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킷을 꺼내 입는다. 문을 나선다. 오늘은 어디로 향해볼까. 2021년 소설가, 음악가, 건축가 구보 씨의 일일.
1) 아듀, 불광문고
오후에는 약속이라도 있는 듯 불광문고 쪽으로 나섰다. 평소 버릇처럼 서점을 드나드는 편이지만 불광문고는 자주 가는 서점은 아니었다. 주된 동선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고, 불광역 인근에 갈 때에나 ‘온 김에’ 가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이 일주일 만의 방문은 꽤 잦은 일이었다. 게다가 지난주에도 뭔가를 알고 들른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근처에 갔다 오랜만에 들렸는데, 당일 집에 와 SNS 곳곳에 뜬 서점의 폐점 소식을 본 것이다. 매장이 한산한 것이야 불황인 요즘 어디나 손님이 없어 그렇거니 했지 폐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필 오랜만에 들른 시점이 28년째 그 자리를 지켜오다 폐점 직전이었다니 이상한 우연이었다. 오늘 나선 것은 문을 닫기 전에 한번 더 제대로 다녀와야겠다는 자발적 본능이었다. 솔직히 그것이 서점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힘없이 떠나보내는 또 하나의 공간에 내 나름의 예를 표하고 싶었다. 불광역 근처의 언덕을 한 정거장 정도 걸어 넘으며, 단골이라 할 수도 없는데 폐점 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새로 개업한 곳들에는 무관심하던 나였다. 그런데 이처럼 어떤 곳이 사라진다 하면 게으르던 몸도 슬슬 나설 채비를 하니, 내 시선은 주로 과거를 향하고 있나 보다 싶어진다. 불광역 인근에는 신축 빌딩을 올리는 크레인들이 서 있었고, 북쪽에는 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휴대 전화로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걸어 내려갔다. 폐점을 막아보려는 청원운동 링크가 있어 엊그저께 서명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어쩌면 서점이 이대로 사라지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도 가졌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소극적인가 반성했다. 적극적인 사람들은 직접 페이지까지 만들어 작은 희망이나마 찾는데 내 실천은 언제나 소극적이구나 생각했다. 서점 입구에는 페점을 기정사실화한 듯 마지막 인사를 담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종이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걸어두는 나무 한 그루도 있었다. 방문자 등록을 하고, 손 소독을 하며 멍하니 메모들을 보았다.
오늘은 지난주와 달리 사람이 꽤 많았다. 그리고 이미 책들이 좀 줄어든 느낌이었다. 책들은 전과 다름없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진열 계획이 잡혀 있지 않아서인지, 무언가 이미 기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나는 구석구석 돌며 책을 골랐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기준으로 골랐지만, 현 상황과 겹치는 제목이 자꾸 보이기도 했다. <죽음 이후의 삶>, <책의 미래>, <서점은 죽지 않는다> 같은 제목들. 기념이 될 만한 의미있는 책을 사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평소의 습관을 따르기로 했다. 눈길이 가는 대로, 마치 서점이 계속 이어지길 기원하는 것처럼. 6시 무렵이 되자 사람은 더욱 늘어 마치 모두가 안타까움에 응원하러 모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모두가 평소 더 자주 찾지 못해서, 아니면 나처럼 각자의 예를 표하러 찾아온 걸까. 아니면 폐점 직전의 할인 행사 때문에 온 것일까. 나는 사람들이 기적처럼 몰려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내던 여러 영화 장면들을 떠올렸다. 모금 행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어떤 결정권자를 감동시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내던 스토리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인원이 와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우리 시대를 휩쓸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점 운영진도 겨우겨우 버텨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는 소회를 남겼다. 내 지갑에는 불광문고의 쿠폰이 조금 있었다. 이곳에 오면 지갑 구석의 쿠폰을 찾아 할인을 받고 또 적은 금액의 쿠폰을 넣어두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쓰지 않았다. 사라진 나라의 지폐처럼 간직하기로 했다. 예상하긴 했지만 계산대에서도 더 이상 쿠폰을 주지는 않았다. 오늘이 이곳에서 가장 많은 책을 산 날인 듯했지만. 나는 점원이 네 권의 책을 계산하는 동안 서점의 로고가 적힌 책갈피를 몇 장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서점을 걸어 나왔다.
평소 자세히 보지 않은 입구의 계단과 아치형 창문들, 어린이 코너로 들어서는 나무 구름다리가 보였다. 그 모든 것을 오늘이라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 같았지만, 이미 많은 것이 사라져가는 데 무뎌진 탓인지, 웹에 다른 이가 찍어둔 사진도 많은 시대라 그런지 잠깐 바라만 보았다. 나는 어색한 자세로 입구로 돌아가 감사의 메모 한 줄을 써서 나무에 건 다음, 저녁의 불광역으로 걸어 나왔다. ‘1993~2021 불광문고. 그동안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김목인, 음악가
2) 보덴제의 유령
나는 검은 돌로 만든 작은 다리 위에 서서 구름이 빚어낸 하늘의 경계를 응시하고 있다. 비가 올 모양인지 뭉근한 구름에 회색빛이 진하게 감돈다. 다리 아래 한 줄 철길은 어느 지점에서인가 끊겨 있다. 기차가 선로를 따라 들어왔다가 용수철처럼 다시 튕겨 나간다. 길을 떠나는 기차의 꼬리가 가볍게 흔들린다. 기차는 해안을 따라 중세의 성이 내려다보이는 독일의 도시, 수상 무대에서 오페라가 열리는 오스트리아의 도시, 수백 대의 요트가 머물러 있는 스위스의 도시를 거쳐 이곳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기차가 떠난 아침에 다시 고요가 찾아든다. 사람들은 느릿한 걸음으로 걷고, 짝지어 가는 이들은 목소리를 낮춘다. 내리막길을 따라가다가 통유리창 안쪽에서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 노부부를 발견한다.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며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신다. 왼쪽으로 분수대가 놓인 광장이 나온다. 큰길에 닿은 광장 북쪽에는 노천식 와인 카페가, 남쪽에는 요양원이 있다. 광장을 가로질러 요양원의 거대한 벽을 따라 내려가다가 멈춰 선다. 골목길 중간 즈음 왼편으로 샌드위치와 커피가 그려진 붉은 입간판이 눈에 띈다. 막 구운 브레첼에서 퍼진 빵 내음이 골목을 가득 메운다. 유리창 안쪽이 비어 있는지 확인한 후 나는 자연스레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늘 앉아 글을 쓰는 자리가 역시나 비어 있다. 탁자의 폭이 좁고 시야는 요양원의 아이보리색 담벼락뿐인 이 자리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적어도 내게는 가장 좋은 자리다. 콘센트가 있는 유일한 곳이니까. 카페에서 자리를 이용하면 가격이 배가 되니, 아침으로 먹을 커피와 토마토 치즈 호밀 샌드위치의 값어치 6유로, 8천원만큼의 글은 꼭 쓰기로 한다.
오전 작업을 마치고 출출해질 즈음 밖으로 나와 다시 걷는다. 간단한 음식을 파는 삼거리 비스트로에서 비트가 들어간 붉은 수프와 함께 나온 빵 두 조각을 점심으로 먹는다. 비스트로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건너면 그리스 신화를 모티프로 만들었다는 분수대가 있다. 그 뒤쪽으로는 작은 동네 서점이 자리 잡았다. 서점지기가 매주 정성스레 메모를 달아 책을 추천하는 곳이다. 서점이 있는 블록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드디어, 눈앞에 희고 몽글한 구름을 배경으로 하는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회색 구름이 걷히고 온전히 하얀 구름에서 흘러나온 햇살이 물 위에 내려앉는다.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맑은 호수 위로 물비늘이 반짝인다. 호숫가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눈앞의 광경에 넋을 뺏긴다. 멀리 이층집들이 이웃한 저곳은 스위스 어디쯤일 것이다. 다시 일어나 천천히 걷다가 다시 앉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걷고 싶으면 걷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 물소리가 일렁이자 작은 갈매기들이 빛을 따라 이곳으로 와 앉는다. 갈매기들에게 말을 건넨다. ‘평화롭다. 너희도 그렇지?’ 고개를 돌려 내가 앉은 곳의 위치를 살핀다. 역시나 이쯤에서 멈췄다. 작가 융어 형제가 살았던 집 앞이다. 그들의 시선으로 다시 호수를 말도 없이 한참이나 내려다본다.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어느새 함께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순간만큼은 그와 친구가 되는 느낌이다. 점심 휴식을 끝낸 시립 도서관이 문을 열 시간이다. 그곳에 조금 더 앉아 있어도 좋고 방죽을 따라 더 걸어도 좋고 테라스 카페에 앉아 호수를 가르는 요트를 보는 사람들을 구경해도 좋을 테지만, 나는 다시 글을 쓸 채비를 한다.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글이 잘 써져 흐르는 시간이 아까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내 가방에는 내 글이 담긴 노트북이 있고,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그런 마음을 심장에 꾹꾹 채우고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난다.
온전히 평온한 이 시간 안에, 이 공간 안에, 나는 없다. 2020년 봄부터 세 국가를 연결하는 기차는 끊겼다 이어지길 반복한다고 했다. 베이커리 카페에서는 테이크아웃만 가능하고 콘센트 자리는 몇 달째 비어 있을 것이다. 호숫가를 찾는 사람의 수는 몇십 분의 일로 줄었다. 그 시간이 그립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멀리 이국을 건너다보던 시간이, 평온하게 떠다니는 요트와 햇살 사이로 부서지는 물결을 바라보던 무엇에도 욕심 없는 시간이, 가끔 미치도록 그립다. 다만 내가 믿는 것은 그곳은 오늘도 변함없었을 거라는 것. 보덴제 호수는 어김없이 흐르고 따뜻한 햇살이 물 위에서 반짝였을 거라는 것. 그곳이 온전히 내 안에 있으니 나는 오늘도 그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나는 그곳에 있던 내 영혼을 불러온다. 다시 재킷을 꺼낸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재킷을 꺼내 입는다. 결국 다시 그곳을 찾는 날이 올 거라고 믿기로 한다. 그날이 오면 가장 먼저 호숫가 벤치를 찾아갈 것이다. 갈매기들에게 그리웠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내 방 안에 앉아 남은 작업을 마치고 모니터를 끈다. 최유안, 소설가
3) 휴식 / 생산
휴식하리라. 주말엔 반드시 휴식하고 말리라. 한주 내내 바쁘게 지내는 동안 이를 갈며 다짐했다. 책 한권 읽기, 영화 보기,그냥 늘어져있기. 돌아오는 주말마다 떠올리는 휴식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소박한 계획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다. 기억하지도 못할 휘발성 웃음과 함께 주말은 매번 소멸해버렸다. 사라져버린 나의 주말은 수백 줄이 넘어가는 유튜브 재생 기록 안에 박제되어버렸다. 돌아오는 일요일 저녁마다 허탈함을 너머 죄책감까지 느껴야 했다. 월요일에 백신을 맞는 까닭에 휴일이 하루 더 연장되었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또다시 휴식을 다짐해야만 했는데, 재킷을 꺼내 입고 어디론가 향해달라는 편집자의 제안이 구원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휴식은 자유만큼이나 버거운 일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에 따르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 잠시라도 나태해진다면 저 세상 알고리즘에 빠져 하루를 헌납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휴식은 절로 피어나지 않는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생산해내야 하는 것이다. 술자리 벌칙을 수행하는 사람처럼,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재킷을 골라 입었다. 나의 재킷을 묘사하자면 ‘나일론 73퍼센트, 폴리에스터 15퍼센트, 폴리우레탄 12퍼센트.’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결연한 자세로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며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 만한 위대한 경험을 기대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향하는 곳은 서울시립미술관.
오늘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개막일이다. 받은 메일함 속의 전시 초청 메일이 목적지를 정해야 하는 나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서두르려 한 것은 아닌데 전시 개막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미술관에 도착했다.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 되도록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끔씩 인파 속에서 짙은 향수 냄새가 새어 나왔다. 그들의 발걸음은 경쾌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지하철역, 퇴근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정장을 입고 지하철을 타는 사람을 좋아한다. 허리춤 구겨진 셔츠에서, 삐뚤게 선 육체를 지탱하는 얇은 구두 뒷굽에서, 잠시 눈을 감는 순간 눈썹 아래 움푹 파이는 눈꺼풀에서 개인과 사회 사이의 아찔한 균형을 엿볼 수 있다. 긴장과 불안, 그리고 안도. 욕망의 열기를 채 식히지 못한 그들의 모습을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아름다움은 현대에 이르러 지나치게 축소되어버렸다. 일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노동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은 수치스러움으로 변질되어버렸기에,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던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한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여기 휴식하는 사람의 발걸음엔 리듬이 없다. 휴식하는 사람은 속도가 제거된 사람, 어느 도박판에도 베팅하지 않은 심심한 사람이다. 긴장하게 될까 긴장하는 사람이다. 휴식을 버거워하는 사람의 안타까운 점은 그가 결코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휴식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오히려 휴식에 목마른 사람이다. 힘들게 은전 한 닢을 손에 넣은 사람이 끝끝내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주말이 되어 휴식을 지출하는 사람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하다. 맛있는 식당 앞에 줄 서서 기다리고, 가장 좋은 자리를 잡고,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어느 불편한 사건이 나의 주말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그 마음을 나는 잘 이해한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 머물 때마다 틈틈이 사람들을 염탐했다. 힘들게 얻은 휴식을 완전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거듭 확인하는 듯이 똑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했다. “대박” “완전 대박”, “맛있어” “완전 맛있어”.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저녁 오픈 시간을 조금 넘어 미술관에 도착했다. 미술관 로비에서 미술관 관장과 큐레이터, 그리고 애쓴 직원들이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쪽에서 인사를 하다가 아는 얼굴이 보이면 종종걸음으로 이동했다. 명절날 친척들을 반기는 모습 같았다. 오프닝 행사가 사라져버린 코로나 이후의 미술관은 어쩐지 썰렁하다. 샴페인도 없고, 케이터링 서비스도 없고, 마이크의 에코 음도 없다. 오랫동안 전시를 준비한 사람들에겐 많이 아쉬운 일일 테지만 나는 되려 그것이 좋았다. 오픈 전날 밤 땀 흘리며 전전긍긍했을 미술관은 그 모습 그대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고, 작가나 큐레이터 중 그 누구도 주목받는 사람, 화려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다. 일하던 공간은 일하던 공간 그대로, 일하던 사람은 여전히 일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마스크 때문인지 몰라도 전시 관계자들의 표정이 안쓰럽고 지쳐 보였다. 그래서 난 그들이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닿은 후에야 비로소 뜨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혹은 그 반대로 뜨거움을 느끼며 서로의 삶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승재, 건축가 (푸하하하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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