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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드라마 속 명대사 5

2022.08.07김은희

드라마를 빚는 물방울들.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 하고 싶어.”
“ 이상하게 아버지 필체가 제일 아버지 같더라고요.”

짧은 아침 서울행 1단계 마을버스에 오르려 달리는 염 씨 삼 남매처럼 뒤늦게 <나의 해방일지>에 올라탄 이 시청자는 정주행 과정 중에 몇 번이고 10초 전으로 되돌렸다. 입가를, 뒤통수를, 어떨 땐 가슴을 툭 치고 간 말을 붙잡으려. 작가님은 어떻게 이런 대사를 써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드나요? 어떻게 이런 드라마를 빚으시죠? 박해영 작가에게 여과 없이 엉겨 묻고 싶었다. 좋은 드라마, 끌리는 이야기, 훌륭한 말에 대해. “아시겠지만, 제가 인터뷰를 잘 안 합니다.”
예상한 바다. 박해영 작가의 인터뷰는 <LA 아리랑> 보조 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한 1998년부터 24년이 지나는 동안, 구글링 11페이지가 넘어가는 동안 서너 개 채이는 것이 전부이니까. 그마저 <또! 오해영>으로 대한민국 콘텐츠대상을 탄 2016년에 문화진흥원 등 공공기관이나 방송 작가들을 위한 대담이 8할이다. 나머지 2할은 이번 인터뷰를 사양하며 양해를 구한 대로 “딱 한 번, 최원석 피디가 먼저 하고 나서 부탁해 어쩔 수 없이” 일본 잡지 <미디어보이>와 한, 그리고 가장 최근 <나의 해방일지> 종영 후 2022년 6월 24일 <아시아경제>와 나눈 대화다.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수차례 인터뷰 거절한 작가 취재기.”

왜 수차례 거절해도 박해영 작가를 찾나. 왜 사람들은 박해영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나. 그 실마리는 최근 인터뷰, <나의 아저씨>는 4년 전 작품이라 가타부타 떠든다고 해서 시청자분들의 감정이 훼손될 일은 없을 것 같아 이야기한다는 작가의 언어에 짙게 묻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한 종자라 나의 갈증은 대중의 갈증일 것이라는 상정하에 저의 갈증을 푸는 방식으로 인물을 잡는다. <나의 아저씨> 기획 의도에는 그런 글이 있었다. ‘요란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근원에 깊게 뿌리 닿아 있는 사람들. 그런 맑은 사람들에게 감동하고 싶다. 원래 인간이란 이런 물건이었다는 듯,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간의 매력을 보여주는….’ 평범해 보이는 인간의 뜨거움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다.”
평범해 보이는 인간의 뜨거움. 맑음. 잊고 있던 인간의 매력. 인간의 근원. 유라(권나라)가 밤마다 쏟아낸 토사물을 외면하지 못하는 기훈(송새벽)의 미간. 핸들을 꺾을 때마다 넘어지는 다마스를 그럼에도 다시 세워 페달을 밟는 상훈(박호산)의 발끝. 멋대로 오가는 창희(이민기)에게 날을 세웠어도 문을 잠그지 않는 구 씨(손석구). 그리고 마침내 미정(김지원)이 펼친 해방, 일지. 그래, 그들이 지나간다. 여전히 어딘가 숨 쉬고 있을 것 같은 이들이 스친다. 작가의 발화를 직접 담지 못한 에디터로서는 유구무언이나 이로써 수증기처럼 떠다니던 궁금증이 한 방울 맺혔다. 인간, 박해영 작가 앞에는 인간이 있었다.

“어차피 드라마란 인간 탐구와 인생 성찰, 그리고 인간 연구 아닙니까.” 그 이름이 곧 장르가 된 작가, 1968년 MBC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해 <목욕탕집 남자들>(1995), <청춘의 덫>(1999), <부모님 전상서>(2004) 같은 동시대 이야기를 그려온 김수현 작가 역시 일찍이 희로애락의 드라마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 바 있다. 2005년에 발간해 2019년에 10쇄를 찍은 <드라마 아카데미>에서 그는 드라마는 인간의 천착이라 단언한다.

천착 穿鑿
1. 구멍을 뚫음.
2.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

둘 중 어떤 정의로든, 우리 각자가 좋은 드라마를 떠올릴 때 겹치는 부분이 반드시 있으리라 긍정한다. 어떤 이야기는 마음에 구멍을 뚫기도 하니까. 그 구멍을 다시 메우는 것 또한 공혈 위로 치는 파도가 끌어오는 모래일 테니까. 요즘 나의 빈 곳에는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아” 말하던 <나의 해방일지> 미정의 숨이 남아 있다.
얼마 전 깊은 보라색 표지의 시집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를 펴낸 서효인 시인은 김지혜 작가의 <인간실격>으로 인해 뚫린 자국을 보여주었다. “부정(전도연)은 부자가 되라고 아빠(박인환)가 예쁘게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 부정이가 아빠에게 ‘나는 실패한 것 같아’라고 말한다. 이 대화가 등장한 둘의 시퀀스는 둘의 연기가 너무나 완벽하여 되레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진짜 저런 인물이 있을 것만 같아서, 진짜 저런 인물이 어쩌면 나와 내 아버지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진짜 저런다면, 진짜 진짜 가슴 아플 게 분명해서. 부정이는 ‘실패’라는 말을 굳이 아버지에게 발설한다. 실패했다는 딸의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고백이 불현듯 육박했을 때, 아버지는 무어라 답해야 하는 걸까.”

한 아버지의 자식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 한 인간인 서효인 시인은 자신의 모습이 포개지는 구멍 앞에 섰다. 그 어둠을 들여다보며 더 깊이 파낸다. “분명한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패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실패는 할지언정 실격할 리는 없다”고. 때로 인간은 어둠 너머 자신의 빛을 찾는다. 서효인 시인에게 새겨진 <인간실격>이라는 인간 천착의 잔상은 다음 페이지에 이어진다. 좋은 드라마란 무엇인가. 무엇이 끌리는 이야기, 훌륭한 대사인가. 그 답을 여기 내릴 수 없다. 다만 체에 걸러 흩트리고 나니 하나만은 남는다. 박해영도, 김수현도, 김지혜도, 65년 한국 드라마 물결 속 분명하게 파장을 만든 작가와 작품이 또렷이 응시해오던 대상, 인간.

“나는 어떤 인간의 모습으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다가 갈 것인가’에 대해 깊이,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어떤 모양새의 인간이고 싶은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원하고 노력하십시오.” 드라마 작가를 목표로 하거나 아니거나를 불문하고 고찰해보기를 바란다는 김수현 작가의 당부를 곱씹는다. 나는 어떤 모양새의 인간인가. 몰랐거나 모른 척 했거나 알 수 없던 그 마음을, 불현듯 갑자기 총체적으로 누르는 그 버튼은 무엇인가. 당신과 나는 속눈썹 한 올, 콧방울 한 짝, 입가 주름 한 줄 전부 달라서 좋은 드라마, 끌리는 이야기, 훌륭한 대사도 모두 다르게 부유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드라마,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말에 대하여. 당신을 투영하는 물방울은 어디에 맺히는가.

그래, 꽃길은 사실 비포장도로야
잘 차려진 드라마에는 감치는 말맛이 있다. 드라마 대본은 보통 80퍼센트의 대사와 20퍼센트의 지문으로 구성된다. 대사의 비중이 높은 만큼, 모든 대사는 저마다의 목적을 지녀야 하며 단순히 내뱉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진화된 대사는 정서적 울림을 담는다는 말이 있다. 내게 드라마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던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일이지만, 되도록 긍정적인 가치를 담아 세상이 더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런 면에 비춰서 이 같은 대사를 나는 좋아한다. 꽃길은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비유다. 우리는 인생이 좋은 일로만 채워질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것이 우리 삶에 계속 머물러주길 바란다. <멜로가 체질> 속 진주의 모습은 우리와 닮았다. 그런 진주의 말을 통해 작가님이 건네는 다정한 위로에는 삶의 고단함을 다독이며 다시 나아갈 힘이 담겨 있다. 우리가 걷는 길 위에 핀 꽃들은 수많은 과정이 피어난 것이다. 우리는 꽃만 보고 걷는 사람이 아닌, 꽃을 심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지 않을까. 송혜인, 한국방송작가협회교육원 2021 TV 드라마 신인상 수상자

슬퍼만 하지 말라고
힘겹게 일어나 간신히 앉은 여자. 남편을 배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화가 난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다. 시간은 12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울증 환자에게 ‘지금’은 없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삶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노희경 작가의 시선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원래 우울은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자 행위이다. 상실의 대상과 작별하는 과정을 통해 상실이 일어난 정신의 나머지를 온존하여 현재와 연결시킨다. 그러나 병적인 우울은 정신을 상실의 대상과 함께 통째로 과거에 가두고 ‘지금’과 격리시킨다. 그렇기에 의사들은 어떻게든 환자의 정신을 과거와 미래에서 건져내어 ‘지금’과 ‘여기’에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의사 입에서 나오는 “오늘은 꼭 운동하세요”, “한번 외출을 해보세요”란 말은 의사마저 환자 자신의 슬픔에 별 관심이 없다는 오해를 종종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다소 투박하지만 따뜻한 동석의 말이 내게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이 대사에 담긴 ‘블루스’대로 직접적으로, 도리어 오해 없이 환자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슬퍼하지 말란 말이 아니에요. 슬퍼만 하지 말아요.” 권순재,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아버지, 난 실패한 것 같아
부정이와 아버지, 그러니까 둘은 참으로 다정한 사이다. 나의 실패를 고백할 수 있는 사이만큼 다정하고 다감한 관계는 없을 것이다. 다정하고 다감하기에 마음 아프고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두 딸도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니 그 누구에게도 실패를 말한 적 없는 듯하다. 실패를 거듭했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실패를 안으로만 곱씹었다. 그만 울어라, 울면 힘 빠진다,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그래서 없었다. 나의 딸 둘은 이제 실패를 배워가는 듯하다. 받아쓰기 시험일 수도 있고, 레고 블록 쌓기일 수도 있겠지. 아이들에게 놀랄 때가 많다. 잘 안 되면 실패했다고, 잘 안 된다고 잘도 말한다. 실패했다고 말하길 실패하지 않는다. 그럼 나는 더없이 다정한 아빠가 되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녀석들이 더 커서도 실패를 말할 다정이 있을까? 그 이야기를 들을 만한 다감이 내게는 존재할까? 다만 분명한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패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실패는 할지언정 실격할 리는 없다는 거다. <인간실격>의 부정이도, 그 드라마의 모든 인물도, 그 드라마를 본 사람도, 그중 특히 나와 내 딸이 그러길 감히 바라본다. 서효인, 시인

날 추앙해요
<나의 해방일지>에 수시로 등장하는 식사 장면은 우리들이 어쩔 수 없이 발붙이고 살아야 하는, 무미건조한 밥맛 같은 현실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추앙하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단어가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은 각자 사는 지역과 동네가 다르다. 일단 ‘추앙하다’라는 단어는 ‘글말’이라는 지역에 산다. 그런데 이 말이 ‘입말’이라는 지역에 출현한다. 바다에 사는 고래가 육지로 저벅저벅 걸어 올라온 듯한 느낌이다. 이런 기이함은 이내 환상으로 바뀐다. 추앙하다라는 말은 재정의되고(“넌 뭐든 할 수 있다, 응원하는 거”), 선언된다. 선언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문이다. 선박의 진수식에서의 명명(이 배를 로 명명합니다), 한 국가의 선전포고(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언어학에서 선언 화행이라고 부르는 이런 말들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발화되는 그 순간 세계를 그 말에 맞추어 변화시킨다. 추앙을 거짓으로 할 수도 있지 않냐는 구 씨의 말에 염미정은 이렇게 답한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마법의 주문인 듯, 드라마 속 인물들은 이 말에 맞추어 변화한다. 이렇게 ‘추앙하다’라는 말은 일상을 기이로, 그 기이를 다시 환상으로 바꾼다. 백승주, 언어학자

피처 에디터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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