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얘기 시작하면 집에 못 가는데···.” 노상현은 자주 그렇게 말했다.
GQ 길게 돌아왔어요. 노상현의 첫 촬영이 <GQ>였죠?
SH 네 맞아요. 모델로서 첫 단독 화보. 10년도 지났네요.
GQ 지금까지도 그 촬영의 기억이 가장 아름답게 남아 있다고, 작년 어떤 인터뷰에서 말했더라고요.
SH 여전히 생생한 기억이에요. 지금보다 좀 더운 날이었어요. 햇살이 눈부신 동해였고, 제 옆엔 골든 리트리버가 있었어요. 당시 저는 아무것도 몰랐죠. 한국말도 서툴렀고, 촬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그야말로 모든 게 서툴렀는데, 마음만은 편안하고 자유로웠어요. 서툼을 숨기지 않고 로 raw하고 내추럴하게 잘 담아주셨고요. 모델로서 활동하는 데 어떤 기준이 된 촬영이었죠.
GQ 그때는 스티브로 불렸죠? 연기를 시작한 뒤에도 한동안 스티브였고요. 그리고 지금은 노상현으로 불려요.
SH 스티브라고 하면 “한국말 할 줄 알아요?” 묻는 분이 많더라고요. 사실 지금은 한국말이 더 편한데.(미소) 제 아이덴티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거죠. 저는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살 거고, 한국 배우로 활동할 거니까 노상현이란 이름이 더 좋겠다 싶었어요.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GQ 이름 마음에 들어요?
SH 강한 이름을 원한 적도 있어요. 노상현이라는 이름이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늘 스티브로 불렸으니까, ‘노상현’ 하면 어색한 느낌이 들었죠. 모델 활동할 때도 부드러운 이미지는 아니어서 좀 강한 발음이 있는, 각진, 이를테면 ‘ㄱ’이 들어간 이름이라면 어떨까 했었어요. 살다 보니 성격이 유하고 부드러워지기도 해서, 지금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GQ 그 전엔 어떤 성격이었어요?
SH 훨씬 더 예민하고, 날카로웠죠. 혼돈의 20대 초중반을 보냈어요.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많은 생각과 잡념이 있었고, 무수한 감정을 촘촘하게 느꼈어요. 그런 충돌 때문에 무척 예민했던 거 같아요.
GQ 인터뷰에서 유독 자주 보이는 말이 있었어요. ‘용기’.
SH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무 걱정 없었어요. 그러니까 용기가 필요할 만한 일도 없었죠. 20대에 한국에 오면서 처음 정체성의 혼란을 맞닥뜨렸어요. 스티브인가, 노상현인가, 나는 누구인가. 모든 혼란 속에서 몸으로 몰랐던 것들을 터득하는 과정에서, 용기가 필요했죠.
GQ 어떨 때 특히 용기가 필요해요?
SH 주춤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괜히 다른 사람이 신경 쓰이고, 그럴 때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용기를 내죠. 살면서 용기를 내는 게 점점 더 쉬워지는 것 같아요.
GQ 최근에 낸 용기는요?
SH 얼마 전에 처음으로 예능 찍었어요. 덴마크에서 한국 물건 파는 <도포자락 휘날리며>인데, 예능의 세계는 도무지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원래 전략을 짜고 가야 하는 스타일인데, 상상도 못 한 새로운 광경이 자꾸 펼쳐지니까 불안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제게 말하기를 요구하고···.(씨익)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더라고요. 어렵죠. 어려운데, 결정을 했으니까 해야죠. 에라 모르겠다. 질러보는 거.
GQ 물건을 판다고 하니 문득 떠오르네요. 대학에서 경영 공부했잖아요.
SH 맞아요. 그래서 대학에서 배운 것들을 들춰보고 적용해봤어요. 4ps, product, price, promotion, place. 이거면 되겠다 싶었죠. 제품을 이해하고, 타깃 마켓을 정하고, 적절한 프라이스를 매기고, 어떤 식으로 디스플레이할지 연구했어요. 생각보다 잘 먹히더라고요. 전공은 했지만 정작 현실에 적용해본 적은 없었는데, 굉장한 희열을 느꼈어요.
GQ 굉장히 전략적인 사람이군요.
SH 네. 저 INTP.
GQ <파친코>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죠. 굉장히 긴 오디션이었다면서요.
SH 오디션을 계속 본다는 게, 뽑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거죠. 긴가민가하다. 좋은데, 뭔가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확 결정은 못 하지만, 탈락은 아니다. 목적지가 불분명한 어두운 터널을 계속 걸으면서 이게 맞나, 저게 맞나 계속 고민하고, 어려운 도전의 연속이었죠. 그러면서 다양한 것을 보게 되더라고요. 오디션을 계속 보면서 어떤 의지가 생겼어요.
GQ 의지라면?
SH 하고 싶다, 라는.
GQ 어두운 터널을 계속 걷게 하는 동력이 있었어요?
SH 음···. 그냥 하는 거죠.(씨익) 김연아 선수가 스트레칭할 때 무슨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잖아요. “그냥 하는 거죠.” 진짜로, 그냥 하는 거예요. 같은 걸 계속 반복하다 보면 지루해지고, 무기력해지죠. 그럼에도 버티는 거예요. 갑자기 이게 너무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아요, 절대로. 어려움, 힘듦은 인생의 디폴트값이라고 생각해요. 그 와중에 즐거움을 찾을 수 있으면 감사한 거고요.
GQ 어려움 없이는 즐거움도 없다고 생각하는군요.
SH 그렇죠.
GQ 그런 삶의 태도는 어디서 왔을까요?
SH 혼란스러운 20대 초중반 시기에 세상의 이치를 알고 싶었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굉장히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잖아요. 앞서간 철학가, 예술가, 그리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했어요. 유명한 말들 있잖아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 사람은 왜 이 말을 했는지, 이 말이 왜 유명한 말이 되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제 안에 쌓인 데이터 베이스와 섞어서 도출해낸 저만의 어떤 우주, 세계관을 정립했죠. 인생의 어떤 진리에 대해서요.
GQ 이해가 안 되면 계속 골몰한 채로 있나요?
SH 고민하다가 이해가 되면 넘어가고, 안 넘어가면 그대로 남기기도 하고, 유동적으로요. 철학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철학 위에는 종교가 있다고 생각해요. 종교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올바른 인간이 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아 이야기 시작하면 집에 못 가는데.
GQ <파친코>에서 목사 역을 맡은 건 어쩌면 운명일까요?
SH 스읍. 운명적···. 스읍. 어떤 이유는 있겠죠.
GQ 연기를 하는 건 운명에 가까워요, 의지에 가까워요?
SH 의지죠. 운명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니까요. 큰 틀에서 사람의 팔자라는 건 있지만, 그 안의 세부 사항은 내가 정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제가 갑자기 미국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거예요.
GQ 불가능을 가능케할 수 있다는 믿음은요?
SH 내가 하고자 하면 노력은 할 수 있죠. 그런데 저는 터무니없는 것을 말한 거였어요. 나는 내년에 검사가 될 거야, 같은.
GQ 요행을 바라지 않는 편이군요.
SH 바라면 안 되죠. 불교에 ‘화복’이라는 말이 있어요. 화와 복이 같이 온다는 뜻이죠. 어떤 시련이 오면 그 후에 복이 올 거다, 복이 오면 그 이면에는 화가 있기 때문에 복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음양의 이치가 같이 있잖아요. 밸런스. 그것을 믿어요. 잘돼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슬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다 지나가니까. 무던하게, 묵묵하게, 안정적으로 저를 다스리는 걸 좋아해요.
GQ 지금 노상현에게는 <파친코>라는 큰 복이 왔죠.
SH 저는 살던 대로 똑같이 살면 돼요. 촬영이 많아지는 건 일이니까,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거고요. 연락도 많이 오고, 특히 놀자는 연락이 많이 오는데 그런 걸 조심해야죠. 가장 무서운 게 방심이거든요. 방심한 사람은 자신이 방심했다는 인지를 못 해요. 그걸 경계하려고 해요. 그래서 맨날 집에 있어요. 재미없어요, 일상이.(미소)
GQ <파친코>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들은 상황은 친구들과 새벽까지 놀 때였다고···.
SH 아하하하. 이러다 맨날 노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거 아니야. 그날은 마침 친구 생일이어서. 드문 일이에요.
GQ 선자가 이삭의 인생을 크게 만들었듯, 노상현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어요?
SH 멘토가 있었죠. 그런데 요즘은 정보 과부하 시대라, 배우려는 마음만 있다면 많은 사람에게서 얼마든 배울 수 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올바른 방식은 무엇인지. 제가 궁극적으로 멘토들에게 배운 건 삶을 어떻게 살아야 나를 위한 것인가예요. 나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른 이기심. 올바른 이기심이 무언지 함축시켜서 정확하게 잘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렵네요. 차라리 에세이를 써서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GQ 참, 글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말한 적 있죠? 주로 뭘 써요?
SH 하나의 개념에 대해서 쓸 때도 있고, 어떤 문장에서 파생되는 나의 생각들을 쭉 써내려갈 때도 있고요. 요즘은 너무 바빠서 거의 못 썼어요.
GQ 오늘 무언가를 쓴다면요?
SH 예술은 어렵다. 패션은 무엇인가.
GQ 언젠가 힙한 철학가 역할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논하는 패션 피플.
SH 힙한 철학자···. 재밌다. (잠시 침묵) 오늘 쓰고 싶은 게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