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디스패치> 속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진지하지 않았다 | 지큐 코리아 (GQ Korea)

<프렌치 디스패치> 속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진지하지 않았다

2021-12-08T14:33:42+00:00 |interview|

오스카상을 수상하며 동세대 배우 중 가장 진지한 아티스트라는 영예를 얻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새로이 시동을 거는 중이다.

코트, 셔츠, 모두 그렉 로렌. 팬츠, 위니 뉴욕. 슬리퍼, 마르셀. 링크 브레이슬릿, 크롬 하츠. 빈티지 스카프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우리는 LA의 유명한 하이킹 코스 지하 주차장에서 만났다.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우리를 위해 준비한 무언가를 재빨리 건네주었다. 수상한 플라스틱 가방 안에는 잘 익은 체리와 수박, 생수 몇 통과 갓 짜낸 오렌지 주스, 냅킨으로 감싼 버터 토스트 두 쪽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매력적이다. 맡은 배역에 상관없이 깊이 있는 준비 작업을 즐기는 배우다. 우리는 길가에 앉아 그가 싸온 것들을 먹었다. 아침 9시 정각은 아니었지만 체리는 엄청나게 맛있었다.
마흔여덟 살인 브로디의 연기 경력은 30년이 넘는다. 이 시간 동안 그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강도 높은 헌신으로 시선을 모았다. 엄청나게 살을 빼거나, 근육을 무시무시하게 키우거나, 숲속을 기어다니는 등등등. “배역을 위해선 필요한 모든 걸 합니다.” 브로디는 말한다. “제 인생에 관여된 모든 사람이 그 점을 이해하고 존중해주고 있어요.” 다른 많은 배우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기복이 있긴 했지만, 그 강도 높은 헌신 덕분에 브로디는 동년배 배우들보다 더 높은데 자리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것이 주관적인 평가라 한들 브로디는 여전히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자이고,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최근 몇 년을 보낸 전업 배우다.
이 배우에게 2021년 하반기는 특히 성공적인 시기로 기억될 것 같다. 로이 가문에 맞서는 행동주의 투자자 역할로 HBO 드라마 <석세션> 시즌 3를 촬영 중이고, 웨스 앤더슨 감독과 벌써 네 번째 함께 작업한 <프렌치 디스패치>(다섯 번째 작업도 진행 중이다)가 세계에 순차적으로 개봉 예정이다. 2022년에는 아마 전설이 될 두 작품에서도 그를 볼 수 있다. 극작가 아서 밀러의 아내로서의 마릴린 먼로를 그린 넷플릭스 신작 <블론드>, 아담 맥케이가 연출하며 1980년대 쇼타임의 전설적 야구 코치 팻 라일리를 다루는 제목 미정의 HBO 드라마가 그것이다. 작품이 줄을 잇고,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연이어 공개되는 일이 얼마나 우연에 좌우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브로디는 그럼에도 매우 들떠 있다. “재미있는 작업을 많이 해오긴 했지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특히 엄청나게 좋은 상황이에요.” 브로디는 작품의 퀄리티가 어떻든 일단 자기 자신의 최대치 노력을 쏟아붓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출연한 작품에서 본인만 쓸데없이 ‘고퀄리티’인 모습을 종종 보여왔지만, 이번에는 작가 반열의 창작가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들인 만큼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코트, 발렌시아가. 빈티지 티셔츠, 스톡 빈티지. 팬츠, 디올 맨. 벨트, 디스퀘어드2. 체인, 브레이슬릿, 모두 크롬 하츠. 부츠, 모자, 모두 빈티지 제품.

우리가 만난 때는 LA 레이커스 감독 시절의 팻 라일리에 대한 작품을 촬영하던 시기였다. 하이킹 부츠와 양키스 볼 캡, 그리고 에비에이터 선글라스를 낀 브로디가 세트장에서 걸어 나와 “라일리 역이 뭔가 좀 이상하다” 말하기 시작했다. 브로디는 그 ‘전설적이라는 코치’에 대해 잘 몰랐는데 연구할수록 생각보다 훨씬 얽히고 설킨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팻 라일리는 코치로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전까지 대학 때는 촉망받는 농구선수였고 레이커스 시절에는 후보 선수였다. 9년의 프로 경력 후 서른 살에 그 기세가 끊긴 라일리는, 브로디의 표현에 따르면 “스포츠라는 영역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찾아보려 했고, 조기 은퇴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 레이커스팀의 헤드 코치가 끔찍한 사이클링 사고를 당하고 그를 대신해온 보조 코치마저 해고당하자 라일리가 코치를 맡게 된다. 레이커스는 이후 1980년대를 풍미한다. “한 사람의 불운이 근본적으로는 기회를 만든 거죠.” 감독인 아담 맥케이가 이 작품을 위해 캐스팅을 시작했을 때 각본가와 맥케이는 라일리 코치의 이중적인 정신력을 표현하고 싶었다.
“브로디는 스타일리시한 자신감과 취약성이 독특하게 공존하는 배우” 였기에 라일리 역에 완벽한 캐스팅이었다고 맥케이가 이메일에 적었다. 브로디는 맥케이가 생각한 팻 라일리 그 자체였다. 스웨그 넘치는 아르마니 수트의 아이콘이 아니라, 이상적인 포지션 대신 예상치 못한 곳에 떨어져 전성기로부터 뒤처지는 것을 걱정하는 한 젊은이 말이다. 브로디는 라일리의 이야기가 자신과 얼마나 닮았는지 기가 막힌다고 표현했다. 지난 몇 달간 브로디는 2003년에 <피아니스트>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후 그의 삶과 경력을 집어삼킨 후폭풍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당시 브로디는 라일리가 레이커스의 수장이 됐을 때 직면하게 된 것과 비슷한 모순에 시달렸다. 표면적으로는 세계 수준의 톱 배우였지만, 너무 일찍 정점에 도달한 경력의 향방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비극적인 한 인간이었다. 영화에 뒤따라온 명성과 부가 안정을 주었으나 동시에 그는 우울증과 섭식 장애에 시달렸다. 그의 경력은 그 자신은 물론 업계의 기대 또한 돌이킬수 없게 재정렬시켰다.
브로디는 지금 팻 라일리를 연기하면서는 일을 통해 배우게 될 준비를 마친 것같이 보인다. 우리는 무언가에 준비가 돼 있을 때 좀 더 제대로 배우게 된다. “전 그저 열린 마음으로, 두려움 없이 살려고 해요.”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서 브로디가 슬슬 속도를 냈다. 그는 내게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운이 좋다면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거죠.”

베스트, 팬츠, 모두 엠프리오 아르마니. 빈티지 탱크톱, 스톡 빈티지. 벨트, 톰 포드. 브레이슬릿, 크롬 하츠.

브로디는 LA 근교 이곳저곳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매일 아침 그는 자신의 그 호리호리한 몸을 검은색 옷 속에 집어넣고, 수프를 들이킨 후, 수동 기어 피아트에 올라타고 힐스에 있는 집을 떠나 촬영지로 이동한다. 브로디는 이내 그 통근 방식을 좋아하게 됐다. 그간의 작업이 상대적으로 덜 편안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브로디는 어느 날 그의 친구이자 배우인 오웬 윌슨이 항상 오웬 본인이 사는 동네에서 촬영하는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웬이 산타모니카에 사는데 항상 산타모니카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찍더군요. 저는 겨울에 불가리아에 있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동네인 산타모니카에서 한 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서 촬영하고 있었어요. 아마 점심을 먹으러는 자기 집으로 가겠죠. 진짜 놀랍지 않아요?”
그게 사실이다. 산타모니카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든다면 브로디를 캐스팅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동유럽풍의 절망감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필요한 영화라든지, 발칸 반도의 저예산 인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스러운 도전으로 여기는 배우가 필요한 영화에는 캐스팅될 것이다. 그는 스키 슬로프처럼 긴 코와 넓고 깊은 녹색 눈, 그리고 영구적으로 기울어진 한 쌍의 눈썹을 가지고 있다. 걱정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슬퍼 보이기도 한다. 거칠고 비음이 섞였고 현명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시대를 초월한 느낌이다. 웨스 앤더슨이 인정한 대로다. “브로디가 가진 희귀함은 그가 2021년이 아닌 1935년에 연기를 해야 한대도 가능하다는 점이죠.”
브로디는 솔직하다. 그의 어머니 실비아 플라치 Sylvia Plachy는 헝가리 혁명 당시 10대 나이에 부다페스트를 떠나 비엔나로 갔다가 가족과 함께 뉴욕에 정착한 후, 미국 최초의 대안 언론 <빌리지 보이스 Village Voice>와 일한 사진작가였다. “어머니의 삶과 일은 대부분의 사람이 놓치는 어머니 자신의 복잡성을 포착하게끔 했어요. 그리고 그걸 작품으로 남겼죠. 저는 그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었고요.” 브로디가 회상한다. 그는 무척 예민한 아이였고 그것이 축복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런 자신에게 늘 화가 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연기가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었다. “다행히도 연기가 제 출구가 됐어요. 거긴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놀랍도록 복잡한 인간들이 있더군요. 다른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면서 외롭지 않다고 느끼게 됐어요.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기쁨이란 보편성을 이해했고, 기쁨의 순간 아래 저 밑바닥에 깔린 고통에도 감사하게 됐죠.”
그의 어머니는 미국 극예술 아카데미(AADA, 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에서 촬영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마술사가 꿈이고 타고난 연기자인 그녀의 외동아들이 혹시 연기를 정식으로 배우고 싶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되고, 머지않아 그 아들은 하루에 네 과목씩 연기 수업을 듣다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뉴욕 스토리> 속 배역을 따내게 된다. 그 하루는 그에게 오래갈 교훈을 남겼다. 대본에서 몇몇 여자애가 고약한 향수를 뿌린 남자 캐릭터를 싫어한다는 장면이 나왔을 때 감독이 10대였던 브로디를 실제로 흠뻑 적셔버렸다. “코폴라는 정말 토할 것 같은 향수 한 병을 제게 완전히 들이부었어요. 소녀들이 실제로 반응하게 만든 거죠.” 브로디는 열아홉 살 때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리틀 킹>에도 출연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이 작품을 오웬 윌슨과 함께 보다가 브로디에게 매료된 순간을 기억한다. “그냥 즉각적으로 어떤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입구와도 같았어요. 그는 특유의 미소를 옅게 띠고 있었고 굉장히 편안해 보였어요. 우릴 사로잡았죠.” 그러나 앤더슨의 감상과는 다르게 브로디의 스타성은 꽤 긴 시간 동안 프레임밖에 머물렀다. 그는 <씬 레드 라인>에서 꽤 큰 배역을 연기했지만 테런스 맬릭 감독은 그의 장면 대부분을 걷어냈고, 스파이크 리 감독의 <썸머 오브 샘>에선 자유를 갈망하는 뉴욕 펑크 장면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브로디는 계속 두드렸다.

코트, 셔츠, 모두 돌체&가바나. 빈티지 셔츠, 디올 맨 at 데이비드 카사반트 아카이브. 부츠, 빈티지 모자, 모두 앤 드뮐미스터. 장갑, 요지 야마모토. 네크리스, 티파니.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로를 걸어 우리는 차를 세워둔 길 끝에 도착했다. 브로디가 “저한테 다른 생각이 있어요. 근데 좀 미쳤죠”라며 갑자기 길이 아닌 것처럼 생긴 좁은 샛길로 들어섰다. 우린 해보기로 했다. 도전은 브로디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이다. 연기 면에서는 종종 저주일 때도 있지만. 육체적으로 구타 당하거나 정신적으로 시험에 들게 한다. “배역을 위해 벌레도 먹어봤고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려도 봤어요. 나중에야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지? 싶었죠. 정말 바보 같죠.”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브로디의 답은 늘 같다. “두려워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당신이 내릴 수 있는 판단력을 한 단계 끌어올려주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연기와 고통에 대한 그의 생각을 시험해볼 기회를 줬을 때 브로디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인내심과 황폐함에 대한 실화 <피아니스트>에서 그는 나치가 바르샤바를 점령한 당시의 실제 생존자인 유대인 음악가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을 연기했다. 배역을 준비하며 그는 삶을 뼈에 새겨넣었다. 차를 팔고 전화를 끊었다. 아파트를 정리하고 짐은 창고에 보관했다. 독일과 폴란드의 호텔방에서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엄청난 책임감이었어요. 그게 절 변화시켰죠.” 촬영은 최악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 일 년 넘도록 그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58킬로그램까지 감량했던 다이어트는 그의 신체에 복수를 시작했다. 그 모든 경험은 그에게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슬픔을 남겼다.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브로디의 잊을 수 없는 연주 장면은 많은 이를 사로잡았다. 그는 아카데미 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가장 훌륭하고 헌신적인 (그리고 가장 광기어린) 배우 영역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대중에게 다음 세대 로버트 드 니로 혹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같은, 전통적인 미남형은 아니지만 명백하게 섹시한 킬러 같은 주연으로서, 모든 작가주의적 감독이 만드는 진지한 영화의 영원한 주인공으로 남을 듯한 인상을 새기게 된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던 주에 브로디는 잭 니콜슨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둘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 마이클 케인, 니콜라스 케이지와 함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미국이 이라크에 파병을 결정한 그 주에 그들은 잭의 집에 모여서 그 정치적 대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저를 다짜고짜 ‘브로피’라고 부르면서 집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둥글게 앉아서 스카치 위스키를 홀짝이고 시가를 피웠죠.” 브로디를 뺀 나머지 모두는 오스카상 수상 경험이 있었다. 니콜슨은 전쟁을 반대하는 의미로 모두 시상식에 참석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브로디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여러분은 어떨지 몰라도 전 갈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생각에는 동의해요. 무대 위에 서는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책임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브로디는 자신이 수상자일 거란 생각은 못 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수상자였다. 시상식 당일 아침, 할리우드 베벌리 블라바드의 식당 앞 모퉁이에 앉아 부모님이 자신을 태워가길 기다리면서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수상은 결코 운이라 할 수 없다. 브로디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역할에 투입했고, 최선을 다하면 인간 경험의 가장 원시적인 극단을 구현하고 묘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공고히하는 경험을 했다. 그가 슈필만 같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미친 짓이지만, 노력엔 일종의 도취감이 있었다. “내 인생에서 굉장히 많은 단계에 걸쳐 겪은 가장 힘든 일이었어요.” 그는 간단하되 지울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훌륭한 예술을 만드는 일은 고통스럽다는 것. 그렇기에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거의 유일한 종류의 예술이기도 하다는 것.

셔츠, 팩터스. 팬츠, 엠프리오 아르마니. 벨트, 톰 포드. 반다나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브로디의 연기 비결은, 이걸 비결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늘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훌륭하지만 성실하지는 않으면서 그냥 연기만 하면 되는 배우들과도 작업해봤어요. 그들은 창의적이었어요. 꽤 훌륭한 비법이기도 했죠. 그들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연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잖아요. 저한텐 그게 힘들었어요.” <피아니스트>의 한 신에서 그는 벽을 기어 올라가다 반대편으로 떨어질 때 발목이 부러져 절뚝거리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신발 안에 날카로운 돌뿌리를 집어넣었다. 착지할 때도 걸을 때도 너무나 아팠다. “왜 절뚝거리는 연기를 해야 하죠? 몇 분 동안만 실제로 아프면 되잖아요? 그럼 연기할 필요가 없죠.”
브로디는 미국 남성성의 상징과도 같은 팻 라일리 역할,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의 성공적인 캐릭터 계보의 ‘샤크’가 될 거라 스스로 말하는 마릴린 먼로의 남편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지금도 같은 접근 방식을 취한다. “상처 없는 허세는 없어요. 사실 대부분의 허세는 상처를 반영하죠.” 그 허세 자체가 일종의 절뚝거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관객은 브로디가 각 캐릭터의 저변에 세워둔 고통의 뼈대를 조금밖에 볼 수 없지만 브로디 자신은 그 아픔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 “적어도 나만의 접근법에선 이런 게 필수적입니다. 항상 돌뿌리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늘 지니고는 있죠.” 이건 발바닥에 문제가 있는 배역 외에 모든 종류의 감정을 전달하고자 할 때도 매우 유용하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제 제 비밀을 모두 알았군요. 제가 절뚝거리지 않을 때도 우울해 보이는 이유는 다 제 발밑에 넣어둔 망할 놈의 돌멩이 때문이었어요.”
브로디가 종종 힘들어하는 사실은, 모든 작은 불가능한 것이 모여 제대로 된 영화 한 편이 완성되기 때문에 수상 경력이나 명함의 뒷면만으로는 할리우드의 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는 건 없어요. 하지만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길 기대할 수 있죠.” 그 기대가 커지기까진 시간이 걸렸고 오스카상을 수상한 후 몇 년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수상 전까지) 17년을 연기했어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게 정상이었죠. 파파라치, 그들은 신경을 쓰
지 않을 수가 없어요. 원랜 아무도 절 따라오지 않았고 아무도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알고 있던 원래의 삶이 다 날아가버렸어요.” 2003년 오스카상 수상 이후 그가 해오던 모든 상호작용이 달라졌다. 변하지 말라고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이 멀어졌고 변해갔다. 그들은 브로디에 대해 다르게 말했다. 친구들이 그와 일하고 싶어 했고 사진가들이 그를 찍고 싶어했고 감독들이 그를 섭외하려 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알아가는 데 한 10년은 걸린 것 같아요. 수많은 면에서 이겼지만 졌고, 살아 있었지만 죽어 있었죠.”

재킷, 아디다스.

한동안 브로디는 특히 좋아했던 영화 제작자들과의 프로젝트에 합류해 독특한 불행을 겼었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빌리지>는 첫 번째 위기였고, 피터 잭슨의 초거대 예산 리메이크 작 <킹콩>, 웨스 앤더슨의 <다즐링 주식회사>, 라이언 존슨의 <블룸 형제 사기단>까지, 모든 선택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어김없이 브로디가 만들어낸 독특하고 강렬한 페이소스가 발휘됐지만, 가혹한 할리우드의 회계 기준상으론 모두 불행한 흥행 성적을 냈다.
그는 탈출을 꿈꿨다. 뉴욕 북부 어딘가에 어릴 때 아버지가 꿈꿨던 집을 구하는 꿈이었다. 그의 친구인 배우 마크 러팔로와 베라 파미가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집과 할리우드 경력은 양립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 당시 브로디는 배우 엘사 파타키와 연애 중이었는데, 그는 자기 성향보다 너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일이 끝나고 오면 원래 자신으로 돌아와 쉴 수 있는 집을 갖는 일이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브로디는 세르비아에서 영화를 찍다가 부동산 사이트에서 ‘돌로 지은 헛간 성’을 발견했다. 뉴욕에서 약 4시간 거리에 있는 이 거대한 화강암과 시멘트 집에는 마구간과 사과 과수원이 딸려 있었다. 브로디는 그 집에 푹 빠져버렸다.
브로디와 파타키는 대규모 리노베이션에 착수했다. 그러나 본관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둘의 관계가 먼저 끝났다. 리노베이션은 3~4년이 걸릴 정도로 큰 프로젝트라 그는 공사에 매우 집중했다. 처음에는 탈출이 목적이었지만 이내 모든 걸 쏟아붓게 됐다. 그는 집에 어울리는 소재를 찾으려고 인도와 중국을 여행했다.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캐나다의 농장에서 교회 창문과 손으로 깎은 대들보를 구입했다. 브로디가 해주는 무료 인테리어 조언은 이렇다. 돌벽의 줄눈을 다시 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는 줄눈 시공에만 4년을 썼다. 왜 그렇게 집에 집중했는 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그렇게 했다. 5~6년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전부터 브로디는 자기가 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유명해지기 위해 여전히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노력에 항상 보답이 오는 건 아님을 깨달았다. “어떤 이유로든, 가던 길이 나와 더이상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긴 시간이 있었어요. 내 피와 땀과 눈물을 일에 쏟아부어도 꼭 보상이 오는 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죠. 내가 오래 해온 일에 어떤 단절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한 발 물러났다. 그때 하던 작업을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을 더 이상 받지 않았다.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기 시작했다. 예술가들과 어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음악을 만들고 세계를 여행했다. 결국 브로디는 자신을 내던졌던 자신의 취미들이 연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길이 아니라 자신의 창의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신의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덜 고통스러운) 방법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그건 살아 있는 거지 도망치는 게 아니었어요. 지속 가능한 것을 계속 창조하려고 했던 거죠.”

재킷, 조르지오 아르마니. 셔츠, 턴불&아세르. 팬츠, 엠프리오 아르마니. 빈티지 부츠, 프라이. 빈티지 모자, 브로너. 선글라스, 모스콧.

우린 다음 날 점심때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7시 30분에 나는 하이킹 코스에서 내가 있는 곳의 좌표를 찍어 그에게 보냈다. 으스스하고 버려진 지 오래된 동물원 터. 이번에 브로디는 얇게 썬 복숭아와 블러드 오렌지에 작은 과일꽂이를 꽂아 가져왔다. 브로디의 관심은 근처 바위에 숨어 있는 다람쥐를 향했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다람쥐에게 줄 만한 간식거리를 싸오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후 “미안해”라고 속삭였다. “이렇게 귀여운 녀석을 만날 줄 몰랐네요.” 브로디는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최근 그의 방식은 방해받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조지나 채프먼(채프먼은 이전에 하비 와인스타인과 결혼한 적이 있으므로 브로디는 다시 타블로이드에 오르내리고 있다) 과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할리우드로 돌아가는 길은 그가 오랜 시간 동안 각본을 쓰고 제작에도 참여한 영화 <클린>으로 찾았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어떤 이야기가 사람들을 진정으로 끌어당기는지, 영화 제작자로서의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모든 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데 그래도 해내야 하는 때가 있잖아요. 그게 꽤 영웅적인 느낌이더군요. 실제 우리 삶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매일 겪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이 프로젝트 이후 많은 제작자가 브로디를 찾아오고 있다. 대중의 만족을 위해 주연 배우에게 많은 책임감을 지우는 일로부터 자유로워진 브로디는 캐릭터 작업에 대해 좀 더 예리한 시선을 갖게 됐다.
지금은 <석세션> 시즌 3 촬영을 끝내고 함께 출연한 배우 브라이언 콕스, 제레미 스트롱과 어울리는 것을 특히 즐기고 있다. “여기서 저는 이 큰 상어들과 함께 그들의 바다에 뛰어들고 있어요. 뛰어들어서 물어뜯어야 하죠. 그 스릴이 좋아요.”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순수한 코미디를 즐기고 있기도 하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그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범죄자를 발굴해 컨템포러리 아트의 미래로 만드는 능글맞은 아트 딜러를 연기하며 웃음을 되찾았다. 이 작품은 그의 경력의 궤적을 다시 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웨스 앤더슨과 협업한 가장 최신작이다. 앤더슨은 브로디도 즐길 줄 안다는 걸 할리우드에 보여준 셈인데, 그에 대해 브로디는 “앤더슨은 자신을 좀 풀어놓고 즐기면서 일하는 매력을 알려준 사람”이라 평한다.

팬츠, 디올 맨. 타이, 샤르베. 재킷은 빈티지 제품.

그래도 브로디는 여전히 고된 작업도 즐긴다. 마릴린 먼로의 자전적 이야기 <블론드>의 감독 앤드류 도미닉은 브로디가 아서 밀러 캐릭터를 좀 더 세밀하게 다듬길 꺼려한 점을 매우 높이 샀다. “너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로 보이지 않도록 연기했어요. 그리고 종종 배우가 비호감의 캐릭터를 연기할 경우 대부분 그들을 더 나쁜 자식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마치 ‘난 지금 나쁜 자식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건 내가 아니야’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러나 브로디의 본능은 완전히 반대였어요.” 한편 올해 미국 Epix 에서 방영한 드라마 <채플웨이트: 피의 저택>은 브로디의 고난이었다. 스티븐 킹의 단편 <예루살렘>을 원작으로 한 순수 고딕 호러물이었는데, 귀신에 씌인 집을 상속받고 미쳐가는 남자를 연기하는 상황조차 브로디는 경험으로부터 끌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브로디는 고생의 가치에 대해 조금씩 현명해져 가고 있다. 이 변화를 맞이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는 10년 전에 촬영한 스릴러물 <렉드>에서 자동차 사고 후 기억상실에 시달리는 캐릭터를 연기한 경험을 꺼내 보인다. 브로디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다양한 고통의 단계를 보여준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 펄쩍펄쩍 뛰는 것만 두어 시간 보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촬영은 잔인했다. 캐릭터는 영화 내내 다리가 부러진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은 브로디가 현장에서의 거의 모든 시간을 포복 자세로 숲속을 기어 다니는 데 소비했다는 뜻이다. 나중엔 손바닥에 가시가 가득 박혔기 때문에 등으로도 기어야 했다.
어느 날은 강가에서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웅덩이 안에는 익사하고 있는 지렁이가 있었다. 이건 마치 브로디 어머니의 작품 사진 속 풍경 같았다. 그 작은 벌레는 익사하지 않으려 꿈틀대고 있었고 그 사투는 브로디의 감정을 지배했다. 그는 그 순간 이 촬영이 왜 고통스러운지 깨달았다. <렉드>는 인디 필름이었기 때문에 항상 자금과 시간이 부족했다. 감독은 부정했다. 브로디는 또 물었다. 감독은 다시 부정했다. “내가 먹을게.” 브로디가 먼저 제안했다. 감독은 어서 찍으라고 카메라 감독을 불렀다. 브로디는 벌레를 먹었다. “역겨웠어요. 탈이 난 것 같았죠.”

셔츠, 보디. 반다나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그가 벌레를 먹는 도전을 감행한 진짜 목적은 뭘까. 브로디는 생각한다. “도대체 뭘 위해서였을까요? 누가 알아보기라도 했을까요?” 이 영화는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볼 일이 없고 그 안에 작은 장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걸 꼭 해야 했던 건 아니라는 걸 그도 안다. 하지만 어쩐지 그는 해야 할 것 같다 생각했다.
브로디가 배운 건 그 감정이 스스로의 기대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해방감이랄까. 벌레를 먹는 게 영화를 더 훌륭하게 만들거나, 아무도 볼 수 없는 땅바닥 아래 돌벽의 줄눈을 새로 긋는 행위가 수년에 걸친 리노베이션의 실패를 만회한다고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다. 열심히 하는 게 늘 정답도 아니다. 고생이 당신을 더 나은 예술가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몫의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브로디에게 대체 왜 그 성을 그렇게 오래도록 붙들고 있었냐고 물었다. 보수 공사가 질질 끌리면서 공사비가 끝도 없이 늘어났어도, 그의 힘든 시기를 되새기게 만들어줄 이 값비싼 기억을 그냥 깨끗이 접어버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안 해봤겠습니까? 그냥 팔아버릴 수도 있었겠죠.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이내 세상에서 가장 명백한 사실이라도 되는 듯 브로디는 이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전 그렇게는 못 합니다. 그냥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