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타석 밖에서.
GQ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장비들을 보며) 이 시기에도 굉장히 많은 선수가 훈련을 하나 봐요.
SY 지금은 자율 훈련 기간입니다. 마무리 훈련은 끝났고, 이때 보통 언론 행사나 시상식이 많아서 구장에 나오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나와서 훈련을 하네요.
GQ 감독님께서도 굉장히 바쁜 시기죠?
SY 12월 9일 골든 글러브 시상식 끝나면 이제 대외 활동은 마무리가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본격적으로 내년 구상을 해야겠죠. 스프링 캠프까지 40일 정도 남았는데 그 시간이 결코 넉넉하진 않더라고요.
GQ 스프링 캠프 장소는 정해졌나요?
SY 호주로 갑니다. 구단과 상의한 결과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죠. 1월 30일 전후로 떠날 예정인데, 그 때까지 선수들 전력 구상을 마쳐야해서 사실 머리가 좀 아픕니다.(웃음)
GQ 마무리 훈련 강도가 꽤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SY 뭐, 프로 선수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이 때가 아니면 그렇게 준비하고 다듬을 수 있는 시간이 없거든요. 선수마다 올시즌에 부족했던 점이 있었다면 올시즌에 보완을 끝내는 게 맞고요. 올해 실패했던 원인들을 고치지않고 내년 스프링 캠프까지 가져가는 건 프로 선수로서 하면 안 되는 태도가 아닐까 싶어요.
GQ 감독으로서의 주문이 매서운 건 당연히 두산 베어스를 더 강한 팀으로 만들기 위함이겠죠.
SY 그렇죠. 당연히 더 강한 팀을 만들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보통은 삼진아웃 제도가 있잖아요? 하지만 이제 두산 베어스는 원아웃입니다. 크고 작은 실수가 아니라 단순한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어요. 당연히 저부터도 그렇게 행동할 거고, 팀도 마찬가지로 운영할 생각입니다.
GQ 감독직 수락까지 속도가 굉장히 빨랐어요.
SY ‘언젠가는 이 자리에 앉아야겠다’고 항상 생각은 했는데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죠. 저도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GQ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아무래도 고민이 굉장하셨죠?
SY 처음에는 굉장히 감사한 마음이 컸습니다. 동시에 생각도 깊이 해봤고요. ‘내가 지금, 이 타이밍에 감독을 맡아서 팀을 잘 끌고 갈 수 있는지’. 걱정도 기대도 많았는데 결국 지금이 최적기라는 판단이 서더라고요. 이후부터는 엉킨 고민들을 빨리 정리했습니다. 더 시간 끌 필요 있나요.
GQ 선택 앞에서 어떤 고민이 가장 지난하던가요?
SY 저는 두산 베어스에서 뛰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구단에 아무것도 보여드린 게 없죠. 그럼에도 두산 베어스는 저를 선택해주셨고요. 고민이라면 보답에 문제를 두고 가장 깊이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GQ 답이 어떻게 정리되던가요?
SY 결국 이게 좋은 선택인가, 그렇지 않은 선택인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오롯이 제 몫이라고 생각했고요. 구단과 팬들에게 결과로 보여드리자고 다짐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부를 쏟아 부을 생각입니다.
GQ 이제 36번이 아닌 77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습니다. 어색하진 않던가요?
SY 뭐 나쁘진 않았다 정도?(웃음) 그런데 제가 계속 36번만 달고 뛰었으면 많이 어색했을텐데 사실 그러진 않았거든요. 국가대표 때, 일본에서 뛸 때 전부 다른 번호를 달았어요. 유니폼을 입는다는 게 저에게는 큰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좋았습니다.
GQ 홈과 원정 유니폼 중 어떤 컬러가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SY 저는 홈. 하얀색 유니폼이 조금 더 좋더라고요. 그런데 홍보팀 통해 듣기로 베어스 팬들은 네이비가 더 잘 어울린다고 말씀하셨다고···.(웃음)
GQ 오랜만에 유니폼을 입는 거잖아요. 선수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던가요?
SY 똑같습니다. 야구에 대한 열정도 변함없고요. 유니폼을 입으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선수가 아닌 감독이기 때문에 우리 팀, 우리 선수들을 지켜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새로 들죠. 이런 마음가짐이 ‘원팀’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고요,
GQ 조금 전 오랜만에 유니폼을 입은 게 아니냐는 질문을 드렸는데, 새어보니까 은퇴 후 5년이 지났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5년은 어떤 공부가 된 시간 같나요?
SY 음···, ‘선수 이승엽’을 버릴 수 있는 시간이지 않았나 싶은데요.
GQ 에? ‘선수 이승엽’을 지워내고 싶으셨어요?
SY 23년이라는 시간을 선수로 뛰었으니까, 이제는 좀 내려놓고 지워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어요. 그래야 새롭게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뛴 시간이 있으니 ‘선수 이승엽’이라는 이미지를 지워내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 5년이 ‘선수 이승엽’, ‘국민타자’라는 타이틀을 내려 놓을 수 있게 도와준 것 같아요.
GQ 그래서일까요? 저는 야구장이 아닌 곳에서 ‘이승엽’을 볼 때면 가끔은 신기하기도 했어요.
SY 저 역시 야구가 아닌 다른 경험들을 하면서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됐구나’싶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어요. 사회에 나가서 견문도 넓히고, 분야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눠보고 하면서 정말 많은 공부가 됐어요. 아마 야구선수에서 바로 지도자가 됐다면 정말 많이 미숙했을 거예요. 5년 동안 야구장 밖에서 제가 무엇을 배웠다면, 그건 분명히 감독을 하는 동안 좋은 도움으로 발현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GQ 하지만 그럼에도 ‘선수 이승엽’이라는 타이틀은 쉽게 지워질 수 없는, 어떤 상징과도 같잖아요. 워낙 우뚝한 타자였으니까. 그래서 어느 쪽에서는 이런 우려도 있습니다. ‘굉장한 스타 플레이어였으니, 선수들에 대한 기대치가 남들과 달리 상당할 것이다’라는.
SY 저는 그런 거리감을 좀 좁혔으면 좋겠어요. 제가 가만히 있으면 선수들은 아무래도 쉽게 다가올 순 없을 거예요. 감독 이전에 야구 선배고, 말씀하신 것처럼 선수 시절 성적도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선수 이승엽’은 이제 버려야죠. 저는 지도자로 치면 이제 애기고, 그래서 당연히 자만도, 건방도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어떻게 하면 우리 팀, 우리 선수들이 더 강해질까, 그 고민만 하려고요.
GQ ‘초보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도 분명 있죠.
SY 경험 부족이다, 초보 감독이다, 가시밭길이 될 거다 등등 너무 많은 걱정과 염려를 듣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만 동요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겠죠. 선수 때 늘 커다란 압박 속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분명 있습니다. 주위에서 어떤 말을 하든 신경쓰지 않고 우리 팀만 생각할 겁니다. 프로라면 말보다 결과로 보여드리는 게 맞겠죠.
GQ 감독 이전에 야구 선배로서 선수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부분도 분명 있을 것 같아요.
SY 프로선수들이기 때문에 제가 기술적인 걸로 이야기할 부분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저도 지나오고 보니까 23년이라는 선수 생활이 굉장히 짧게 느껴지더라고요. 은퇴 후에는 이곳 그라운드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임을 새삼 느꼈고요.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죠. 다만 최소한의 후회만 남길 수는 있어요. 야구장에서 모든 걸 쏟아부으면 됩니다. 분명 많이 힘들지만 선수로서 뛸 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니까요.
GQ 3년 안에 한국시리즈 진출을 목표로 두셨어요.
SY 그 정도는 해야지 최소한의 역할은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겸손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정해둔 목표는 분명하죠. 그 정도는 해야 두산 팬들의 얼굴을 뵐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GQ 선수 시절 경험했던 ‘두산 베어스’는 어떤 팀이었나요?
SY ‘허슬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잖아요. 야구장에서 보면 선수들 눈빛이 다를 정도로 혼신을 다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빨랐고요. 그런데 어느샌가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다 보니까 선수들이 조금씩 지쳐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무래도 올해 9위라는 기록도 분명 그 영향이 있었을 거라고, 나름으로는 그렇게 분석합니다. 원인을 파악했으면 고쳐야죠. 이제는 반등만 남았습니다. 확실히 두산은 끈기 있고 빠른 팀입니다.
GQ 결국 이승엽 감독의 두산은 어떤 키워드로 정리될까요?
SY (감독실에 붙은 액자를 가리키며) 여기 써놓긴 했는데 기본기, 디테일, 그리고 팬 이 3가지입니다. 기본기가 가장 중요해요. 실수하지 않는 야구를 위해서는 기본기를 늘 생각해야죠. 수비도, 타격도, 작전도 항상 기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기본이 갖춰져야 다음 디테일한 플레이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두산 베어스’의 팬들이 굉장히 열정적인 건 선수 때부터 잘 알고 있었거든요. 팬분들이 야구장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감독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GQ 감독으로서의 첫 경기, 어떻게 상상해볼 수 있을까요.
SY 죄송하지만 먼저 말하지 않겠습니다.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