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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 출현> 박해일, 변요한, 김한민 세 남자의 인터뷰

2022.07.21전희란

박해일, 변요한, 김한민, 그러니까 이 남자들로 말하자면.

블랙 부클레 재킷, 시스루 팬츠, 모두 윌리엄 케이 박. 셔츠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박해일ㅣPARK HAE II

GQ 산책 이야기로 발을 떼볼까요.
HI 숲속에 들어가서 걷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됐어요. 등산은 아니고 완만한 길을 걷죠. 숲속의 기운을,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걷는 것, 꽤나 좋던데요. 답답했던 게 뻥 뚫리고요. 돌아와서 샤워 한 번하고,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쭉 들이켜면 아유, 그게 저는 너무 좋더라고요.
GQ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산책길을 소개한다는 게, 좋아하는 길을 함께 나눈다는 게 낭만적으로 들렸어요. 탕웨이 배우에게 해일 씨가 사용한 그 방법.
HI 좋아하는 길을 나눈다. 그 표현 좋네요. 배우가 너무 친근해도 오해가 생기고, 같은 말을 한다 해도 부딪히는 경우가 있잖아요. 말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걸어본다, 라는 게 서로 소통하는 데 참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자기를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또 그런 곳에는 맛집도 많죠.
GQ 박해일의 맛집이라. 궁금하군요.
HI 탕웨이 씨와 함께 걸은 길 중에 순천 ‘송광사’의 산책길이 있는데, <나랏말싸미> 촬영했던 곳이라 근처 지리를 좀 알죠. 법정스님이 타계한 불일암까지 걸었는데, 절 근처에는 맛있는 산채비빔밥이 많아요.(꿀꺽)
GQ 방금 군침이 도셨나 봅니다.
HI 밥 먹고 왔습니다.(인자한 미소)
GQ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그동안 박해일은 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왔는데, 해일의 ‘해’가 바다 해 자라면서요. <헤어질 결심>의 해준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왔다고요.
HI 산도 좋고 바다도 좋아해요. 그런데 올해는 유달리 바다와 인연이 있었어요. <헤어질 결심>도 바다 배경이고, <한산: 용의 출현>에서도 바다 위에서 보여주는 장면이 많죠. 또 <행복의 나라로> 라는 영화에도 “나 바다 가고싶다. 바다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라는 최민식 선배의 대사가 있어요. 바다에 함께 가는 장면도 나오고요. 야아아아 진짜 올해는 물, 바다와 관련이 있구나.

블랙 크롭트 재킷, 레더 부츠, 모두 아미. 블랙 체인 네크리스, 페르테. 실크 셔츠, 와이드 팬츠, 선글라스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블랙 시스루 셔츠, 노이어. 레이스업 부츠, 알렉산더 맥퀸. 타이다이 수트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앞서 인터뷰한 김한민 감독이 표현하길 박해일 배우는 물 같고, 변요한 배우는 불 같다고 하더라고요.
HI 멋진 표현이다. 요한 씨 얘기를 좀 해볼게요. 그분이 연기를 잘하는 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어요. 작품에서 본 요한 씨는 굉장히 와일드하고 날것의 기운이 넘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미스터 션샤인>, <미생> 같은 작품을 보면 모던함 속에서도 웃는 모습이 굉장히 귀엽고요. 그런 상반된 면을 동시에 지닌 잘생긴 배우. 드물죠. 에너지도 굉장히 좋고요. 직접 만나보니 역시나, 정말 끝까지 밀어 붙이더라고요. 자기의 한계를 모르는 상태의 배우처럼.
GQ 정작 <한산: 용의 출현>에서 두 분이 만나는 신은 없다면서요?
HI 만나는 장면도 없고, 만나서 같이 찍는 신도 없었어요. 촬영 중반 쯤 부산 횟집에서 한번 만나서 “그쪽 상황은 어떠니” 내통하는 정도였죠. 요한 씨는 왜군 장수 역할인데, 캐릭터에 이미 굉장히 몰입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 야수 같은 눈빛, 전진하는 왜군 장수의 모습을 실제로 보니 자극을 받았어요. 시종 맹수같은 눈빛을 하다가 한 번씩 씨익 웃는데 그러면 또 너무 귀여워요. 나중에 살인 용의자 역할하면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잡힐 듯 안 잡히는.
GQ 해준이 잡으러 가나요?
HI 제가요? 잡을 수 있을까요? 허허허허.
GQ 요한 씨가 한계를 모르는 배우처럼 느껴졌다면, 해일 씨 스스로는 어떤가요?
HI 저는 한계가 많은 배우예요.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많이 노력하지 않으면 그런 기질의 배우를 만났을 때 참 힘들고 난감하죠.
GQ 박해일의 한계는 좀처럼 알려진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HI 보여지는 것과는 다를 거예요. 저는 준비를 해야 하는 과에 속하는 배우예요. 제가 준비하는 영역 안에서는 가지고 있는 걸 최대한 활용해보려고 하죠. 매번 어떻게든 쥐어짜내는 거예요. 한계를 모른다는 건 저어 끝까지 가는 에너지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걸 매번 해내는 배우들 보면 부러워요. 쉬지않고 촬영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요.

스터드 재킷, 블랙공. 니트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해일 씨야말로 매년 쉬지 않고 작품에 임해왔잖아요. 성실한 직장인처럼, 마치 도장 깨기라도 하듯이.
HI 음하하하, 도장깨기. 1년에 한 작품, 혹은 1년 반에 두 작품씩 꾸준히 해 왔죠. 또박또박, 따박따박. 꾸준히 하면서도, 작품 끝난 뒤에 털어낼 시간은 꼭 확보했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작품 만날 준비를 하고요. 팬데믹이 오면서 촬영은 계속하는데, 관객분들에게 내보내는 과정이 멈춰졌잖아요. 그때 느끼는 바가 많았어요. 관객들에게 칭찬도 받고, 호되게 질타도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된거죠. 뭔가 이가 하나 빠진 느낌, 팔을 하나 잃은 느낌이랄까.
GQ 신기하네요. 관객 반응에 초연할 줄 알았는데.
HI 칭찬과 질타가 제게는 약이고, 독이에요. 관객이 없으면 만들 가치가 없어요.
GQ 가령 목적지까지 가는 데 들러야 하는 주유소가 몇 개 사라진 느낌 같은건가요? 피드백으로 다음 작품에 동력을 삼는.
HI 맞아요. 그런 식으로 제가 차곡차곡 누적되고, 나이도 먹으면서 앞으로 해야할 것을 찾아내는 식으로 해왔어요.
GQ 작품 선택의 기준으로 ‘호기심’이라는 단어는 빼놓지 않더군요.
HI 우리 일은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끼리 만들어 사람에게 보여주는 일이죠.저는 배우로서 캐릭터의 아주 깊은 속까지 알아내고 싶고, 그래야 인물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해요. 호기심은 그 사람의 밑바닥까지가 닿을 수 있는 동력이 되죠. 그러다보니 대중이 뻔히 좋아할만한 것을 선택하지 않을 때도 있어요. 어쩌면 손해일 수도 있죠. 효율적이지 못한 삶을 살고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제 본능을 따라가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제일 후회도 적고, 가치가 있고, 저다운 일이 아닐까 해요.
GQ <한산: 용의 출현>의 이순신 장군에게는 어떤 호기심이 발동하던가요?
HI 처음 제안 받고 감독님께 그랬죠. “제가 장군감입니까?” 왜 이토록 큰 부담이 되는 제안을 하시느냐, 진심으로 토로했죠. 일단 시나리오를 읽고 다시 이야기 하자며 시간을 좀 주셨어요. 책을 읽으면서 부담감이 서서히 녹으면서 호기심으로 스위치가 되더라고요.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쉽게 말하자면,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로만 다가가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었는데, 서서히 그분도 인간이라고 느끼게 되더라고요. 외롭고, 고독하고, 때로는 나약하고, 연전연승 하기까지 다양한 속 깊은 애환들이 시나리오에서 읽혔어요. 누구나 아는 위인으로부터 현실에 발을 붙이는 사람으로 끄집어내보면, 배우가 해볼 수 있는 지점이 있겠다 했죠.
GQ 중요한 장면에서 다시 활의 시위를 당기더군요. 박해일은 활과 어울리는 배우라고, <최종병기 활>을 연출한 당시 김한민 감독이 이야기한 적 있죠?
HI 저는 칼보다 활을 좋아해요. 칼은 근접전이고, 활은 숨어서 적을 기다리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죠. 영화적으로 칼을 대하는 배우와 활을 대하는 배우의 속성은 달라요. 찍는 방식도, 인물을 활용하는 방식도요. 이번에 두세 번 활 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매 순간이 장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느껴졌어요. 국란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분의 태도, 모습, 무거운 짐이 이 활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 숨, 한 숨 정성껏 쐈어요.

셔츠, 알레그리. 레더 부츠, 어썸비, 타이다이 롱 코트, 페인트 데님 팬츠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시나리오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장면에는 별표를 해두신다면서요.
HI 이번에는 모든 신이 마음속의 별표였습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도 섣불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유달리 컸던 작품이에요.
GQ 그만큼 애정도 깊었겠죠? 한 역할을 끝낼 때마다 헤어질 결심이 필요한가요?
HI 음하하. 제목이 다 갖다 붙네요. 배우마다 캐릭터를 보내는 방법이 다른데, 저는 풍선의 바람 빠지듯이 떠나 보내요. 풍선을 터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바늘 구멍을 곳곳에 여러 개 뚫어놓고 서서히, 무리없이 빠지는 방식으로 내버려두죠. 최대한 익숙한 공간에서 천천히. 그래서 시간이 필요해요.
GQ 물에 잉크가 번지듯 천천히 말이죠.
HI 번졌다가 다시 정수기 필터로 원상 복귀하기까지의 순환 과정이 있잖아요. 그런 시간을 충분히 겪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요.
GQ 마음에 파도가 오기도 하나요? 늘 잔잔한 바다처럼 보이는데요.
HI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죠. 혼자 있을 때도, 상대의 기운을 받아서 생기는 감정의 파도도 있고요. 작품에서 쌓인 것들 때문에 겪게 되기도 하는데, 풀려나가는 과정에서 우울도, 힘겨움도 있죠. 어쨌든 감정을 다루는 일이니까요. 퇴적된 감정들이 밀려와서 만조로 찼다가, 다시 간조로 가는 시간들이 존재해요.
GQ 최근 어떤 감독이 박해일 배우를 두고 “본의 아니게 웃기는 사람”이라고 하더 라고요. 웃기고 싶은 은밀한 욕망도 있나요?
HI 저 안 웃기지 않나요? 제가 제일 안 되는 부분이라서 희극인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물론 그분들도 엄청난 노력과 준비를 하겠지만 웃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잖아요. 저는 재밌고 싶지만, 재밌는 사람은 아니에요.
GQ “제가 하는 학문이 똥 같습니다.” 라는 대사를 웃길 생각없이, 담담히 내뱉어 웃기는 배우는 해일 씨가 유일할 것 같아요. 영화 <경주>의 한 장면이죠.
HI 와우. 그 대사에 웃어주시는 분은 진정한 시네필이죠. 그런 대사들 좋았어요. 에둘러 하는 표현들, 매력 있잖아요. 그거야말로 고오급 유머 아닌가요?

부클레 인디고 데님 재킷, 스털링 실버 링, 모두 보테가 베네타.

변요한ㅣBYUN YO HAN

GQ 먼저 인터뷰한 김한민 감독, 박해일 배우가 변요한 배우의 칭찬을 한참 하다 가셨습니다.
YH 음하하하.
GQ 의외로 귀여움을 담당하고 있다고요?
YH 배우들 중에 제가 거의 막내에 가까우니까요. 제가 분위기를 띄우지 않으면 술자리가 칙칙하고 어두워지더라고요.
GQ 그런데 <한산: 용의 출현> 촬영 기간에 혼술을 하면서 <최종병기 활> 포스터를 계속 노려본 이유는 뭐죠? 그 포스터의 주인공이 박해일 배우잖아요.
YH 촬영 중 머물던 숙소 바로 밑에 호프집이 있었어요. 그 곳을 단골 삼아서 촬영 끝날 때마다 갔죠. 하루가 저물면 다음 신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게다가 저의 모든 대사가 일본어였고요. 처음 호프집에 갈 때는 늘 혼자예요. 우두커니 혼자 앉아서 술 한잔하면서 계속 대사를 읊조리는 거죠. 스마트폰에 박해일 선배님이 등장한 <최종병기 활> 사진을 띄워놓고요. 제가 맡은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순신 장군과 대립하는 역이어서 긴장감을 유지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어요.
GQ 작전이었나요?
YH 그렇죠. 술자리에서 다른 배우들 만나도 촬영 얘기는 일부러 삼켰어요. 모든배우가 서로 서로에게 긴장했으면 했거든요. 현장 이야기를 노출해버리면 긴장감이 없어질 것 같았어요. 조용하게 한 잔, 한 잔 부딪치면서 상대 배우들의 눈을 자주 보고, 소리를 듣고 싶었어요. 그런 작전을 쓴 건 저만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모두가 그 지점을 찾기 위해서 술자리에서 삼삼오오 모인 거겠죠. 덕분에 팽팽한 분위기로 조성이 됐고요. 좋은 술자리의 예는 아니죠.(웃음)
GQ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 반응이 대개 이랬죠. “여기 변요한이 있었다고?”
YH 역할을 준비하면서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엄청 많이 봤어요. 네, 진짜 호랑이요. 와키자카의 모습에서 호랑이가 연상되었으면 했거든요. 분장팀에게도 호랑이 사진을 보여주고 “무조건 이런 느낌으로 가자”고 했어요. 주름, 디테일 모두 살리려고 했고요. 예고 편보다 영화 속에서는 더 저같지 않을거예요.
GQ 그리고 마침 변요한의 띠는 호랑이죠.
YH 맞아요. 임진년에 개봉할 줄은 몰랐는데.

니트 터틀넥, 부클레 인디고 데님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

GQ 시놉시스를 보니 시리도록 차갑거나, 불같이 뜨겁거나. 변요한이 맡은 역할은 그런 인물로 느껴지더라고요.
YH 맞아요. 중립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지략가 같은 모습도 보이고, 대사 하나하나에 알맹이처럼 야망이 담긴 말들이 담겨 있어요. 이미 시나리오상 안 타고 니스트로 정해져 있는 인물인데, 그래서 저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거기서 ‘원 플러스 원’으로 더 가면 과할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중립을 택했죠. 와타나베(박재민), 마나베(조재윤), 칸베에(윤제민) 등 다른 배우들이 조성해준 분위기 속에서 덕분에 잘 묻어 갔어요. 물론 저도 열심히 했고요.
GQ 김한민 감독이 이탈리아 전설의 축구선수 비에리를 예로 들면서 캐릭터를 설명했다면서요. 그가 그리는 이미지가 단박에 느낌이 오던가요?
YH 한 번에 알 것 같았어요, 어떤 스타일인지. 그 사람의 온도, 에너지까지···.
GQ 에지 있고 세련된 장수를 보여주고 싶다는 감독의 바람은 실현된 것 같나요?
YH 어느 정도는.(웃음)
GQ 해일 씨의 말이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갔어요. “변요한은 스스로의 한계를 모르는 것처럼 밀어붙이더라”라고. 본인은 한계투성이라고 하면서요.
YH 오래 해온 선배님들의 대단함을 요즘에야 구체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예전에는 그게 어떤 건지 잘 몰랐거든요. 연기를 10년 넘게 하다보니 이제는 구체적으로 알게되는 것 같아요. 겸손하고, 배려 있고, 후배에게 칭찬도 아끼지 않고, 동료애를 가지고 후배를 동료로 대하는 모습. 박해일 선배님처럼요. 그게 인간적이고, 오래 하는 비결인 거 같아요. 결국에는 자기의 인간성이 드라마나 영화에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흥행을 떠나 최고의 배우로 평가받는 건 배우의 탈, 마스크가 아니라 결국 그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또 하나의 페이소스. 예전에는 외면하려고 했던 것들이죠.
GQ 외면하려고 했던 이유는요?
YH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노출되면 흥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단점이 되고, 약점이 될까 봐. 아마 선배님들도 다 겪으신 거겠죠.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겪어오면서 내공이 생기고 흔들리지 않는 어떤 중심이 서고요.
GQ 요한 씨는 어디쯤 와 있나요?
YH 전에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연기를 하는 법도 이제 좀 알겠고, 간혹 관객 분들에게 잘한다는 소리도 듣고, 어떤 캐릭터가 힘들지만 잘해내기도 하면서 스스로가 발전한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런데 나라는 사람의 사회성, 인성, 인품도 함께 성장했나? 돌이켜본다면 연기를 시작한 스물여섯 살에 멈춰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어렸고, 까마득한 선배들과 함께하면서도 지기 싫었고, 버티고 싶었으니까. 가급적 나를 숨기고 노출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걸 지금, 삼십 대 중반에 깨닫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자산어보>에서 어떤 선배님을 만난 덕분이에요.
GQ 설경구 배우군요. 그가 요한 씨에게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건가요?
YH 그건 확실해요.
GQ 결정적인 계기라도 있었어요?
YH 작은 거예요. 알지만 못 했던 것들, 사소한 것들. 선배님은 정말 중요한 본질이 무언지 깨닫게 해주는 말씀을 툭 던지듯이 자주 해주셨어요. 박해일 선배님도 만나보니 결국 다르지 않더라고요. 각자의 기질에 맞게 타인과 다른 지점을 굳이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고, 포용력 있게 안아주시더라고요. 그 분들로부터 많이 배웠어요.
GQ 하필 그 시점에 그런 말이 들렸던 이유는 뭘까요?
YH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들어야 할 타이밍이었다고. 나 혼자 잘 살고 있어, 나 괜찮은 놈이야 스스로 칭찬하고 타협했던 순간도 있었어요. 그런데 선배들이 제게 고민하게 하는, 사색에 잠기게 되는 어떤 지점을 만들어주신 거죠. 직언도 분명 어느 순간에는 필요하지만, 결국 곰곰이 곱씹어 생각하게 하는 말이 가장 좋은 말인거 같아요.

블랙 레더 셔츠, 르메테크. 데님 팬츠, 아크네 스튜디오. 선글라스, 젠틀 몬스터.

GQ 변요한의 연기를 보면 온전히 자기인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을 완전히 버린다는 느낌도 들어요. 자신을 찾기 위해 연기하나요, 잊기 위해 하나요?
YH 연기를 시작한 처음에는 나를 찾기 위해 연기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나를 잊기 위해 연기를 하더라고요. 나중에 그 과정을 또 반복할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립을 했어요. 결론은, 저를 찾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이 맞다고요. 나를 버리고, 잊기 위해 연기를 해버리면 퇴보되고 퇴색될 것 같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저에 해당하는 이야기. 결국 나라는 사람이 성장하고 잘 살아서 연기도, 삶도 함께 상승하고 싶어요.
GQ 마침 변요한은 시대극을 통해 많이 성장한다고 했죠.
YH 그건 확실해요. 시대극에는 지혜가 있고, 관록이 있죠.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순간의 선택을 자주 맞닥뜨리고요. 그만큼 어렵죠. 겁도 나고요. 그런데 저는 어려운 것에 끌려요. 작품 하면서 제게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GQ 겁이 나요?
YH 살아보지 않은 시대니까요. 그 시대에 들어갔을 때 시대상, 배경, 나의 움직임,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 말투, 화술 여러 가지가 다루기에 까다로워요. 그런만큼 제가 해야할 것을 착실히 준비하고 들어가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더라고요. 결국 거기서 나올 때는 늘 행복하게 나왔어요.
GQ 어떤 사람이 지혜롭다고 느껴요?
YH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국은 인내심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산: 용의 출현>의 지장 이순신 장군도 부하, 장군, 군대를 잘 품어주었고요.
GQ 지혜에 대해 자주 고민하나요?
YH 자주 생각해요. 여러 고민 속에 공통적으로 담긴 건 인내심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어느 순간에 눈을 감아줄 수도 있고, 귀를 닫아줄 수도 있고, 입을 잠깐 닫을 줄도 알고, 그 모든 게 다 포함된 것이 인내심같아요.
GQ 거기엔 변요한의 회한이 담겨 있어요?
YH 없지 않죠. 최근에 정말 잘 살다갔다고 생각하게 하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보면서, 오래 생각했어요. 인내심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서.
GQ 지혜와 똑똑한 건 어떻게 구별해요? 언젠가 연기하면서 똑똑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더라고요.
YH 지혜라는 건 순간의 선택을 해야할 때 올바른 선택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 기준에 똑똑하다는 건 여러 계산을 하고 머리를 쓰는 거예요. 그러고나서 선택을 하는 거죠. 저는 이성적으로 다 따져보기 전에 본능적인 선택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 몸에 배어야겠죠. 즉각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게, 훈련이 돼야 하죠.
GQ 배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YH 잘 모르겠어요. 다만 평생을 인내로, 지혜롭게 사신 저희 할머니처럼 살고 싶어요.

아이보리 스트라이프 재킷, 브루넬로 쿠치넬리. 네이비 니트 톱, 이스트 하버 서플러스 at 샌프란시스코 마켓. 비녀는 김한민의 것.

김한민ㅣKIM HAN MIN

GQ 얼마 전 <한산: 용의 출현> 제작 보고회에서 캐스팅 3원칙-의리, 신인, 전략적 캐스팅-을 공개하셨죠.
HM 그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는데.
GQ 아주 경영학 전공자다운 원칙이라 놀랐습니다.
HM 2009년, 영화 <핸드폰>이 끝나고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내가 캐스팅을 하는 원칙은 무엇이지? 정리하다 보니 이미 제게 그런 캐스팅 원칙이 있더라고요. 의리, 신인, 전략적 캐스팅. 마치 운명적으로.
GQ 하필 그때 되새기게 된 이유는 뭘까요?
HM <핸드폰>이 제 영화 중 유일하게 흥행을 못 했어요. 그 영화에 좋은 배우가 많이 출연하는데···. 김남길, 곽도원이 단역으로 나오고, 김구라도 특별 출연하고, 감독도 직접 출연하죠.(웃음) 가만 보자, 내가 신인을 쓸 때는 과감하게 쓰고, 의리로 캐스팅을 하기도 하지. 그리고 전략도 있고.
GQ 의리는 어디서 다지나요?
HM 동호회 활동을 오래 했어요. 자전거, 요가, 등산, 야구 등등.
GQ 천만 영화의 감독이란 타이틀보다는 동호회 회장님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가깝게 느껴지네요.
HM 동호회를 하다보면 유대관계가 쌓이죠. 거기서 힘도 받고, 감독 특유의 우울이나 폐쇄적인 지점에 빠지지 않고 극복할 수 있게 돼요.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죠. 건설적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하고요. 동호회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계속 종목을 바꿨어요. 자전거 동호회도 했다가, 요가도 오래 했고, 야구는 리그까지 만들었어요. 회원? 배우, 감독, 제작사분 등 다양하죠.
GQ 영화인 아니면 낄 수 없나요?
HM 못 껴요.(웃음)

왼쪽부터ㅣ네이비 스트라이프 수트, 폴로 랄프 로렌. 비녀는 김한민의 것. 그레이 수트, 디올 맨. 실버 체인 네크리스, 페페주. 티셔츠, 펜던트 네크리스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칼라 디테일 실크 재킷, 민소매 톱, 블랙 팬츠, 모두 윌리엄 케이 박.

GQ 박해일 배우와는 <극락도 살인 사건>, <최종병기 활> 이후로 세 번째 작품이죠. 이 캐스팅은 의리인가요, 전략인가요?
HM 둘 다죠. 캐스팅하다 보면 뒤섞여요. 신인이었다가 의리로 갔다가, 신인인데 전략적 캐스팅이 되기도 하고.
GQ <최종병기 활> 이후로 작품으로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땠어요? 사적으로도 가까운 걸로 알고 있는데요.
HM 사적으로나 작품으로나, 별반 다르진 않아요. 언제나 프로페셔널한 친구죠. 술 마실 때도 프로페셔널하고. 아하하하.
GQ 술 마실 때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은···.
HM 감독한테 적당히 할 말도 할 줄 알고요. 요즘에는 멤버 한 명이 늘어났어요. 변요한이라고 있어요. 박해일, 변요한, 저 이렇게 셋이 모이면 궁합이 괜찮아요. 둘만 있으면 약간 꼰대 느낌이 있는데 요한이가 오면 활기가 돌면서 유머러스 해지죠. 젊어지는 기운도 있고.
GQ 셋의 케미가 좀처럼 상상이 안 돼요.
HM 요한이는 귀여운 악동 같은 캐릭터죠. 저나 해일이를 놀리기도 하고. 해일이는 좀 애늙은이같은 면이 있어요.
GQ 지워지지 않는 소년미는 어쩌고요.
HM 외모엔 소년이 있을지 몰라도 품성은 애늙은이예요. 20대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예의 바르고, 의젓했고, 술 먹을 때도 치열했고.(웃음) 그래서 <한산: 용의 출현>의 이순신 장군으로 해일이를 떠올렸죠. 한산대전 당시 이순신 장군의 나이가 마흔일곱 살이었어요. 지금 해일이랑 나이가 같죠.
GQ 해일 씨가 처음엔 그 역할을 거절하려고 했다고 들었어요.
HM 해일이는 좀 그런 게 있죠. 자기가 궁금한 배역이 아니면 그냥 단칼에 잘라요. “아닌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이순신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있었고, 그가 질문하고 제가 답하는 과정에서 그 인물에 공감하게 된 거예요.
GQ 심의용 대본을 훑어봤는데 느낌표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도 박해일 배우의 대사만은 담담하고 결연하고 그렇더군요. 아주 결정적이고 긴박한 상황에서도요. 배우를 고려해서 쓴 부분도 있나요?
HM 있죠. <한산: 용의 출현>에서 단 한 장면을 꼽으라면 “발포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에요. 발포할 때의 결연하고 냉정한 눈빛이 하이라이트죠. 그 장면을 쓰면서 박해일의 이미지가 겹쳤어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말수가 아주 적었고, 굉장히 집중하고 준비해서 실행하는 인물이었다고 해요. 그런 면에서 해일이랑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들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투영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요즘 인터뷰나 제작 보고회 때 보면 더 애늙은이가 됐더라고. 아하하.
GQ 변요한에게 기대한 것은요? 첫 만남이었잖아요.
HM 세련되고, 신선하고, 에지 있는 변요한표 왜장을 보고 싶었어요. 왠지 잘할 거 같았어요. 남들은 변요한의 촉촉한 눈빛을 주로 얘기하던데 나는 그에게서 굉장한 야수성을 봤어요. 전직 복싱선수이자 축구선수 비에리라는 선수가 있어요. 2002년 16강 이탈리아전에서 아주 무서웠지. 캐스팅할 때 그랬어요. “요한아, 비에리가 되자.” 그러니까 요한이가 단박에 알아듣더라고.
GQ 현장에서 기대 이상으로 소름 끼쳤던 연기가 있었나요?
HM 모든 신이 미쳤는데!
GQ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HM 진짜로 모든 신이 소름 끼쳤어요. 감독이 던지는 디렉션을 2백 퍼센트 만족시켜주는 눈빛, 절제된 가운데 나오는 기들이 아주 대단했죠. 해일이가 물이라면, 요한이는 불이죠. 둘의 대비와 묘한 앙상블이 아주 좋았어요. 아무래도 캐스팅을 잘했어.
GQ 실제 크기로 제작한 거북선 역시 ‘용의 출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죠. 머릿 속으로만 그리던 거북선 앞에서 즉각적으로 어떤 감정이 스쳤는 지 궁금해요.
HM 성스럽다. 영물이네, 라는 생각. 마주하고 볼 때보다 거북선 위에 올라가서 주변을 내려다보니까 더 실감나더라고요. 거북선 등판에서 달리는 신을 꼭 만들어야겠다 싶었죠. 그리고 거북선이 주는 특유의 민족의 혼같은 게 있어요. 이 영화 반드시 잘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죠. 떡을 지어 막걸리 놓고 고사를 지내야 하나? 하다가 안성기 선배님하고 둘이 조용히 제사 지냈어요. 다른 배우들은 모두 바빴어.
GQ 그 앞에서 두려움도 엄습하던가요?
HM 두려움은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친근한 기분이었죠. 마땅히 있어야 할 물건이 이제 나타난 기분이었죠. (제작사 관계자에게) 거기 관광객 엄청나게 밀려올 것 같은데 포토존 만듭시다.

왼쪽부터ㅣ네이비 스트라이프 수트, 폴로 랄프 로렌. 비녀는 김한민의 것. 그레이 수트, 디올 맨. 실버 체인 네크리스, 페페주. 티셔츠, 펜던트 네크리스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칼라 디테일 실크 재킷, 민소매 톱, 블랙 팬츠, 모두 윌리엄 케이 박.

GQ 그나저나 좀 아까도 계속 작업 중이신 거 같던데요. 여전히 후반 작업을 진행 중인가요?
HM 마지막까지 빛깔을 잘 만져서 멋진 거북선을 출연 시키려고요. 특히 음향, CG에 매달리고 있어요. 영화는 역시 극장에서 봐야지, 느낄 수 있게끔 사운드를 매만지고 있죠. 이번에는 사운드가 아주 중요해요. 사운드 팀장이 병이 나서 지금 링거 꽂고 3주 동안 나오질 못 하고 있네···.
GQ 어쩐지. 대본에도 쿠쿠쿠쿵 콰콰콰쾅 비트가 아주 생생하게 담겨 있더라고요. 이전 작품 <명량>이 엄청난 성적을 기록해서 더 부담이 될 수밖에 없겠어요. 그 때 “이 스코어에는 어떤 의미와 상징이 담겨 있다”라고 말씀하셨죠. <한산: 용의 출현>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라면, 어떤 의미 때문일까요?
HM 용기와 자긍심, 그리고 연대감. 지금 시대에, 우리에게 특히 필요한 거죠. 상업 영화의 중요한 지점은 흥행이고, 흥행이 담보되는 게 매우 중요하지만,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어떠한 만족감을 가지고 나오는가는 다른 문제예요. 코로나 19를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경기는 더 힘들어진 것 같아요. 이 시기를 잘 이겨 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자긍심이 높아지면 좋겠어요. 사회에서 어떤 소외감이나 단절감 없이 서로가 연대를 느낄 수 있게요.
GQ 그건 동시에 지금 감독님에게도 필요한 거고요?
HM 아주 필요하죠. 용기도, 자긍심도, 어떤 연대감도. 그런 게 잘 사는 거 같아요. 그것을 지니고 살면 행복할 거 같아요.
GQ 감독이란 위치는 한편으로 장수와 비교할 만하죠. <한산: 용의 출현>의 지혜로운 장군, <명량>의 용맹한 장군, <노량>의 현명한 장군 중 감독님은 어디에 가까운 것 같나요?
HM <명량>을 찍을 때는 용장에 가까웠고, <한산: 용의 출현> 때는 지장에 가깝고, <노량>에서는 현명한 장군에 가깝죠.
GQ 홍보 능력이 아주 훌륭하십니다.
HM 정말이에요. <명량> 때는 정말로 용기가 필요했다고요. “나를 따르라” 하며 당근과 채찍질을 병행하며 이끌어가야 했어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전이 된 지금은 시대를 좀 더 현명하게, 전략적으로, 지략적으로 잘 살아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용기는 기본이고요.
GQ “본질이 뭔가”라고 자꾸 물어서 감독님 별명이 본질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이 자칫 따분하기만 한 분이 아닐까, 오해하고 있었어요.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거 있죠.
HM 본질은 유머러스한 데 있어요.

피처 에디터
전희란
패션 에디터
이연주
포토그래퍼
강혜원
스타일리스트
정주연 (박해일), 박초롱 (변요한)
헤어
정준 at 포레스타 (박해일, 김한민), 윤소현 (변요한)
메이크업
수민 at 포레스타 (박해일, 김한민), 박정안 at 순수 (변요한)
어시스턴트
조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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