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조의 2호 | 지큐 코리아 (GQ Korea)

겐조의 2호

2021-11-16T16:04:33+00:00 |culture|

스트리트 패션과 하이패션의 만남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번 겐조의 아티스틱 디렉터 선정은 그래서 흥미롭다. 스타일의 역전과 편집의 시초, ‘2호’가 임명됐다.

겐조 신임 아티스틱 디렉터인 니고 Nigo는 일본어로 ‘2호’라는 뜻이다. 1호는 프래그먼트의 후지와라 히로시다. 후지와라는 1982년 도쿄의 패션 콘테스트에서 우승해 우승 상품으로 무료 런던 여행을 떠날 정도로 멋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파트너 말콤 맥라렌을 만나 중요한 조언을 듣는다. 이제 힙합을 주목하라고. 후지와라는 그 말대로 일본에 힙합을 들여와 ‘스트리트의 왕’이 된다. 왕이 되면 추종자가 생긴다. 1964년생 후지와라보다 여섯 살 어린 나가오 도모아키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후지와라처럼 되고 싶어 도쿄로 향했다. 생김새와 분위기가 후지와라와 닮았다고 ‘2호(니고)’라 불렸고, 곧 후지와라와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큰 ‘2호’의 탄생이었다.
니고는 베이프를 거쳐 진짜 거물이 되었다. 베이프는 니고가 1993년 하라주쿠의 매장 ‘노웨어’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그의 파트너였던 준 다카하시가 자신의 브랜드인 언더커버를 판매하는 동안 니고도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니고는 내내 미국 팝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TV 시리즈 <혹성탈출>에 나오는 유인원 이미지를 스트리트웨어에 붙인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게 배싱 에이프다. 니고와 후지와라 무리는 이때부터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을 알았다.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제품을 보여주고 조금만 생산했다. 자신들의 평범한 티셔츠를 갈망의 대상, 수집의 대상, 사냥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의 드로우 문화가 여기서 시작됐다.


니고와 베이프가 가진 큰 의미는 백인이 주축이 되지 않은 글로벌 브랜드라는 점이다. 베이프는 니고가 만들고 퍼렐 윌리엄스에 의해 더 유명해졌다. 니고는 퍼럴의 브랜드 빌리어네어 보이즈 클럽을 만드는 걸 도왔고, 퍼렐은 니고를 제이 지나 칸예 웨스트 등에게 소개했으며, 이들의 스트리트웨어 문화는 점점 더 인기를 얻었다. 패션 신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파리나 밀라노를 전혀 거치지 않고 글로벌 브랜드가 되어 세계의 인정까지 받았다. 그걸 상징하는 장면이 2005년 <인터뷰> 매거진 일본 특별판이다. 니고가 표지로 나왔고, 그 사진을 칼 라거펠트가 찍었다.
니고의 시대가 오기 전 아시아인이 패션 세계로 들어가려면 파리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모범 공식을 따라야 했다. 다카다 겐조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사람이다. 1939년생 다카다는 훗날 니고가 졸업한 분카 패션 학원을 거쳐 파리로 건너갔다. 그는 몇 년의 고생 끝에 1970년대부터 파리의 패션 리그에 정착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겐조는 아시아인 디자이너 다카다 겐조가 20세기에 고군분투한 결과물이다. 그때 겐조의 룩은 서양인이 생각하는 아시아 요소를 반영하고 있었다. 겐조 특유의 우아함의 뿌리에는 서양인들이 동양이라 생각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들이 기대하는 동양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던 시대였으니까.
겐조 이후의 겐조는 2000년대 하이패션 브랜드의 고민과 변화의 상징과도 같다. 겐조는 1993년 LVMH에 인수되고 다카다 겐조도 1999년 자신의 브랜드를 떠났다. 겐조 직후 임명된 질 로지에는 2004년까지 동양풍 질 샌더 같은 옷을 만들었다. 2004년부터는 안토니오 마라스가 겐조를 이어받아 겐조의 특징이었던 화려한 플라워 프린트를 2000년대 실루엣에 이식했다. 그 이후 디자이너는 오프닝 세레모니를 만든 움베르토 레온과 캐롤 림. 이들은 겐조를 한층 더 젊고 웨어러블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점차 겐조 디자인이 쿠튀르에서 스트리트풍으로 넘어갔다.
유럽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과 미국이 만들어낸 스트리트웨어라는 장르를 받아들였다. 루이 비통은 2000년 슈프림이 자기 로고를 스케이트보드에 썼다고 고소했지만, 2017년 자신들이 고소했던 슈프림과의 협업을 발표한 데 이어 파리 패션 신과 큰 상관이 없던 버질 아블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했다. 디올 역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의 특기인 컬래버레이션 등의 문법을 받아들여 나이키와 함께 에어 디올을 만들었다. 올해 가을 발매된 펜디와 베르사체의 ‘펜다체’는 아예 이름을 섞어버린 최신판 협업이다. 니고가 겐조의 아티스틱 디렉터(‘크리에이티브 디렉터’보다 한층 모호한 직함이라는 점에 주목하자)가 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혹자는 후지와라나 니고를 두고 로고 섞고 색깔 바꾸는 사람 아니냐고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들의 원천 기술이다. “후지와라 이전의 문화적 아이콘은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드는 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후지와라와 그의 문하생들은 잡지를 위한 최고의 음악, 패션, 책, 제품을 큐레이팅하는 ‘편집’ 활동으로 성공했다.” 일본 패션의 한 세기를 분석한 W. 데이비드 막스가 <아메토라>에 적은 말이다. 그 말대로 스트리트웨어는 편집의 예술이다. 스트리트웨어에 혁명적인 실루엣이나 예술적인 패턴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이 예쁜지, 무엇을 섞었을 때 멋진지 파악하는 편집 감각이다. 말하자면 손보다 눈이고, 그 면에서 스트리트웨어는 공예나 회화 등의 고전 예술이 아니라 선언 자체가 예술이 되는 현대 예술에 가깝다.


대중문화 자체가 그런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 21세기를 대표하는 대중음악인 힙합도 마찬가지다. 이론적으로 힙합은 연주가 필요 없는 음악이다. 기존 음악에서 좋은 부분을 따서 붙인 후 자기 이야기를 하면 힙합이 된다. 음악인의 덕목도 달라진다. 소스를 이어 붙여 자기만의 분위기를 만든다면 어엿한 음악인이고, 멈블 랩과 플레이보이 카티의 성공이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니고는 그러한 편집의 예술을 시작한 선구자이자, 편집의 예술을 사업화하는 데 성공한 거물 사업가다. 그리고 이제 니고의 영향을 받은 크리에이터가 생기고 있다. “니고는 일본인 창작자로서 내게 큰 영향을 줬어요. 저도 음악을 만들고 옷과 제품을 만드는 실험을 해보고 있거든요.” 뉴욕에서 태어나 LA에 정착한 일본인 프로듀서 산세이 Xansei가 나와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동안 백인과 유럽인으로 대표되는 기존 세계도 변했다. 이제 미국과 유럽은 니고와 후지와라가 만든(편집한) 이미지의 투자자이자 충실한 공방 역할을 한다. 니고는 버질 아블로와 함께 루이 비통 컬렉션 제작에 참여하고, 불가리는 후지와라 히로시 버전의 불가리를 만든다. 공업의 역사를 생각하면 상징적인 일이다. 전에는 유럽이나 미국이 세계로 퍼질 제품을 디자인하면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제품을 생산했다. 이제 일부 산업 영역에서는 그게 뒤집혔다.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제품을 디자인하면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의 공장에서 그 제품을 생산한다. 역사적인 역전이다.
유튜브에 2019년 <컴플렉스> 매거진이 대형 마트만 한 니고의 창고를 찾아가는 영상이 있다. 거기서 니고가 보석을 꺼낸다. 뉴욕의 보석상 제이콥&코 목걸이다. 스트리트웨어 특유의 과장된 하트 모양, 니고가 만든 커리 브랜드 ‘커리 업’의 로고인 카레 웨이터 등이 거대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되어 있다. 니고는 그 보석을 들어 보이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 영상의 영어 댓글 중 이런 게 있다. “그는 오리지널이 아니다. 그가 문화다. 스트리트웨어라는 장르의 창시자 중 하나다. 전설이다.” 스트리트웨어의 전설이 쿠튀르의 아티스틱 디렉터가 된 세상, 니고의 창고 공개 영상 조회수가 2백50만 회가 넘는 세상이다. 그래서 나는 니고 이후 겐조의 미래를 낙관한다. 글 / 박찬용(앤초비 북 클럽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