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데이비드 호크니는 어떻게 현대 예술사에 이름을 새겼나

2022.06.06김은희

어쩌면 삶도, 예술도 끝없는 정진이 아닐까.

무민은 문득 궁금해졌다. “오늘도 바다는 멋진 파란색이야. 하지만 바닷물을 손으로 떠보면 하나도 파랗지 않아. 왜 그럴까?” <무민과 마법의 색깔>은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바다를 바라보던 무민의 궁금증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갈색 나무껍질로 흰 천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무민 엄마와 강물 속에서는 예쁘게 반짝거리던 붉은 돌이 물 밖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거무스름한 돌로 보인다는 스니프의 투정을 거쳐, 노을 지는 저녁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무민의 뒷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갖고 싶은 것이 생기면 나는 우선 가만히 지켜볼 거야. 그리고 그걸 소중하게 머릿속에 담아두는 거지”라는 스너프킨의 속 깊은 말과 함께.
침대 머리맡에서 그림책을 읽어주기엔 아이들이 너무 커버린 지금도 가끔 생각나 <무민과 마법의 색깔>을 꺼내 보곤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자연을 소유하기보다 가만히 바라보고 마음속에 담으면 된다고 말하는 이 사랑스러운 그림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맑은 날 바다색’, ‘비 오는 날 바다색’, ‘밤 바다색’ 등 온갖 바다 색깔을 붙잡아 표본으로 만든 작은 유리병들을 나란히 선반에 올려둔, 무민의 불가능한 소망을 표현한 토베 얀손의 그림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과 공간, 변화하는 자연과 사물을 기록하고 곁에 두기 위해 오랜 세월 그림을 그려왔다. 마음속에 담은 기억은 잊히지만, 그림은 남으니까.
투명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물을 그리는 것은 회화의 오랜 도전 과제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일생에 걸쳐 물의 흐름을 그렸고, 우키요에 화가 호쿠사이의 폭풍우 치는 바다는 압도적이며, 윌리엄 터너와 알프레드 시슬레 등 많은 풍경화가가 강과 시냇물이 반사하는 빛을 즐겨 그렸다. 해가 뜨고 지는 순간에 지중해 물결에 아름답게 산란하는 빛을 포착한 클로드 모네의 그림들은 ‘인상주의’라는 사조의 의미를 그 어떤 선언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모네는 말년에 이르러 지베르니에 직접 조성한 정원에서 수련이 핀 연못과 그 수면에 반사된 나무와 하늘, 구름을 오랜 세월 반복해 그렸는데, 자연을 반사하는 모네의 연못은 3차원 세상의 온갖 빛과 색채를 캔버스와 종이라는 2차원 평면에 재현하는 회화 예술 장르 자체에 대한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대 미술 작가 중 ‘물’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데이비드 호크니다.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1967년작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을 비롯해 ‘어느 가정, 로스앤젤레스Domestic Scene, Los Angeles’(1963), 에칭 판화로 제작한 날씨 연작 중 ‘비Rain’(1973), 포토 콜라주 ‘수영하는 네이선, 로스앤젤레스Nathan Swimming, Los Angeles’(1982) 등 호크니는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통해 샤워 물줄기부터 수영장과 연못, 웅덩이, 바다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물’을 반복해 그려왔다. 2000년쯤이었나. 유럽 여행 중에 당시 미대에 다니던 친구 부탁으로 샀던 화집을 통해 호크니를 처음 접한 내게도 눈이 확 밝아질 정도로 청량한 물과 물줄기, 물방울은 인상적이었다. 작품 속 고정된 사물과 달리 호크니의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일렁이고, 첨벙대는 것 같았다. 물론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를 ‘물을 그리는 화가’ 정도로 말하는 건 대단한 실례일 것이다. 1937년생인 그는 미술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름난 화상 존 카스민에게 픽업되어 1970년, 불과 서른세 살의 나이에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피카소와 앤디 워홀 이후 데이비드 호크니처럼 미디어의 조명과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오랫동안 활동한 아티스트는 아무도 없었고, 그 명성과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2018년 가을 크리스티 뉴욕 옥션에서 1972년 작 ‘미술가의 초상(수영장의 두 사람)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이 기록적인 액수에 낙찰되며 경매 사상 가장 비싼 생존 미술가의 작품이 되었고, 2019년 봄부터는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작업실에 머무르며 작업하고 있다.
바이러스로 세상이 멈춘 것 같던 2020년 4월 1일, 호크니는 아이패드로 그린 드로잉 몇 점을 BBC에 보냈고, 다음 날 <더타임즈>, <가디언> 등 영국 주요 일간지의 1면은 보도사진이 아닌 노르망디의 환한 자연을 그린 아이패드 드로잉으로 뒤덮였다. 전염병과 격리로 지쳐 있던 사람들에게 호크니의 소박한 풍경화가 선사한 위안은 예술의 힘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BBC는 웹사이트 헤드라인을 통해 회화가 미디어를 장악한 이례적인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다. “뉴스의 일시 정지.”


오래전 인터뷰에서 엄청난 인기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호크니는 잠시 주저하다 이렇게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달변가인 그에게 같은 답을 구할 수 있는 질문이 또 하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유형의 화가입니까?”일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추상과 구상,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바뀐 건 표현 양식만이 아니었다. 호크니는 새롭게 나오는 테크놀로지를 누구보다 먼저 작업에 적용했다. 1980년대에는 각도와 시점을 달리해서 촬영한 사진을 조합해 마치 조르주 브라크나 피카소의 입체파 회화처럼 ‘모든 것이 근접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깊은 심도를 표현한’ 포토 콜라주 작업을 했고, 1988년에는 흑백 드로잉을 팩스를 통해 지인들에게 보내는 ‘팩스 드로잉’ 연작을 시작했으며, 1990년대부터는 컴퓨터 드로잉과 스틸 비디오 이미지 등을 통해 컴퓨터를 작업에 적극 활용한다. 올해 부산 아트 페어에 선보인 대작 ‘전람회의 그림 Pictures at an Exhibition’(2018)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호크니의 신작 여러 점을 설치한 전시 공간에 작가 자신과 지인들이 작품을 감상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포착한 이 작품은, 수천 장의 사진을 조합해 입체 공간을 다초점으로 평면에 재현하는 최신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포토그래픽 드로잉’ 기법으로 완성한 것이다. 사진을 일일이 손으로 자르고 붙인 그의 1980년대 포토 콜라주 작업과 비교하면 더더욱 흥미롭다.
2010년부터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왔는데, 황혼기를 맞은 예술가의 소일거리처럼 보이던 초기 아이패드 드로잉의 완성도를 향상해 나가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초창기 인터뷰에서 호크니는 끊임없이 표현 양식을 바꾸는 것이 이전에 했던 작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세기 중반부터 50년 이상 현대 미술의 가장 첨예한 지점에서 다음 모퉁이를 돌면 만나게 될 것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며 꾸준히 자신을 새롭게 갱신해왔다.


작년 5월엔 서울 삼성동 코엑스광장 옥외 전광판에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라는 호크니의 작품이 한 달 내내 상영되었다. 노르망디의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해돋이를 표현한 아이패드 드로잉 여러 장을 컴퓨터를 활용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작품. 작품의 제목은 그가 앞선 아이패드 드로잉에 덧붙여 BBC에 보낸 메시지와 함께 읽으면 그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전략) 이 상황은 때가 되면 끝날 겁니다. 이다음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ㅡ무엇을 배웠습니까? 나는 거의 여든세 살이 되었고 언젠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은 탄생이죠. (중략) 예술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와 공저한 <그림의 역사>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는 1980년대에 샤갈의 손녀를 만나 나눈 대화를 이렇게 전한다. “당시 아흔 살이 넘은 샤갈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고는 작업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 것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평생 그런 일을 해왔는데 그 밖에 뭘 더 바랄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면 깨닫게 됩니다. 그것에 견줄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더 없다는 사실을.” 샤갈은 말년에 기쁨으로 충만한 리소그래프 판화에 몰두했고, 80대의 마티스는 가위로 종이를 오리는 컷아웃 기법을 발견했다. 평생 새로운 매체를 탐구해온 호크니는? 팬데믹 기간 동안 노르망디에서 그린 풍경화와 마틴 게이퍼드와 나눈 대화를 담은 신간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압니다.” 글 / 정규영(콘텐츠 기획자)

피처 에디터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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