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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 호텔은 건축가들에게만 소중한 존재일까

2021.12.23김은희

쌓아 올려야 하는 기록은 건축물의 높이뿐인가, 그를 완성하기까지 들인 시선인가. 지금부터라도 그 사유와 집념과 결과가 보호받고 기록되길 염원하는 한국 근현대 건축을 그러모았다.

1979년 제작한 힐튼 서울의 첫 번째 버전 모형, 서울건축 제공.

기록, 건축의 영혼
학생 시절 건축은 인간의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영생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축은 한 번 지으면 적어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삶보다는 오랜 시간을 버틸 것이며, 그 자체로 시대의 기록이 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려면 건축 자체도 물리적으로 오래 가야 하지만 그 가치와 의미를 뒷받침하는 다른 기록의 존재도 중요할 것이었다. 문자 기록은 물론 도면이나 모형, 사진 등의 시각 자료 등이 바로 그 것이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 건축의 경우 이러한 전반적 기록의 문화가 유난히 약했고 이래서는 유의미한 서사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세상이 기록해줄 것을 기다리지 말고 건축가 스스로가 자신의 기록자, 즉 아키비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 1983년, View from Northeast, 서울건축 제공.

그러나 사회에 나가 직접 겪은 현실은 사뭇 달랐다.말로는 건축이 1백 년,1천 년 가야 한다고 다들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 이를 위한 투자와 노력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현실 세계 속의 건축은 시대의 기록과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 정조 시대 이덕무는 <성시전 도시>에서 “팔 만여 민가는 오부가 통할하고”라 노래했지만, 그 수많은 집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서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택이라고 일컬어지는 윤보선 고가의 역사가 불과 1백50년 남짓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공동 주택의 재건축 가능 연한은 30년으로 줄어들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건축의 수명을 한 세대 이하로 정한 것이다. 바깥 세상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2007년 한국 현대 건축전 <메가시티 네트워크>를 기획했던 프랑크푸르트 독일 건축박물관장은 전시 개막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오래 가는 건축을 하지 않는다. In Korea, They Don’t Build to Last.”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의 어느 날, 한 주를 마치고 이제 몸과 마음을 모두 내려놓아야 할 시간인 금요일 밤 8시에 열명 남짓한 사람이 온라인 회의실에 모였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단 하나, 다름 아닌 남산의 호텔 밀레니엄 힐튼 서울이었다. 2021년 상반기에 매각설이 나왔다가 없던 일이 되었으나, 하반기 들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매각 후 재건축 소식이 들려오던 상황이었다. 이유인 즉, 힐튼 호텔 부지의 법적 용적률에 상당한 여유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서울의 평균 밀도가 너무 낮아 (놀랍지만 사실이다) 어느 정도 용적률을 채우는 것 자체는 공감 가는 측면이 있다. 이미 2016년에도 증축 계획이 있었으나 그때는 기존 건물은 두고 2개동을 추가로 증축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번 계획은 기존 힐튼 호텔을 아예 철거하고 더 높은 용적률로 신축한다는 것이었다.

밀레니엄 힐튼 서울, 1983년, View from Northeast, 서울건축 제공.

좀 넓은 시각에서 이 상황을 들여다보자.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건축은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쳐야만 세계 건축을 접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의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한국의 젊은 건축학도들이 취업 혹은 유학을 통해 서구 건축의 정수를 직접 배우고 익히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김중업이 1952년부터 1955년까지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근무한 것이 그 최초의 사례다. 힐튼 호텔의 설계자인 김종성은 또 다른 근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가르치고 있던 미국의 일리노이 공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제자로서, 이후에는 사무실의 구성원으로서, 나아가 미스 사후 학장직을 일시적으로 승계하는 존재로 성장해나갔다.
귀국 후 김종성은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미스의 건축적 교훈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시그램 빌딩(1958년)에서 정점에 달했던 미스의 사무실 건축 의 계보를 재해석해나갔다. 한편 김종성은 일련의 호텔 프로젝트도 진행했는데, 호텔은 미스가 이렇다 할 건축적 선례를 남기지 않은 유형이었다. 김종성은 미스의 전반적인 건축 철학을 유지하면서도 호텔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고려한 자신만의 길을 갔고, 힐튼 호텔은 바로 그 독보적 결과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힐튼 호텔은 한국인이 세계 건축을 직접 학습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최고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기념비적 사례다. 그 자체로 한국인에 의한 근현대 건축 학습의 기록이며, 저돌적으로 의욕이 넘쳤던 한 시대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기록의 총체가 이제 사라지려 하는 것이다.

호텔이 완공된 1983년 로비 풍경, 서울건축 제공.

모임이 마무리될 무렵, 이제부터 새로운 기록을 모으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힐튼 호텔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다. 무엇보다 건축가 김종성 자신이 스스로에게 매우 충실한 아키비스트다. 하지만 이제 그 기록의 주체와 범위, 성격을 확대할 상황이었다. 앞으로 질문이 이어질 것이다. 건축계를 넘어 한국 사회는 힐튼 호텔을 어떻게 기억해왔을까. 이 장소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이 건물은 어떤 존재일까. 소유자의 재산권 행사가 타협 불가의 절대 가치라면 이 시대는 앞으로 미래를 위해 어떤 건축을 남길 수 있을까. 시대의 기록으로서 정점을 찍은 건축물의 운명은 좀 다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괴로운 질문은 오직 건축계에만 던져야 하는 것일까. 힐튼 호텔은 건축가들에게만 소중한 존재일까.

호텔이 완공된 1983년 메인 로비 풍경, 사진 Im Chung Eui, 서울건축 제공.

빅토르 위고는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라고 했다. 당시의 새로운 발명품인 인쇄물, 즉 책이 건축으로 상징되던 기존의 질서에 위협이 될 것임을 이야기한 구절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이라면 ‘이것’은 인터넷이고 ‘저것’은 책이다. 종래의 인쇄 기록은 이미 0과 1의 디지털 세계로 흡수되고 있다. 스스로의 기록자인 건축가의 입장으로 축소해서 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의 핵심에 자신의 작업 결과인 도면이 있다. 도면이 있으면 건축의 육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영혼은 남는다. 그 영혼을 인쇄물을 넘어 인터넷에 담는 것이 바로 현대의 영생이다. 이렇게 영혼이 남아 있으면, 심지어 어떤 시점이 되면 다시 육신을 되살릴수도 있다. 수원 화성은 <화성성역의궤>가 있어 복원이 가능했고, 고트프리트 젬퍼의 드레스덴 오페라하우스는 도면이 남아있던 덕분에 화재와 전쟁을 이겨내고 현재 세 번째 건물이 서 있다. 이것이 저것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황두진(건축가·황두진건축사사무소)

    피처 에디터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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