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아무리 자율적이고 존중의 대상일지라도, ‘개취’는 다듬고 노력할 때 문화에 힘을 보탤 수 있다.
글 / 박찬휘(자동차 디자이너, 작가)
“북유럽 스타일”, “유러피안 스타일”. 이는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특정한 지역 고유의 모습을 표상화시키는 말이다. 말 속에 등장하는 ‘북유럽’처럼 오늘날 어떤 지역은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자 대다수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가까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어떤 아름다움이 연결되는 ‘북유럽산’ 브랜드들은 그렇지 않은 브랜드보다 탁월한 심미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문화적 우월함을 말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취향’이다. 그리고 개인 각자의 취향으로 취합된 것들이 공동체에서 보편성을 얻을 때 ‘유행’이라는 집단 내의 일시적이고 평균적으로 측량된 모습이 등장한다. 시간이 흘러 지리적 여건과 역사적 풍화를 거친 개인의 취향들이 다시 ‘문화’가 되어 세대를 거치고 진화하며 살아남으면, 그 문화는 곧 ‘역사’가 된다. 이런 이유로 일상에 흩어진 ‘취향’, 그러니까 ‘개취(개인의 취향)’를 타인과 구분 짓는 사적인 스타일로만 이해하기에는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사실 문화적 동경의 대상인 유럽에서도 개인의 ‘취향’이 등장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에서 보이듯이 18세기까지 고전주의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들은 권력과 자본을 가진 귀족과 종교인에게 귀속되었다. 그들의 후원 아래 궁정 악사나 교회의 악사, 또는 화가가 되어야만 했다. 대표적으로 교향곡의 아버지이자 베토벤의 스승인 하이든은 베토벤과 모차르트와 달리 일평생을 귀족의 악사로만 지냈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표현보다는 후원자의 요구에 맞추어 창작물을 ‘제작’했고, 작곡가의 개인적 감정과 창의적 직관은 결과물에 온전히 반영되기 어려웠다.
또 종교와 귀족 사회, 어떤 공동체의 부속품처럼 존재했던 대중들조차 당연히 개인의 기호에 따른 감정은 표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중의 취향이 예술가의 표현에 반영될 리 없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방식은 자율성을 찾기 위한 시민 혁명이 일어나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작곡가 베토벤은 여행을 하면서 자율성을 얻은 시민들을 상대로 연주회를 시작했고, 또 자아를 얻은 시민의 등장과 함께 주관적 감정을 담아낸 예술가들이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이성의 노예로 살아가는 대신, 각자의 감정을 우선시하고 자아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의 야생성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나로부터 발생한 내면의 정서에 충실하는 것. 낭만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예술을 각자의 해석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대중은 ‘나’를 통해 예술에 몰입할 수 있는 다양한 시선을 탄생시켰다. 예술가는 이전과 달리 창조적 직관을 지닌 존재가 되었고, 자율성을 얻은 예술가들은 바로 ‘나’를 통해 예술품에 자신의 직관을 드러냈다. 그렇게 사람들은 점차 예술과의 조우를 통해 각자의 소망을 투영하기 시작했고, 바로 이때 ‘취향’이란 것이 서서히 등장한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취향은 개인의 바람을 표현하고 각자의 취향을 저격한 ‘아이돌’을 찾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유로운 낭만주의 시대에는 대중이 자신의 취향을 저격하는 예술가를 만날 때면 그 예술가는 더 대단한 존재, 곧 신격화가 되던 때 아니던가. 예술에 대해 논하며,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지위를 얻은 청중은 곧 환호를 담아 예술가들을 지지하며 열광했다.
하지만 이때,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예술가와 그러지 못한 자들은 철저히 구분됐다. 지금의 콩쿠르, 공모전과 같이 고양된 대중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우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시스템도 이때 등장한다. 베토벤 혹은 윌리엄 터너 같은 천재들이 고매한 예술적 취향을 지닌 대중을 거침없이 저격하며 신을 뛰어넘는 ‘천재’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이처럼 ‘개취’는 18세기를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등장한 ‘자율성’의 산물이자 시대의 ‘정체성’과 ‘우월한 문화적 표상’으로 이어지는 소산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개취는 절대적으로 개인에게만 국한되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천재들의 산물을 체험함으로써 개취는 실험되고 연마되는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자율적이고 존중의 대상일지라도, ‘개취’는 다듬고 노력하여 나아갈 때 비로소 공동체 문화에 힘을 보탤 수 있다. 가령 세계적인 연주자들도 여전히 권위 있는 콩쿠르에 참여해 기량을 뽐내고,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 물론 본인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함도 있지만, 이미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적 정체를 극복하기 위해 전시와 연주회를 통해 실험하고 도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예술은 이렇듯 예술을 하는 예술가와 그 예술을 향유하고 소비하는 대중이 함께 노력할 때 문화를 위한, 역사를 위한 소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낭만주의가 개개인을 일깨운 지 한참이 지난 오늘날, 취향이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힘들어 보인다. 취향이란 것이 단편적인 유행과 등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SNS을 통해 드러나는 무수한 이미지와 검열되지 않은 채 눈에 보여지는 것, 또 그런 이미지 속에서 보여지는 요즘의 공통된 모습들, 타인이 걸친 옷가지와 그들이 살고 있는 편집된 화려함 등. 결국 자아를 버리고 그들을 흉내내는 것이 마치 자신의 취향과 같을 뿐이라고 반기며 달려드는 것이 요즘의 ‘개취’ 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행태는 결국 스스로의 취향을 찾아가고 문화의 밑바탕이 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다.
이처럼 취향은 보이는 ‘모습’을 추종하는 것과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즉, 내면의 거울에 자아 대신 타인을 비춰 추종하는 것은 유행의 일시적 ‘휘발성‘일 뿐이며, 더 나은 문화 공동체를 위한 개취와는 확실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일시적인 유행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북유럽‘처럼 우월한 문화적 공동체로 나아 가기는 커녕, 정체성 없이 휩쓸리며 흉내만 내다가 사라질 뿐이다.
홀로 미술관을 찾고 연주회를 찾는 일, 문학 속에서 작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들처럼 취향은 행동할 때 다듬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날 일부러 시간을 내 예술을 찾아 작품을 마주하는 일은 더 중요해졌다. 개인이 시민혁명을 통해 각자의 주관적 취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예술가도 그제야 공동체의 정서에 나타난 보편을 열거하는 대신 예술가 각자의 열정을 표출하지 않았던가. 베토벤의 열린 콘서트를 통해 감히 베토벤에게 요구할 수 있었던 낭만주의 대중의 환호처럼, 주변의 좋은 공연과 전시를 체험하는 것은 우리의 취향을 더 당당하고 빛나게 할 수 있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또한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많은 나라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그들의 음악을 듣고 훈련했던 일화처럼, 예술가들은 대중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날이 변화무쌍한 시기를 관통하는 포스트 모던도 말하지 않던가? 변기를 가져다 놓은 뒤샹의 용기처럼, 바나나를 벽에 붙여 놓은 카텔란의 호소처럼, 예술과 삶을 분리한 이분법적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고 누차 말한다.
우리의 일상이 영감이자 예술이다. 나도 예술가고 당신도 예술가란 말이다. 그러니까 개취가 얼마나 중대한 역사를 만들 수 있는가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렸다. 단편적인 유행 바라기 대신 문화 예술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태도야말로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고달픈 종교의 먹구름과 계급 사회의 처절함을 타파하려 혁명의 유혈을 보였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수월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당장 공연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보낼 수 있는 당당한 시대를 살고있다. 이렇듯 그 누구도 우리를 억압하거나 검열하지 않고 있지만, 반대로 고귀한 나의 취향은 점점 사라지고 맹목적인 추종만이 범람할 뿐이다. 한때 세상을 들썩인 ‘강남스타일‘ 말고도 ‘코리안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을 맞이하려면 당신의 취향이 문화가 되고, 나아가 우리의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찾고, 보고, 느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