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지큐 코리아 (GQ Korea)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22-04-22T15:05:00+00:00 |culture|

불현듯, 조금씩, 천천히, 아버지가 된 다섯 남자의 이야기.

필요한 아빠 심규성(이현 아빠, 브랜드 기획자)
나는 준비되지 않은 아빠였다. 결혼 전에 아기를 가진 나와 아내는 부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덜컥 부모가 되었고, 의사 선생님이 알려준 데드라인에 쫓기며 출산과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심지어 야근과 철야가 종종 이어져 가뜩이나 부족한 준비 기간동안 대부분 회사에 있었고, 아빠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클라이언트 공부를 할 때가 더 많았다. 당시 예비 부모로서의 몰입도를 당근마켓의 매너 온도처럼 평가한다면 아내는 99.9도, 나는 29.9도였을 것이다.

계획과 준비를 미루고 눈앞에 보여야만 하는 내 ‘ISFP’적 성향은 나를 준비되지 않은 아빠를 넘어 아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남편으로 만들기도 했다. 아이가 집으로 온 첫날, 첫 기저귀를 갈았던 순간이 대표적이다. 전날까지 체험판으로 받아놓은 기저귀가 많은 걸 보고 안심하며 잤던 나는 다음 날 막상 아이에게 입히려고 포장을 뜯은 순간 그 모든 기저귀가 내 아이에게 너무나 큰 2~3단계 사이즈임을 알게 되었다. 만약 지금 같은 일을 겪는다면 초연하게 2단계를 먼저 입혔겠지만 당시엔 매뉴얼대로 해야만 불안하지 않은 초보 부모였기에 그 상황을 그대로 두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아이와의 첫 집들이는 식은땀 나는 스릴러로 돌변했고, 인근 편의점과 동네 마트를 뒤지듯이 돌아다니다가 왕복 40분 거리에 있는 대형 마트에 가서야 문제를 해결했다.

그로부터 19개월이 지난 현재, 당시 육아에 무관심했던 아빠는 용감하게 우리나라 남성 100명 중 2명만 쓴다는 육아 휴직을 내고 주부 아빠로서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는 마치 아빠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겨주듯이 아빠 손에서도 무탈하게 잘 자라고 있다. 때론 육아 휴직 내내 재미없이 구는 아빠에게 되레 재미를 선사해주면서 내가 좋은 아빠인 것처럼 느끼게 해줄 때도 많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아직 아버지란 세계의 신입사원인 내가 그 답을 내린다면 그건 오답일 확률이 높다. 다만 2년 차가 되어서야 알겠는 건 그때 더 오랜 시간, 더 많은 준비를 했더라도 난 준비된 아버지가 될 수 없었을 거란 사실이다. 적어도 영유아 육아의 현실에서 ‘준비’와 ‘계획’만큼 무용한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전날부터 애써 준비한 이유식은 아이의 이유 없는 단식 투쟁으로 주인 없는 음식이 될 때가 많고, 아이를 위한다고 계획한 낮잠 시간은 절대 잠들지 않는 아이로 인해 오히려 부모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시간이 된다. 야심 차게 짠 나들이 계획 역시 카시트와 유모차에서 숙면을 취하는 바람에 아무런 성과 없이 집으로 올 때가 부지기수이며, 친환경에 디자인도 이뻐서 산 해외 직구 장난감은 뽀로로와 핑크퐁에 밀려 당근마켓으로 직행한 적이 여러번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양육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시련 중 하나인 웃음과 울음은 예견이나 계획이 불가능하다.

지나고 보니 알게 된 또 한 가지는 준비된 지식이나 완벽한 계획보다 중요한 건 부모의 일상적인 관심과 사랑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때 내가 육아 공부도 많이 하고 필요한 모든 물건을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지금처럼 육아 휴직을 쓰지 않은 채 매일 야근하는 아버지의 삶을 살고 있었다면 과연 이 아이가 지금의 나를 좋은 아버지로 바라볼까? 설령 그렇게 평가해준다고 해도 나 스스로 떳떳할 자신이 없다. 반대로 뒤늦게나마 아이 곁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며 그 계절에만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추억들을 쌓아나갈 수 있다면, 아이로부터 ‘준비된 아빠’는 아닐지라도 ‘필요한 아빠’ 소리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육아에 뒤늦게 몰입 중인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얼마 전 아이가 낮잠 잘 때 스마트폰을 하다가 애플 TV 플러스에 무료 체험으로 가입하고 자석처럼 이끌려 본 콘텐츠가 있다. 제목은 <아빠 Dads>. 육아에 진심인 현시대 아빠들의 이야기를 미국 유명 아빠 배우들의 인터뷰와 함께 다큐멘터리로 엮은 작품이다. 이 다큐를 보다 보니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나누고 둘을 다르게 정의하는 건, 가정이 아닌 사회와 직장의 편의상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수적인 사회 관념을 뚫고 전업 육아를 하는 일본인 아빠의 이야기에서도, 아이 셋의 육아를 전담하는 주부 아빠의 이야기에서도, 아빠만 둘인 동성 커플의 이야기에서도 엄마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6개월간 엄마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육아에 전념하다 보니 이 아이에게 과연 내가 아빠인지 엄마인지가 중요할까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아이는 그게 아빠든 엄마든 할머니든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주는 한 사람이면 충분한 거 아닐까. 관심과 사랑에는 성별이나 나이가 따로 없으니까. <아빠 Dads>의 첫 번째 에피소드 끝무렵에 나오는 아이 셋 아빠의 인터뷰가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 애들에겐 대통령이 누군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제 관심이 중요하죠.”
“전 아이들 세상의 중심이에요. 전 아빠예요.”

믿기지 않지만 손현(송이 아빠, 콘텐츠 매니저)
“이제 방향지시등을 켜세요. 곧 추월할 거예요.” 교관이 헬멧 속 블루투스 헤드셋을 통해 말했다. 왼쪽 방향지시등을 켰다. “스로틀은 더 당기세요. 가속하면서 추월해야 안전해요. 전방 주시하고요.” 속도를 높이는 동안 몸이 뒤로 밀리지 않도록 양 무릎으로 바이크 몸체를 더 조였다. 몸을 좌우로 살짝 기울였을 뿐인데 바이크는 부드럽게 차선을 바꿔 앞차를 추월하고 원래 차선으로 돌아왔다. 한강을 따라 양평으로 가는 길. 교관과 나는 각각 800시시급 대형 바이크를 타고 팔당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총 4개의 터널이 붙어 있고 종종 교통 체증을 빚는 구간이다. 당시 나는 서른이 넘어 2종 소형 면허를 땄고 장거리 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모터사이클 운전 자체가 처음이라 교관을 따로 소개받아 몇 차례 연수도 받았다. 도로에서 살아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받은 교육 덕분인지 다행히 바이크를 타는 동안 큰 사고는 없었다. 러시아와 유럽을 여행하며 앞뒤 타이어를 두 번 교체했고 계기판에 적힌 주행 거리는 2만 6천 킬로미터를 넘겼다. 모터사이클로 대륙을 횡단했다고 하여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는다. 인생은 16부작 미니시리즈가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 길다. 오히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속 만들어야 하는 시즌제 드라마에 가깝다. 서울로 돌아온 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가. 그 드라마를 먼 훗날 죽기 전에 다시 보고 싶은가. 어쩌면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삶이 진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구직 활동을 하며 새로운 직업을 찾았고 가정을 꾸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행하는 동안 내 원점이 ‘가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성숙한 혼자로 우뚝 설 수 있다면 타인과 함께 살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여행 전 알게 된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바이크도 중고로 처분했다. 벌써 4년 전 일이다.

지난 3월 말에는 아내가 제주로 4박 5일 휴가를 떠났다. 출산 휴가부터 육아 휴직까지 1년 3개월을 육아에만 매달렸으니 마음 같아선 어딘가에서 한 달쯤 살다 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다 내가 죽을 수도 있어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태어난 지 12개월이 되어가는 송이(아이 별명)와 둘만의 나들이에 도전했다. 이 나들이는 밖을 나서기로 마음먹는 게 중요하다. 나가기까지 에너지 절반을 소진하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게 관건. 분유와 이유식을 번갈아 먹는 때라 챙길 준비물도 많았다. 송이가 잠깐이라도 자거나 혼자 놀고 있으면 외출 준비가 순조롭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혼돈 속에 부랴부랴 옷을 입히고 나가기 일쑤다.

내비게이션 목적지에 ‘양평 세미원’을 입력했다. 지인이 추천한 곳이다. 목적지까지 대략 1시간이 걸린다고 떴다. 전날부터 내리던 비가 막 그친 터라 날은 여전히 흐렸지만 도로는 한적했다. 세미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연못엔 꽃받침만 둥둥 떠 있었다. 아기 띠에 송이를 앉혀 메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으로 흐르는 풍경을 바라봤다. 멀리까지 이어지는 산과 강을 보니 송이와 함께할 가까운 미래가 그려졌다. 물론 그 그림은 바람과 오리들 발길에 물결이 퍼지듯 송이가 그리겠지.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의 시간도 유유히 흐르길 바랐다.

양수리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와 빵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차가 밀릴까 봐 두려워 바로 귀가 준비를 했다. 이동하는 동안 송이는 카시트에서 숙면을 취했다. 서울 방향 6번 국도에는 모터사이클 여행자도 제법 있었다. 팔당 1터널부터 4터널을 지나는 동안, 우리 차 바로 앞을 어느 바이크가 부드럽게 추월하기도 했다. 터널을 지나고 바이커끼리 손 인사하는 장면도 오랜만에 봤다.(모터사이클을 타는 사람끼리는 길에서 마주칠 때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관습이 있다.) 그 장면을 보곤 나도 모르게 차 안에서 외쳤다. “나도 여기 있어!” 잠시 정적. 아이가 놀랐으려나. 뒷좌석을 힐끔 봤다. 송이가 웃고 있었다. 나도 미소로 화답하며 덧붙였다. “이제 송이랑 같이 있어.”

자유지상주의자에게 결혼과 육아는 모터사이클 여행보다 더 모험적이다. 아이 컨디션에 따라 그 길은 때때로 오프로드로 바뀌기도 한다. 아직까진 모든 여정이 견딜 만하다. 혼자 달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4월부터는 아내와 교대해 1년 육아 휴직을 냈다. 요즘은 매일 송이의 세 끼 메뉴를 고민하고 어디로 나갈지 탐색한다. 가끔 송이는 내 몸통 위에 올라 놀기를 즐긴다. 왼쪽, 오른쪽으로 아이 몸을 기울여주며 내가 바이크나 비행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여전히 아빠라는 단어가, 육아 휴직 중이라는 사실이 쉬이 믿기진 않지만 그 길을 든든한 동행과 씩씩하게 잘 가고 있다고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영화 <노팅 힐> 속 대사처럼 말이다.

“믿기진 않지만 좋다 Surreal But Nice.”

좋은 아빠란 어쩌면 피봇팅을 잘하는 사람일지도 몰라 강혁진(‘월간서른’ 대표, 작가)
마흔이 된 작년, 올림픽이 한창이던 여름의 중간에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이제 8개월이 되었고 나 역시 8개월 차 아빠가 되었다. 아내는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직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 늦게 들어오는 아내 대신 아침저녁 육아를 맡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본다는 건 매일 두 가지를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는 체력적인 어려움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시간의 부족함이다.

아이는 매우 잘 세팅된 알람시계 같아서 매일 아침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다.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여지없이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에 눈을 뜬다. 전날 밤 아이와 비슷한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면 아이와 함께 일어나는 게 크게 힘들지는 않다. 하지만 때때로(마치 이 칼럼을 쓰는 지금처럼) 밤 늦게 할 일을 마치고 새벽에 잠자리에 들 때면 아이의 기상 시간에 함께 일어나는 일이 꽤나 힘겹다.

시간의 부족함은 체력적으로 힘든 것과는 조금 다른 어려움을 가져온다. 아침 시간이야 그렇다 쳐도 매일 저녁 아이를 봐야 하는 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뼛속까지 ‘E’형이다. 게다가 깊고 좁은 취향이 아닌 넓고 얕은 취향을 가진 터라 온갖 것에 관심을 갖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저녁마다 많은 일을 했다. 일과 후 가까운 사람들과의 저녁 약속은 기본이고 일에 도움이 되거나 관심사와 관련된 강의를 듣기도 했다. 주말에는 저녁 약속만 2~3개씩 잡곤 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이후 이 모든 건 그림의 떡이 되었다. 8개월 동안 저녁 약속을 가진 건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을까? 한 달에 한두 번은 꼬박꼬박 찾았던 극장은 아이가 태어나고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만약 내가 20대나 30대였다면 육아 때문에 모임이나 강의에 가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꽤 답답했을 것이다. 어두운 스크린 앞에 앉아 팝콘을 먹으며 귓가를 때려대는 사운드를 느낄 수 있는 극장이 사무치게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모든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간혹 시끌벅적한 술자리가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어쩌면 이건 40대에 아빠가 된 나에게 주어진 행운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20~30대를 지나 40대가 된 지금은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내면의 나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 더 많이, 더 잘 갖기 위한 방법보다 잘 내려놓고 잘 거절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신 영화 정도야 넷플릭스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어찌 보면 육아와 관계없는 가치관의 변화인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육아를 더 잘할 수 있는 가치관으로의 변화이기도 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이미 아빠가 된 지 몇 년 된 지인이 건네준 육아 팁이 기억난다. “뭘 하고 있건 간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바로 엉덩이를 떼면 돼.” 이게 말이 쉽지, 현실에서는 이 팁을 실천하기가 꽤나 어렵다. 친구와 카톡을 나누다가,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다가, 맛있는 치킨이 막 도착한 찰나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아 누가 대신 좀 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인이 전해준 팁은 육아에 필요한 ‘피봇팅’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피봇팅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아마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사춘기 시절, 그 어느 친구들 못지않게 농구에 열심이었다. 농구를 하며 처음 배운 규칙은 드리블을 멈추고 공을 잡아 들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쪽 발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발을 360도 회전해가며 마치 컴퍼스가 움직이듯이 몸을 움직이며 패스를 하거나 공격할 곳을 찾으면 된다. 이렇게 움직이는 게 바로 피봇팅이다.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내 삶의 주인공은 나였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왔다. 나를 중심에 두고 마치 피봇팅을 하듯이 다양한 관계를 맺고 다양한 모임을 가져왔다. 육아를 한다고 해서 내 관심사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대신 무엇을 하건 간에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 준비를 하고, 아이가 나를 찾으면 언제든 아이를 향해 내 몸을 돌릴 수 있으면 된다. 피봇팅을 하는 대상에 ‘아이와의 시간’이 추가된 것이다.

좋은 아빠가 된다는 건 삶의 피봇팅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피봇팅을 잘하는 사람은, 아빠로서의 삶과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의 삶 역시 굳건히 다져가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굳건해야 아이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중심축을 지지하는 발이 단단해야 ‘아이’를 향해 움직이는 다른 발도 재빠르게 움직이며 피봇팅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내 삶에 더욱 충실하려 한다. 언제든 나의 아이에게 향할 피봇팅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아빠의 아빠, 아들의 아들 박정우(아들 셋 아빠, 여행업)
아내가 밥그릇에 밥을 반 정도 남기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더 먹지 않느냐는 질문에 “배가 불러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와 아내의 고개가 동시에 갸우뚱해졌다. 나로서는 교과서의 “쌀 한 톨에 담긴 농부의 정성”까지 갈 것도 없이 내 앞에 놓인 밥그릇은 깨끗하게 비우도록 배우고 자랐기 때문이다. 결혼 전 부모님과 같이 식사를 할 때 밥그릇, 국그릇 그리고 반찬 그릇들까지 모두 비우면 오늘 ‘싹쓸이’ 했다면서 뿌듯하게 빈 그릇들을 싱크대에 넣곤 했다. 부모님에게 배운 대로라면, 아내에게 왜 ‘더’ 먹지 않느냐고 물어볼 것이 아니라 왜 ‘다’ 먹지 않느냐고 물어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이런 질문을 하는 내가 영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이후로도 이런 작은 ‘갸우뚱’이 여러 번 있었다. 우리는 적지 않은 시간 연애하고 결혼했는데도 수건 개는 방법이 다르다. 나는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접은 다음에 돌돌 말아놓고, 아내는 가로로 두 번 세로로 한 번 접는다. 옷장에 옷을 거는 방향도, 과일 껍질을 벗기는 방법도 다르다. 아내는 눈에 보이는 곳이 지저분하면 곧장 청소해야 하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굳이 열어젖혀 정리한다. 아내는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금방 끝을 내서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나는 한번 일을 벌리면 며칠이고 벌려둔 채로 둔다. 아내에게 이런 차이에 대해 몇 차례 질문했지만 잔소리로 들릴까 봐 이제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 뿐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 가족 식사 자리에서 우연치 않게 처갓집 식구들의 밥그릇을 봤다. 아무도 밥그릇을 ‘싹쓸이’하지 않았다. 그제야 밥을 남긴 아내가 이해되었다. 나는 밥을 남기지 말라고 배웠고 아내는 밥을 억지로 먹지 말라고 배운 것이다. 각자의 부모로부터. 어쩌면 장인어른은 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는 사위를 보며 차마 왜 남기지 않느냐는 질문은 하지 못하고 어깨만 으쓱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아내의 서로 다른 면을 종종 마주하다가 어느 순간 아내에게 나의 어머니를 기대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나의 아버지를 대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느 인터넷 게시판의 ‘남편이 마마보이인가 봐요’라는 제목의 글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책 비슷한 걸 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부부 샘플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래 지켜본 부부가 바로 나의 부모였다.

어느 날 아내가 아이들 앞에서 말 조심해달라는 부탁을 정중하게 했다. 무슨 말인가 해서 사정을 들어보니 아이들끼리 말다툼을 하다가 한 녀석 입에서 (순화하자면) “양반이 아닌 사람의 자제분”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아내는 도대체 그런 상스러운 말을 어디서 배웠냐고 아이들에게 물었고, 아이들은 아빠한테 들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무엇이 문제인지, 아이들 앞에서 어떤 말을 조심해달라는 의미인지, 아내의 기분이 언짢은 이유가 무엇인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내가 도대체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냐는 질문을 아이들이 아닌 나에게 했다면, 나 역시도 나의 부모에게 들었다고 대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분노에 가득 차서 내뱉는 말이 아니라 ‘이 녀석’, ‘내 새끼’ 정도의 느낌이랄까. 아내에게 앞으로 아이들 앞에서 말 조심하겠노라 약속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댁에 갔다. 나의 부모는 “으이구, 우리 ‘양반이 아닌 사람의 자제분’들 왔구나”라는 말로 손주들을 반겼다.

올해 들어 주말엔 아이들만 데리고 종종 여행을 간다. 주중에 고생한 아내가 주말에라도 온전히 쉬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아이들 뛰어놀게 하고 싶기도 하고. 여기저기 장소 가리지 않고 일단 떠나고 보는 편인데 몇몇 군데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낯이 익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너네 어릴 때 누구네 가족이랑 놀러 갔잖아”라거나 “방학 때 체험학습 한다고 갔었지”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럴 때면 내가 아이들을 자동차 뒷좌석에 쪼르르 태워서 가는 이 길이 이미 나의 부모가 나를 데리고 지나온 아늑한 길로 느껴진다.

부부라는 개념을 부모에게서 배운 것처럼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역시 전적으로 부모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입 밖으로 상스러운 말을 해본 적 없다는 아내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부와 부모라는 개념은 선택적으로 유전되어 아이들을 보면 ‘네 아빠는 내 아빠’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보여준 역할과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남편과 아버지라는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우리 ‘쌍놈 새끼’들, 아니 우리 아이들은 커서 수건을 각각 어떻게 갤까.


우리는 보물들과 이별하며 커간다 배정민(<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 저자)
열 살 무렵 책상 맨 아래 고이 간직하던 과일 상자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느 명절날 제 소임을 다하고 사라질 운명이었던 그 노란색 상자는 아버지의 신들린 테이핑을 거쳐 몇 해는 두고 써도 될 법한, 튼튼한 나만의 수납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그 상자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만의 보물창고였다. 동그란 딱지와 구슬, 당시 최고 인기였던 골라이온 로봇 장난감과 레고 기사단 피규어, 그리고 자잘한 프라모델 장난감들이 들어 있었다. 하나하나 정성스레 모았던 보물들이었던지라 꺼내 놀다 집어넣을 때가 되면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차곡차곡 정돈해 넣곤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영화 <토이 스토리 3>를 보러 갔을 때, 그 과일 상자가 퍼뜩 떠올랐다. 대학생이 된 앤디가 상자 속에 간직해 온 장난감들을 보니에게 물려주는 장면을 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내 상자 속 보물들이 생각났다. 행여나 고장 날까 애지중지하며 갖고 놀던 감정이 여전히 생생한데, 정작 그 상자와 어떻게 이별을 고했는지는 깨끗하게 백지로 남아 있었다. 영화 속 앤디처럼 쿨한 모습으로 다른 아이에게 전해주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렇게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지?’ 영화관을 나서며 나 자신을 잠시나마 책망했던 기억이 오래 뇌리에 남았다.

정신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어느덧 아이들 방은 갓난아이 시절부터 모아온 장난감으로 점차 뒤덮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주말, 더 이상 내버려뒀다가는 발 디딜 공간조차 없겠다 싶어 장난감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하나씩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극렬히 저항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날렸다.

“ 더 이상 갖고 놀지 않는 장난감들은 다 나눠주거나 버려야 해.”
“응? 그래.”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그동안 애면글면 모아뒀던 장난감들을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준다는데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순순히 응하다니, 내가 잘못 들었나? 처음엔 못 사서 그렇게 안달했으면서? 잘 때도 늘 꼭 껴안고 자던 인형들도 있는데? 몇 번을 재차 물어도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처분해도 좋다고 승낙한 장난감들을 쓸어 담으니 큰 자루로 몇 포대가 나왔다. 10여 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장난감들을 그렇게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줄 것, 재활용 센터로 보낼 것, 분리수거함에 넣어 버릴 것으로 따로따로 정리했다. 여전히 티는 별로 안 나지만 그래도 느낌상 조금은 널찍해진 것 같은 아이들 방을 쓸고 닦다 보니, 그제야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빠인 나는 매일같이 부대끼느라 잘 몰랐지만, 이 녀석들, 어느새 한 뼘 자랐다. 예전에는 죽고 못살던 장난감 친구들과 이제는 제법 쿨하게 이별 인사를 나눠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인생의 다음 단계를 향해 조금씩,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다.

그제야 어릴 적 소중히 간직했던 그 과일 상자가 다시 떠올랐다. 한때 애정하던 장난감과의 이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커가는 과정에서 겪는 인생의 통과의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테니. 나는 오랫동안 묵혀왔던 내 보물들에 대한 마음속 미안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장난감들도 슬퍼하진 않을 것이다. 로보카 폴리는 함께 놀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들을 도와야 함을 가르쳐줬고, 슈퍼윙스 호기는 대한민국 말고도 이 세상엔 수많은 나라가 있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멋진 장난감 친구들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데 도움을 줬기에 아이들은 함께 노는 동안 한껏 즐겁고 행복했으며, 그 덕택에 한 발 더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장난감들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하고도 남았다. 비록 아이들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함께 빛내준 장난감들과의 이별을 또렷이 기억하진 못한다 해도, 장난감들도 더 이상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 너희들, 그래도 그동안 잘 놀아준 장난감 친구들에게 고마웠다고, 잘 가라고 인사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이별의 순간, 아니 인생의 통과의례를 먼저 겪은 아빠로서, 적어도 나중에 아이들이 이 순간을 조금은 더 생생하게 기억하길 바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이들은 짐짓 부끄러운 듯 쭈뼛쭈뼛 걸어 나와 제 장난감들에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멋지게 이별해놓고 설마 이번 어린이날에 새 장난감 또 사달라 하진 않겠지?’ 생활인 아빠로서의 소심한 바람이 가슴 속에서 올라오지만, 들킬까 지그시 눌러본다. 아이들보다 못난 아빠가 되진 말자며.
그간 아이들의 동반자로서 훌륭히 제 몫을 다해 준 장난감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상상력을 한껏 고양시켜줬던 그 시절 내 장난감들에게도 이제서나마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