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원대의 무한 가치.
<지휘의 발견> 존 마우체리 ㅣ 에포크
50여 년 동안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을 이끈 지휘자 존 마우체리가 자신의 지휘 생활과 더불어 번스타인, 스토코프스키, 토스카니니 등 지휘의 스승들을 돌아보는 책 <지휘의 발견>과 함께 <지휘자를 위한 1분>(2013)도 즐겨보면 좋겠다. <지휘자를 위한 1분>은 국제 지휘 콩쿠르인 이탈리아 안토니오페드로티에 참가한 136명의 예비 지휘자들의 오디션 안팎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콩쿠르의 미션은 단 1분 동안 처음 보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랜덤으로 주어진 클래식 곡에 맞춰 완벽하게 지휘해 내는 것. 지휘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실력과 음악의 완성도를 보고 있노라면 <지휘의 발견>의 존 마우체리가 적어둔 구절이 보다 깊숙이 와닿는다. “지휘란 결국 일종의 연금술이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일한 예술 형태다. 음악은 일련의 변신을 거쳐 시간을 통과하게끔 설계되어 있는 통제된 소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라면 소리를 내지 않고 오로지 동작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쩌면 타당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디 에센셜 한강> 한강 ㅣ 문학동네
살얼음 낀 한강을 의인화한다면 작가 한강이 아닐까. 한강의 문장을 읽을 때면 날이 바짝 선 송곳이 떠오르기도 한다. 달려들 기세가 없는데도 꼿꼿이 선 그 자태만으로 긴장을 일으키는 빛나는 송곳. 교보문고가 출판사와 공동 기획하여 작가의 핵심 작품을 큐레이팅해 한 권으로 엮는 ‘디 에센셜’ 에디션의 한강 작가 편에는 장편 <희랍어 시간>, 단편 <회복하는 인간>과 <파란 돌>,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새벽에 들은 노래’ 등 다섯 편, 산문 여덟 편이 한데 담겨 있다. 이는 작가의 지난 작품들이자 흘러온 시간이기도 할 텐데, 한강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러한 소회를 남겼다. “예전의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기보다 닮은 사람(들)이다. 교정지를 읽는 동안 그 사람(들)과 묵묵히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사주에 역마가 들어서인지 무던히도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왔는데, 오직 쓰기만을 떠나지 않았고 어쩌면 그게 내 유일한 집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책 말미 QR 코드를 통해서는 한강 작가가 직접 일부 낭독한 <희랍어 시간>도 감상할 수 있다. 한강이 흐른다.
<퀸즐랜드 자매로드> 황선우, 김하나 ㅣ 이야기나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저자 황선우와 김하나 작가가 이번에는 여자 둘이 여행하는 이야기를 펴냈다. 팬데믹 이전에 다녀온 2019년 호주 퀸즐랜드 여행기로, 길고 어두웠던 코로나19 팬데믹을 건너뛰고 자유로웠던 그 시절로 직행하는 기분이 들어 반갑다. 여행 루트를 짜주고 맛집을 추천하는 ‘여행서’가 아니라, 그곳의 햇살과 땅과 바람을 오감으로 만끽하고 공유하는 ‘견문록’이라 더욱 끌린다. 가령 어떤 찬란한 수사보다 더 퀸즐래드 여행을 꿈꾸게 만든 문장은 이런 것이다. “창밖의 바다는 푸르렀으나 특별한 볼거리 없이 단조로웠다.” 물론 이는 이후 펼쳐진 장관(해변에서 여유를 즐기는 펠리컨 등)을 더 극대화하는 무료함이기도 했으나, 결국 여행의 마력이란 이런 맛이 아닐까 싶어서. 일상과 비일상이 뒤섞인 그 맛.
<한국 팝의 고고학> 신현준, 최지선, 김학선 ㅣ 을유문화사
대체 이것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높은 완성도에 저 깊은 곳의 노고가 저절로 선명히 보이는 결과물들이 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대중음악의 면면을 기록한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가 그렇다. <한국 팝의 고고학 1960: 탄생과 혁명>, <한국 팝의 고고학 1970: 절정과 분화>는 2005년 한길아트에서 출간한 초판을 개정 및 증보했고, <한국 팝의 고고학 1980: 욕망의 장소>와 <한국 팝의 고고학 1990: 상상과 우상>은 초판이다. 대중음악 평론가인 저자들이 20여 년에 걸쳐 아카이빙한 음반, 사진 등의 자료와 당시 음반 상세 정보, 언론 기사 등 객관적인 팩트를 촘촘히 기록해 그야말로 하나의 고고학으로 완성했다. 여기에 신중현, 이장희, 김창완, 들국화, 신해철, 장필순 등 당대를 대표했던 아티스트들의 인터뷰가 힘을 더해준다. 뜨겁게 불타오르다 연기처럼 사라지기 쉬운 무형의 예술들을 단단히 잡아두었다.
<그림, 그 사람> 김동화 ㅣ 아트북스
<그림, 그 사람>의 부제는 ‘한 정신과 의사가 진단한 우리 화가 8인의 내면 풍경’.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외래교수이자 1990년대부터 한국 근현대 작가의 드로잉을 수집해 소마미술관과 〈소화(素畵)-한국근현대드로잉〉 전(2019)을 기획하는 등 컬렉터 및 전시기획자로서의 역량도 지닌 김동화 의학박사가 이중섭, 박수근, 신학철 등 한국 근현대화가 8인의 그림을 들여다본다. “영아기와 유년기의 체험들, 부모의 관계양상 및 전반적인 가족사, 교육의 과정과 종교적 배경, 개인사적 역경과 트라우마, 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예술세계의 형성과정 등을 살피면서 화가들의 정신역동과 작품세계”에 주목한 책. 그림을 꽃이라 두고 그 꽃을 피워낸 씨앗과 뿌리, 즉 그림 너머의 한 인간을 응시한다.
<청부 살인자의 성모> 페르난도 바예호 ㅣ 민음사
라틴 아메리카 현대 문학 작가 페르난도 바예호의 국내 최초 번역 작품이다. 페르난도 바예호는 <백년 동안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에 이어 라틴 아메리카의 현대 문학을 이끄는 작가로 꼽힌다. 이번 작품은 라틴 아메리카의 ‘살인 수도’를 배경으로 폭력과 마약, 무관심의 어두운 내면을 다룬다. 영화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를 두고 “너무나 찬란하고 진실되고 잔인하다” 평했다. 명분없는 원한에 사로잡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무차별적인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다가도 매주 성당에 찾아가 성모에게 위안과 보호를 간절히 기도하는 모순. <청부 살인자의 성모>는 모순으로 얼룩진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콜롬비아 현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