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men

스우파로 보는 인간 관계와 사회 생활

2021.11.27GQ

스승과 제자, 리더와 팀원, 도전자와 저지, 가수와 댄서. 그물망처럼 얽히고설킨 스우파 안의 관계성은 세상 수많은 인간관계를 비춘다.

시선이란 얼마나 흥미로운가. K팝 가수 무대에서 배경으로 존재했던 댄서들이 변방의 조연이 아니라 어엿한 주인공으로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다. 댄서들 ‘직캠’이 등장했고, 과거 배틀 영상이 유튜브에서 ‘떡상’했고, TV 채널을 돌리는 족족 댄서가 나오지 않는 예능이 없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 이후 댄서들은 더 이상 무대 뒤의 움직이는 배경이 아니다. 춤바람의 진원지이자 덕질의 대상이다.
고백하자면 <스우파> 방영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심드렁했다. 엠넷이 또 엠넷 하는 건가 싶었다. 악마의 편집, 캣파이트, 60초 후에도 계속된 대국민 사기극 같은 것들 말이다. K팝 가수가 독점하던 스포트라이트를 댄서들에게도 비추겠다는 기획 의도는 그럴 듯해 보였으나, 숨은 속내를 모를까. 출연진 재능을 적자생존 논리에 갈아 넣어 악랄한 재미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새삼스러울 건 없다. 이건 엠넷이 <슈퍼스타K> 시절부터 마블의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처럼 일궈온 일종의 서바이벌 세계관이고 스테디셀러 상품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엠넷이 깔아놓은 미션은 여러모로 엠넷다웠다. ‘노 리스펙트, 약자 지목 배틀’로 갈등을 조장하고, 무대 정중앙에 서게 해주겠다며 깔아둔 판을 ‘메인 댄서 선발전’으로 교묘하게 파괴하고, 유튜브 ‘좋아요’ 수를 당락의 중요한 요소로 박아 대중성과 타협하도록 미끼를 던졌다. 그런데 웬걸. 누군가를 밀어내야 생존하는 흡사 <오징어 게임> 같은 판에서 출연자들이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출연자들이 ‘이길 수 있는 약자가 아닌 이기고 싶은 강자를 지목’할 때, 춤이 마이너하다는 중간 평가에 흔들리던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가 “우리가 좋아하는 걸 하자. 우리가 잘하는 걸 하자”고 각성할 때, “여러분의 불꽃 튀는 기 싸움을 기대하겠다”라는 피네이션 수장 싸이의 말에 프라우드먼의 립제이가 갑분싸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며 “기 싸움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고 반문할 때, 엠넷이 프로그램 곳곳에 유포한 악성 코드 바이러스는 힘을 쓰지 못하고 퇴치됐다.
따라야 할 ‘룰’이 있고 ‘저지’가 존재하는 방송사 주최 서바이벌 쇼에서 방송사와 도전자는 ‘갑’과 ‘을’의 관계가 되기 십상이지만, <스우파> 댄서들은 자신들의 기량과 곤조로 갑이 설계한 기획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버린 것이다. 나는 경쟁을 부추기는 방송사 관행 안에서 ‘이기기 위한 춤’이 아닌 ‘자기만의 박자’로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웅장해졌다. 믓찌다, 믓찌다, 우리 언니들! 어쩌면 진정한 아름다움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것’을 자존감 걸고 지킬 줄 아는 용기에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스우파>에 과몰입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기란 역부족이다. 그 이상의 무엇. 나는 그것이 풍부한 관계성에서 오는 서사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스승과 제자, 리더와 팀원, 도전자와 저지, 가수와 댄서…. 그물망처럼 얽히고설킨 <스우파> 안의 관계성은 세상 수많은 인간관계를 비춘다. 7년간 한 팀에 몸담았다 갈라선 후 5년 만에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허니제이와 리헤이가 1 대 1 배틀 후 서로를 얼싸안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유독 뜨거워진 것은 그 자체가 발단-전개-위기-결말로 귀결되는 하나의 드라마이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관계의 정수를 포착했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관계란 생물과도 같아서 고정값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좋을 때도 있지만 엇나갈 때도 있고, 나의 마음과 같지 않은 너의 마음에 상처받기도 하고, 곁에 있는 이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도 하는 게 관계다. 그러니까, 관계란 이 모든 것의 총합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아가느냐에 따라 진짜 관계가 결정된다. 리헤이와의 배틀 후 허니제이가 한 말은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알리는 결정적 신호였다. “항상 같은 곳을 바라보고 춤을 췄지, 마주 보고 춘 적은 없다. 이렇게 마주 보고 춤을 춘 게 처음이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내달렸지만 정작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부족해 갈라섰던 이들은 시간을 돌고 돌아 비로소 춤으로 교감한다.
사람들은 타인이 맺은 관계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 내리고 싶어 하는 묘한 악취미가 있다. A가 나빴네. B의 문제야. C가 배신했대. D가 돌아이라며? 어떻게든 선악을 가르려 하고, 믿고 싶은 대로 단정한다. 이를 기민하게 이용하는 데 도가 튼 곳이 방송국이다. 경쟁경쟁경쟁, 신경전신경전신경전, 디스디스디스. 그러나 출연진들은 악마의 편집에 당하지 않겠다는 듯 SNS로 친분을 드러내며 관계에 대한 성급한 추정에 선을 긋고, 단면만 보고 그들을 평가했던 시청자들을 멋쩍게 했다. 누구보다 ‘센캐’ 같았던 코카N버터의 속내가 순두부N버터일 줄은 또 누가 알았겠나.
직장의 애환을 경험한 누군가에 <스우파>는 근사한 오피스 드라마였을 것이다. 리더십에 대한 화두, 리더와 팀원에 대한 이야기가 <스우파> 안에 있다. 실제로 ‘MZ세대 취준생이 꼽은 <스우파> 베스트 리더상’ 같은 기사가 방영 내내 쏟아졌다. 관련 이슈가 전국 카페 테이블에서 꽃피우는 광경도 어렵지 않게 포착됐다. 가령 카리스마로 무장한 모니카 같은 리더를 둔다면 어떨까. 엄격하더라도 그로 인해 팀이 최상의 결과를 내고 내가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어 좋다는 의견도 있지만, 강한 채찍에 상처받아 화장실에서 머리 박고 울 것 같다는 사람도 있었다. 위트와 격려로 팀원을 아우르는 아이키의 리더십에 환호하는 사람들 반대편에는, 팀플레이를 중요시하는 그의 방식이 쥐약이라는 의견도 존재했다.


그러니까, 정답은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 격려에 힘을 얻는 사람이 있고, 강한 주문에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당연한 삶의 이치를 알려줄 뿐. 동시에 우리 사회에 여성 리더 모델이 협소했던 게 아니라, 이를 제대로 들여다본 콘텐츠가 부족했을 뿐이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토록 다양한 유형의 리더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나이나 서열이나 암투가 아닌, 실력으로 팀을 이끄는 여성 리더들. 여성은 감정적이라거나 질투가 심하다는 선입견은 이제 뒤집어볼 필요가 있다.
<스우파> 댄서들은 ‘여적여’라는 케케묵은 구태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봐 온 사회적 선입견을 역이용하기도 한다. 제작진이 남성 댄서와 함께하는 혼성 미션 ‘맨 오브 우먼’을 제시했을 때, 라치카는 커밍아웃 크루와 조권을 불러와 모든 종류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누군가에게 “넌 있는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 아름다워”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프라우드먼은 드래그퀸 퍼포머인 캼을 초청해, 성별의 경계를 없앤 의상을 입고,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빅엿을 날리는 질 스콧의 ‘Womanifesto(여성 선언문)’에 맞춰 춤사위를 펼쳤다. “난 단순한 엉덩이가 아니야.” 이 무대를 두고 SNS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회자됐다. “라치카는 퀴어 퍼레이드를, 프라우드먼은 인권 포럼을 열었다.” 무릇 좋은 서사는 인간의 복합성을 이해하게 만들고, 관계가 만들어나가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들여다보게 하며, 성급한 편견을 부끄럽게 만든다. 이것이 <스우파>라는 서사가 보여준 ‘존멋’이고 ‘쾌거’다.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피처 에디터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