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구를 구할 수 없다 | 지큐 코리아 (GQ Korea)

우리는 지구를 구할 수 없다

2022-01-21T16:14:29+00:00 |living|

“날 구한다고, 니가?” 우리가 지구를 구한다는 말은 그에게 아주 우습게 들릴 것이다. 공룡이 멸종할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지구다.

증조할아버지는 부유했다. 자기 발로 걷는 일 없이 가까운 거리도 마차를 탔다. 가장 부드럽고 맛 좋은 부위의 고기 반찬을 매끼 배불리 먹었다. 곳간에 쌀 가마니가 더는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사람을 시켜 술을 빚고 떡을 쪘다. 그는 매일 빳빳한 새 옷을 입고 큰 집에서 죽을 때까지 흥청망청 잘살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빚을 남겼다. 얼마나 큰돈인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나도 버는 족족 꼬박 빚을 갚아야 했다. 내게 아이가 생기면 아이도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나 잘살았던 증조할아버지는 왜 우리에게 감당 못할 빚을 남겼을까?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이야기 속 풍족한 삶을 누리던 자는 당신이다. 그리고 그 빚을 갚느라 대를 이어 고생하는 건 당신의 후손이고. 당신은 오늘도 무신경하게 많은 탄소를 만들었다. 탄소 배출에는 별다른 대가가 따르지 않으니 뭐 어떻겠냐 싶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당신이 그저 기분 전환 겸 차를 끌고 다녀온 드라이브, 월급 날이라서 새로 산 옷, ‘쓸데없는 선물 수여식’ 끝에 버려진 공주 머리띠, 버터를 넉넉히 두르고 구워 먹은 소고기는 뭉게뭉게 탄소를 배출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해마다 폭염, 폭설, 태풍이 더 강해진다. 지독해진 자연 재해는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올 것이고,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값을 지불하는 자는 당신의 후손일 수도 있지만, 당장 당신의 보험료가 오르는 데서 시작할 수도 있다.
당신은 부자가 아니고, 쌀이 남아 술을 빚던 저 할아버지처럼 넘치게 살지도 못한다며 변명할지 모르겠다. 1987년부터 매년 국제 생태발자국 네트워크(Global Footprint Network)에서 발표하는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이란 게 있다. 매년 인류의 자원 수요량이 지구가 만들 수 있는 자원의 양을 넘어서는 날을 계산해 알려준다. 35년 전에는 세계인이 12월 19일에 지구 하나 몫을 다 썼다. 2021년에는 다섯 달이나 앞당겨졌다. 초과의 날은 7월 29일이었다. 2022년 기준으로 토고와 소말리아, 스리랑카, 팔레스타인 같은 나라는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지구 자원을 다 쓰지 못하지만, 미국과 아랍 에미리트는 3월 13일이면 이미 그해치 자원을 해치운다. 우리나라는 4월 2일이다. 365일 사용할 물자를 91일 만에 써버리고 내년과 후년, 내후년의 것을 대출받아 쓰는 셈이다. 지구인 모두가 한국의 당신처럼 살려면 매년 4개의 지구가 필요하다. 당신이 60세까지만 살아도 240개의 지구를 쓰고 가는 거다. 혹시 100세 시대 트렌드에 맞춘다면 400개의 지구가 필요해질 거고.

되는 대로 쓰고 대출해서 또 쓰면서도 우리는 자연에게 너그럽고 인자한 ‘마더 네이처’의 모습을 기대한다. 지구가 지금처럼 인간이 살기 좋은 온화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행성이길 바라는 것이다. 2만 년 전, 빙하기의 마지막 추위가 사그라들고, 간빙기가 시작되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정 온도가 유지되었고, 해수면은 잔잔했다. 인류는 농사를 짓고, 도시를 만들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어느 날 지하 깊은 곳 화석 연료에 손을 뻗었다. 고밀도로 농축된 화석 에너지로 빠르게 문명을 발전시켰다. 생산성을 높여 더 많은 농작물을 재배하고, 더 큰 도시를 만들었다. 석유와 석탄은 인간을 신처럼 살게 했다.
화석 연료는 운동선수의 스테로이드,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같았다. 건드리는 것으로 곧 이 세계의 질서를 깼다. 그 결과로 인간은 움직일 때마다 온실기체를 만들게 되었다. 온실기체로 가득찬 지구는 이전에 없던 속도로 빠르게 온도를 높였다. 19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 연간 5억 톤에 못 미치던 온실기체 배출량은 이제 60배가 넘는 300억 톤에 달한다. 지구 온도는 1.1도가 올랐다.
2016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 이하로 유지하자는 파리협정이 196개국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기적처럼 목표가 이뤄진다 해도 2도가 오른 지구의 해수면은 0.5미터 상승한다. 뉴욕을 비롯한 수십 개의 대도시가 물에 잠겨 1억 4,300만 명이 난민이 되고, 인간은 호흡기 질병과 물 부족에 시달릴 것이다. 동물 종의 절반이 절멸하고, 식물 종은 60퍼센트가 사라질 것이다. 이에 2020년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는 후속조치를 시행했다. 2020년부터 10년간 지구 온도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한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한 것이다.
인간이 자원을 너무 많이 쓰고 화석을 캐다 쓰는 바람에 기후가 변하고 위기가 왔음을 말하는 자료는 이 밖에도 엄청나게 많다. 다만 통계는 현란하고, 미래 예측은 우울하고, 용어는 기가 꺾일 만큼 복잡하다. 기후 위기는 애를 써도 이해하기 어렵다. 알아도 믿기 어렵고, 믿는다 해도 맞설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정책 결정권자도 아니고 석유회사 경영자도 아니다. 대체육 개발이나 태양광 패널 설치도 할 줄 모른다. 그저 매일 성실히 출근이나 하면 다행인 그 정도의 사람이다. 우주 먼지에 불과한 나 같은 사람도 뭘 할 수 있을까? 뭘 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굳이 나까지 기후 위기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기후 위기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고 나아지는 건 별로 없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 온갖 데이터의 위협은 일단 공포스럽다. 인류가 앞둔 죽음을 알게 되면 무력해질 수도 있지만, 사실 확인을 원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진짜 죽어?’ 사실을 아는 건 변화를 위한 좋은 시작이다. 여기 시작으로 알아두기 좋은 사실이 하나 있다. 기후 위기는 신의 저주 같은 게 아니다. 우주 먼지인 인간이 영차영차 만든 일이다. 해결 역시 바깥의 커다란 힘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또 하면 된다.
인간은 오만하고 이기적인 종족이지만, 그럼에도 제법 재주를 부릴 줄 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만들어 쓰고, 해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한다. 우리는 석탄을 한 번에 많이 운반하려고 증기기관차를 개발했다. 고작 당구공으로 쓰려고 코끼리 상아를 자르는 게 미안해 플라스틱을 발명하기도 했다. 라이트 형제가 글라이더로 첫 비행을 한 날 태어난 아기가 환갑을 지날 무렵 닐 암스트롱은 우주선을 타고 달에 내렸다. 발전 속도도 이만하면 괜찮다. 아니, 근데 잠깐만. 나 하나 구한다고 되는 일이 맞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그럼 지구는 누가 구해?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책 <우리가 날씨다>에서 이를 야구장의 파도타기에 비유했다. 저자는 종종 관중석에서 야구 경기를 보지만, 먼저 파도타기를 시작한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막상 파도가 힘차게 도착하면 그를 거부한 적도 없다. 먼저 하지 않더라도 흐름은 탈 수 있는 것이다. 분위기에 맞춰 일어났다 앉는 것만으로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감정이 파도타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파도타기가 감정을 만들어내는 때가 훨씬 더 많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플루언서인 인간은 모두 영향을 끼치며 산다. 마트는 팔리는 품목을 기록하고, 알고리즘은 검색된 내용을 기억하고, 인간은 옆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그 메뉴를 주문한다. 원치 않아도 나의 움직임은 여기저기 닿는다. 움직임은 다른 사람의 의지를 만들 것이고, 그게 모여 유대감을 키울 것이다.

당장 지구를 살릴 수 없어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이 행성을 구할 수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다. 지구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파도타기에 합류할 줄만 알면 된다. 이 글이 당신에게 가 닿았다면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자. 무자비한 히든 카드 게임을 멈출 마지막 기회다. 글 / 조서형(매거진<1.5˚C>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