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것만이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을 수 있다. ‘단순함’이란 말 그대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거둬내고 남은 것이다.
글 / 박찬휘 (자동차 디자이너, 작가)
“차를 바꾸고 싶은데, 어떤 차의 디자인이 좋아?” 지인들이 가끔 내게 하는 질문이다. “연비는 어떤 차가 좋아?”처럼 명확한 기술적 지표가 존재하는 질문이 아니라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디자인은 개인의 취향이며, 함부로 내 취향에 맞춰 대답했다가 괜한 원망을 살까 더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된다. “좋은 자동차 디자인이 뭐지?” 명쾌한 조언을 기대했을 텐데, 자동차 디자인 전문가인 나도 여태껏 답을 찾지 못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뭐 굳이 변명하자면, 좋은 디자인에 대해 몇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 일이기도 하다. 디자인을 하는 일, 예술을 하는 일처럼 창작의 일이란 막연한 이상향을 위해 나아가는 것 아니던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찾는 일에 미학자가 필요하고 또 철학자의 목소리에 의지하는 것도 바로 이 아름다움을 찾는 일의 어려움 때문이다.
디자인은 사실 ‘개취’(개인의 취향)다. 취향의 ‘변덕스러움’ 때문에 뜻을 정의할 방법도 딱히 없다. 또한 자동차는 변덕스러운 인간 취향의 산물이 아니던가? 자동차를 최초로 발명했을 때, 자동차의 역할은 운송이었지만 훗날엔 집 다음으로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본주의 욕망의 산물이 되었다. 편리함을 위한 자동차가 ‘변덕스러운 개취’를 드러내는 욕망의 사물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처음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디자인이라는 보편적인 이해는 대부분 심미적 정서를 우선시한다.
가령 자동차 덕후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차가 뭐냐?”라는 질문을 건넨다면, 아마도 2~3년 안에 등장한 신모델 중에서 선택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최소 일이십 년이 지난, 나이가 꽤 있는 모델을 고를 확률이 높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준은 대체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비로서 판단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동차와 같이 가격이 비싼 사물에 대한 판단에는 신중함이 더 많이 요구된다. 따라서 최소 10년 이상을 거치며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확인할 때, 그제야 우리는 자신 있게 그것을 ‘아름다운 것’이라며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사물 중 그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단순함’이다. 단순한 것만이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을 수 있다. ‘단순함’이란 말 그대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거둬내고 남은 것이다. 장식을 거둬내고, 습관처럼 채워진 요소들을 지워내는 게 단순해지는 방법이다. 옷장에서 10년 만에 꺼내 여전히 입을 수 있는 옷을 발견했다면 그건 단순하게 생겼기 때문일 것이며, 간결하여 명징한 누군가의 문장은 오래도록 살아 숨 쉬며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처럼 그때도 단순했고 지금도 단순한 것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우리 곁에 남는다. 나아가 그런 단순함은 어떤 세태에도 흔들림 없이 남아 우아함으로 피고, 우아함은 다시 시간의 결을 새겨내며 영원성을 얻는다.
같은 맥락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관심을 받는 클래식 모델이 여럿 있다. 지금껏 생명을 유지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점도 바로 단순함이다. 임스 체어가 그렇고 오래된 재규어 E타입이 그렇다. 절제되어 단순해진 덕분에 ‘아름답다’는 경이로운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절제되고 덜어낸 형태는 1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답다. 세월의 흔적까지 입었으니 그 아름다움은 영원할지도 모른다. 풍경화는 주변의 단순화된 배경이 주제를 더 돋보이게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여백’과 ‘절제’는 단순함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한편 인간의 감각은 자극적인 것에 시선을 금방 빼앗긴다. 그런데 자극적인 것에는 잠시 시선이 머물 뿐 금세 질려버린다. 자극적인 음식이 당장의 식욕을 채울지언정 한동안 생각나지 않는 것도 또 다른 감각의 영역이 가진 공통적인 모습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왜 어려울까? 오늘날 대부분의 신제품은 그 주기가 혁신적으로 빨라졌다. 제조업의 다품종 소량 생산과 기술 혁신의 가속화는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달라졌다. 따라서 시장의 속도에 맞춰 등장시켜야 할 신제품에는 일단 차별화된 생김새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때 인간의 행동 강박도 한몫을 차지한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비움’보다는 ‘채움’을 앞세운다. 세상을 푸르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동차의 대수를 줄이기보다는 더 많은 전기 차를 만들어 채울 알량한 생각부터 하는 것이 인간의 방식이지 않던가.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투입되는 생각과 요소들이 단순함과는 전혀 다른 과잉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덜어내는 단순함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 판단인지 확인하게 된다.
단순함은 심미적 측면을 뛰어넘는다. 과거 자동차의 역사는 레이싱의 역사를 바탕으로 했다. 자사의 모델을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자동차 브랜드들은 레이싱 참가를 통한 홍보를 선택했다. 레이싱에서 우승하는 일이 성능을 앞세워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이런 레이싱의 역사가 바로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각성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이다. 빠른 속도를 위해선 공기 저항을 방해하는 어떤 외부 장식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외부의 형태에는 최대한 군더더기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또 차의 기본적인 자세는 달려나갈 듯한 맹수처럼 낮은 자세를 취해야지만 공기 저항에 도움이 된다. 안정적인 코너링을 위해선 양쪽의 바퀴는 쫙 벌어진 어깨 아래 넓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하고, 차의 엉덩이는 하늘을 향해야지만 직선 도로를 질주할 때 안정적이다. 바로 우리의 드림 카인 페라리나 포르쉐의 낮고 넓은 생김새는 이렇게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 다듬은 모습이지만, 오늘 많은 이가 동경하는 아름다움의 정점이 된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름답기 위해서 단순해졌다기보다 더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 단순해졌더니, 비로소 아름다워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함이 많은 요소를 무조건 제거하는 일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단순함은 기술이 요구하는 범주와 인간의 심미를 충족하는 범주 사이에서 요동치는 도전의 모습이다. 그래서 투박하지 않은 단순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이 디자이너에겐 평생의 과제인 것이다. 호수 위 백조의 물밑에는 쉴 새 없이 물장구를 치며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두 발이 있다. 단순함은 이처럼 쉼 없는 노력이 따를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이 무엇이냐?”라는 어려운 물음 앞에서 여전히 물장구를 치고 있는 나도 백조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그래서 내 대답은 ‘단순한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좀 더 말하자면 “10년이 지나도 차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단순하게 생긴 차”가 좋은 디자인인 셈이다. 단순한 디자인을 선택하는 일이 지갑의 두께를 지킬 것이고, 그렇게 선택된 차는 결국 오랫동안 세상에 남아 있을 테니, 나아가 세상은 조금씩 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질리지 않는 단순함이 그 생명을 유지한 덕분에 환경문제의 해결책인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까지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이다. 몸살을 앓는 지구마저 살릴 수 있는 지혜가 디자인에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런 단순함의 미학 덕분에 아름다움은 다시 영원성으로 확장되어 살아 있다니, 생각만 해도 뿌듯하지 않은가. 비록 판매되는 자동차 대수가 줄어들어 내 밥줄이 끊길지언정, ‘단순함’을 향한 미학적인 추구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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