큰 마을도 거의 없다. 대성당도 없고, 대학도 없고,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구기 스포츠인 크리켓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도 없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 자체가 별로 없지만.
반대로 도싯이 가진 유산은 아름다움이다.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도싯이 보여주는 풍경은 한 가지가 아니다. 이곳에는 수백 개의 풍경이 있다. 소 떼가 있고 부드러운 목초지가 있다. 소의 냄새가 바로 도싯 북부의 냄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옹기종기 들어선 촌락이 있고, 오래된 수도원을 중심으로 황갈색 돌길이 깔린 마을이 있다. 도싯의 해안 지역인 퍼벡 Purbeck에는 가파른 절벽에 둘러싸인 코프성 Corfe Castle이 웅장하게 솟아 있고, 과거 왕실 사냥터였던 크랜본 체이스 Cranborne Chase 고원에서는 솔즈베리 평원 Salisbury Plain부터 와이트섬 Island of Wight까지, 무려 40마일에 걸친 장관이 드넓게 펼쳐진다. 해변에는 잉글랜드의 자연 유산인 쥐라기 코스트 Jurassic Coast가 있어 열심히 찾아보면 수천만 년 전 공룡 발자국도 발견할 수 있다. 도싯은 완고할 정도로 변함없는 곳이다. 그것이 사랑스럽다.

해안가를 따라 계속 이동하며 웨어햄 Wareham의 담쟁이가 무성한 프리오리 호텔 Priory hotel을 지나, 와이크 레지스 Wyke Regis의 허름하지만 바다에서 갓 잡은 굴을 놓는 크랩 하우스 카페 Crab House Cafe도 지나, 퍼벡의 해산물 레스토랑 셸 베이 시푸드 비스트로 Shell Bay Seafood Bistro까지 지나면 스터들랜드 Studland의 호텔인 더 피그 온 더 비치 The Pig On The Beach에 도착한다. 빅토리아풍을 재미있게 풀어낸 인테리어 분위기에,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다정함이 있는 이곳을 그냥 지나치기는 힘들다. 문 밖으로 나서면, 바다에서 즐기는 다채로운 수상 액티비티도 펼쳐진다.
그렇다고 도싯의 좋은 것이 전부 해안가에만 있는 건 아니다. 내륙으로 걸음을 옮기면 나오는 쉐르본 Sherborne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더 그린 The Green이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쉐르본은 내가 사는 마을이다. 더 그린은 미쉐린이 선정한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빕 그루망 레스토랑이다. 정원에서 키운 뿌리채소들과 앞바다에서 온 게가 식탁에 오른다. 쉐르본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나오는 마을 비민스터 Beaminster에는 스테이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 브라시카 Brassica가 있고, 비민스터 근처 마을 코스콤 Corscombe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원로 셰프 마크 힉스가 지난 12월에 차린 컨트리 펍 더 폭스 인 The Pox Inn이 있다.
도싯의 작지만 알찬 요식업계를 지탱하는 기둥은 소규모 생산자다. 가족이 경영하는 솔키키 Solkiki는 윤리적으로 재배한 카카오 빈으로 유기농 비건 초콜릿을 생산하는 업체로서 지역 기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도체스터에서는 로스 넴스 Ros Nelmes라는 평범한 주부가 만든 도싯 진 Dorget Gin이 세계 진 어워드 World Gin Awards에서 은상을 수상한 적도 있다. 포딩턴 진 Fordington Gin이라는 사명을 달고 가정집 주방에서 세상으로 나오게 된 로스 넴스의 진은 보틀부터가 도싯의 풍광만큼 아름답다.
도싯을 대표하는 술이라면 사과주 Cider도 빼놓을 수 없는데, 내 입맛에 가장 맛있는 사과주는 브리드포트 Bridport 근처에 자리한 도싯 넥타 Dorset Nectar에서 만드는 사이더다. 2008년부터 스트롱 Strong 가족이 과수원을 운영하며 오가닉 사이더를 빚고 있다. 양조장 가까운 곳에는 젤라토의 고장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젤라티에레 훈련을 받은 앤 핸버리 Anne Hanbury가 운영하는 가게 바부 젤라토 Baboo Gelato도 있다. 핸버리는 신선한 과일이 듬뿍 들어간 젤라토를 손수 만들어 판다. 윈터본 킹스턴 Winterborne Kingston에서는 빈프레스 커피 Beanpress Cofee Co가 자신들의 농장에서 재배한 커피콩을 로스팅해 지역 카페와 음식점에 납품한다. 마지막으로, 도싯의 목초지를 가득 메운 소 떼와 양 떼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다. 도싯 다운 Dorset Down이라는 지역 품종 양이 따로 있을 정도로 낙농업에 좋은 자연 환경인 도싯에는, 북 앤 버킷 치즈 컴퍼니 Book And Bucket Cheese Company를 비롯해 신생 치즈 생산 업체가 잔뜩 있다. 도싯은 어느 모로 봐도 놀라움이 끝없이 튀어나오는 보물상자 같다. 그것도 맛있는 보물상자.

도싯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해변까지 3일 일정으로 하이킹에 나선 적이 있다. 언젠가 만난 아프리카 부족장이 내게 해준 이야기가 있는데, 직접 걸어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을 떠나 배낭을 메고 들판을 가로질러 만헐 Marnhull로 향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에서 테스가 죽은 자식을 위해 교회장을 치러달라고 사제에게 간청한 장소다. 하디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체스터에서 다시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여전히 고향을 배회하는 듯하다.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스터민스터 뉴턴 Sturminster Newton을 지났다. 토머스 하디와 그의 부인인 엠마가 1년 동안 지낸 커다란 빅토리아풍 집이 있는 마을이다. 어쩌면 그 1년이, 불행했다고 전 세계에 소문난 두 사람의 결혼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시절 하디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스터민스터 뉴턴 마을 강둑의 늘어선 초목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황금처럼 빛나고 꿀벌이 가득하다.”
프롬강에서 끌어다 만든 수로를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너도밤나무로 만든 둥근 교회 천장 틈으로 고운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습지를 건너 모레턴 마을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로 이동했다. 이곳 묘지에는 로렌스가 묻혀 있다. 불현듯 묘비 사이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내 다리에 목을 문질렀다. 홀로 외로이 환생한 로렌스일까. 이곳은 클라우즈 힐에 자리한 그의 자그마한 오두막과 고작 3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다음 날 나는 퍼벡 해안가로 나갔다. 도버 해협이 햇빛 아래 반짝이고 스와니지 Swanage 마을 방향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철기 시대에 솟아 올랐다는 언덕 플라워스 배로우 Flower’s Barrow에 올라가 나는 곧게 등을 펴고 누웠다. 제비들이 절벽에서 다이빙하며 노닌다. 푸른 야생화가 잔디밭을 수놓고, 산사나무 덤불은 열매가 맺혀 붉은빛이 돈다. 영국의 동화 작가 에니드 블라이튼은 매년 세 차례씩 퍼벡에서 휴가를 보냈다는데, 이런 풍경 속에서 진저 비어를 잔뜩 들이키며 놀고 쉬면 <페이머스 파이브> 같이 호기롭고 박력 넘치는 모험담이 술술 써내려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처칠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처칠은 모레턴의 교회에서 거행된 로렌스의 장례식에 다른 많은 고관대작과 함께 참석했다. 온 세계가 망자를 추격해 도싯 구석의 은거지에 들이닥친 모양새였다. 처칠과 로렌스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그야말로 단 하나도 없었다. 처칠은 뽐내기 좋아하는 공인이었고, 로렌스는 자급자족하는 은둔자이자 시적인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처칠은 그런 로렌스를 존경했다. 그를 “비범”하다고 묘사하는가 하면 “이 세계의 굴레를 벗어나 있으며 전통과 관습으로 길들이거나 구속할 수 없는” 인물이라 평하기도 했다. 내가 클라우즈 힐에서 잉글랜드의 자그마한 안식처인 도싯을 바라보며,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입 안에 머물고만 있던 표현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도싯에는 유년기를 풍요롭게 채워주고, 훗날 그러한 유년기를 향한 그리움에 호소하는 어떤 순수함과 기쁨이 있다.“
도싯은 사랑스럽고 일체의 속박을 거부하는 곳이다. 이 세계의 굴레에서 아주 조금 벗어나 있기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