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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인간이 연예인 일감 잡아먹는다

2021.11.21GQ

인공지능이 감정과 창의성 등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까지 진출한 시대. 당신의 자리는 안녕하십니까.

스타들의 까다로운 요구에 환멸을 느낀 감독이 있다. 그런 감독 앞에 아름답고 고혹적인 데다, 그의 말에 순종적이기까지 한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시몬. 사람이 아니다. 디지털 여배우다. 대중이 바라는 온갖 로망을 믹스한 시몬의 등장에 세계는 열광하고, 감독은 시몬을 합성 기술로 영화에 출연시켜 큰 성공을 거둔다. 감격에 겨운 감독이 외친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어. 새로운 세계가 열린 거야!” 2002년 앤드류 니콜 감독의 영화 <시몬> 이야기다.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서 신통찮은 성적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한 가지 능력은 확실히 증명했다. ‘선견지명’이라는 능력.
<시몬>으로부터 19년. 지금 대한민국엔 ‘오로지’라는 이름의 인플루언서가 혜성처럼 등장해 광고계를 접수 중이다. 싸이더스 스튜디오엑스에서 제작한 가상 인간이다. 컴퓨터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매만진 로지 앞에 ‘스타는 탄생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은 무용지물이다. 로지는 다이어트로 섭식장애를 겪을 염려도, 학폭 논란에 빠질 우려도 없다. 악성 댓글에 상처받지 않는 강철 멘털과 24시간 활동 가능한 무한 체력은 덤. 노화에서 자유로운 로지는 나이라는 유통기간도 비껴간다. 업계 반응은 뜨겁다. 올해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광고료만 10억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출연까지 조율 중이다.
로지의 활약을 두고 가장 많이 들려오는 말은 “가상 인간이 연예인 일감 잡아먹는다”이다. 새삼스럽지 않다. 기계가 인간 고유의 영역을 침범해 온 역사를 우리는 목격해왔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운동)’은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체할 것을 우려한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기억된다. 1997년엔 세기의 대결이 전파를 탔다.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가 IBM이 만든 인공지능 ‘딥 블루’에 무릎 꿇는 장면이었다. 인류는 이 사건을 인간이 인공지능에 패한 첫 사례로 기록했다.


2016년엔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등판한다. 4승 1패, 알파고 승. 이세돌은 “인간이 진 것이 아니라 이세돌이 진 것”이라고는 했지만, 이후 알파고를 이긴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심경은 복잡했다. 인공지능이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꼽혀온 창의성까지 모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놀라움, 아직 가 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뒤섞였다. 인공지능이 소설도 쓰고, 작곡도 한다는 소식이 더해져 의구심은 크기를 키웠다. 그래서 기계가 인간의 육체 노동력뿐 아니라, 정신세계까지 대체하는 것일까. 그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는 줄어드는 것일까.
정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기존에 없던 영역이 생기면서 파생 직업이 창출될 것이라 말한다. 즉, 일자리가 줄어든다기보다, 일의 종류가 변화한다는 의견이다. 로지가 그 예다. 로지는 보디 모델 위에 로지의 얼굴을 합성하는 ‘디지털 더블’ 형태로 존재한다. 로지의 보디 모델로 활동하는 이들이 있고, 로지의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이가 있으며, 시각 효과를 담당하는 팀이 있다. 로지의 활약이 대체한 건 연예인들 일감이지만, 로지가 유명해질수록 그녀를 돌보는 팀의 수는 늘어난다. 로지의 소속사 대표이자 그를 창조한 백승엽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지 팀은 점점 늘어나는 중이고, 이런 식의 새로운 직업들이 더 활성화될 예정이기에 인간과 버추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버추얼의 싸움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넘어 인간을 굴복시키는 날이 올지는 미지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신세계를 향한 욕망은 쉽게 꺾이지 않으리란 것이다. 자본이 모이는 시장이고, 돈이 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이 순수 과학만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면 순진하다. 그 이면에는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디지털 신인류의 아버지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로지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 로지가 돈을 벌고 인기를 끄는 건 로지의 욕망일까. 당연히 아니다. 로지를 만든 회사의 욕망이며, 로지가 벌어들이는 돈 역시 모두 회사 통장에 쌓인다. 미국 LA에 사는 열아홉 살 가상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가 미국 스타트업 브러드에 벌어다 준 2020년 매출은 1백30억 원이다. 가상 인간의 아버지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더 진화한 제2의 릴 미켈라, 제2의 로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로지의 성공을 확인한 싸이더스 스튜디오엑스는 ‘남자 3인조 아이돌’ 출격을 예고했다.

인간의 욕망으로 원초적 성욕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분야에서 돈이 되는 것. 그러니까 ‘킬러 콘텐츠’ 중 하나는 포르노그래피다. 이미 인간을 대체하는 섹스 로봇이나 VR 섹스 콘텐츠가 무섭게 성장 중이다. 록시라는 이름의 섹스 로봇이 2010년 등장한 이래, 섹스 로봇은 구매의 대상이 됐다. 구매자는 아바타 꾸미듯 로봇의 머리 색깔, 피부, 성격 등을 취향에 맞게 주문할 수 있다. 캐나다와 유럽 몇몇 나라에선 로봇 성매매 업소도 영업 중이다. 섹스 로봇을 지지하는 이들은 발기부전이나 조루증 같은 공포에서 인간을 이롭게 한다고 주장한다. 아, 분야를 가리지 않는 홍익인간 정신.
섹스를 위해 만들어진 휴머노이드의 발달은 일부일처제나 불륜 개념도 바꿀 수 있다. 휴머노이드와 섹스하는 건 배우자에 대한 배신일까 아닐까? 자신의 연인이 휴머노이드와 섹스하는 걸 받아들 수 있는가? 휴머노이드와의 밤이 당신과의 밤보다 뜨겁다면? 영화 <AI>에서 주드 로가 연기한 섹스 로봇 지골로 조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 로봇 애인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는 인간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게 될걸?”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흉측하게 그런 걸 왜 쓰냐고 반복하고 싶은 당신에게, 주드 로 얼굴과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영화 <그녀>)가 찾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기술의 인간 대체를 두고 뜨겁게 달궈진 분야는 자율주행 자동차다. 전문가들은 자율주행차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마이클 샌델의 그 유명한 <정의란 무엇인가>의 ‘트롤리 딜레마’가 현실화한다고 입을 모은다. 생각해보자. 차 엔진이 고장 난 순간, 자율주행차 AI는 보행자와 운전자 중 누구를 살려야 할까. 아니, 누구를 살리도록 프로그래밍할 것인가. 만약 그 어떤 상황에서도 차 주인을 보호하도록 설정된다면 이 차는 차주를 제외한 타인에게 무기가 될 수 있다. 나를 배격할 수 있는 로봇이란, 인류를 공격한 <어벤져스>의 인공지능 로봇 울트론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올해 한 예능에서 고(故) 김광석이 ‘보고싶다’를 열창하는 모습을 봤다. 이 곡은 김광석 사후에 나온 노래이니, 당연히 그가 부른 적이 없다. 목소리의 정체는 김광석을 대체한 AI. 나는 그 노래가 좋으면서도 조금은 불편하고 소름 돋았다. 뮤지션은 자신이 내는 미세한 창법 하나에도 예민하다고 들은 바 있는데, 이 노래를 그가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싶기도 했다. 나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카피한 인공지능이 나 모르게 어딘가에서 활약하고 있다면 어떨까. 일단 주위에 보이스피싱 주의보부터 발령해야 할 테다.
아, <시몬>의 결말을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공지능 시몬과 감독의 권력 관계는 역전되고, 감독은 사면초가에 몰린다. 고생 끝에 위기에서 벗어난 감독이 얻은 교훈은 기술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자가 아니다. 그는 제2의 시몬을 만들기 시작한다. 성공을 욕망하면서.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피처 에디터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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