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GQKOREA MEN OF THE YEAR – PARK HAE IL
제 식대로 박해일.
GQ 마침내, 다시 만났습니다.
HI 1년 만의 해후네요.
GQ 작년에 <헤어질 결심>과 <한산> 사이에서 만났을 땐, “매년 끊이지 않고 작품을 해왔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올해는 새 작품 소식이 없었어요.
HI 전사를 말씀드리자면, <헤어질 결심>, <한산>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면서 에너지가 많이 소진되었어요. <한산>은 워낙 대작인 데다 역할이 막중했고, <헤어질 결심>은 배우로서 영화를 알리는 작업의 정점을 찍은 것 같아요.(웃음) 사실은 임상수 감독의 <행복의 나라로>를 가장 먼저 찍었는데, 결국 올해 개봉하지 않게 되었어요. 팬데믹으로 개봉이 밀린 작품들을 배급사에서 좋은 시기에 내보내려고 대기를 타는 상황이고, 배우는 잠시 식은 호빵을 개봉에 맞춰 따뜻하게 데울 때를 기다리는 느낌이랄까? 관객 입장에서는 공백이 생긴 느낌이 들 수 있죠. 그런 김에 올해는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자, 그런 기분이었어요.
GQ 안 그래도 차분한 박해일의 차분한 시간이란 뭘까요?
HI 단순히 말하면 외부 활동의 횟수나 빈도가 줄어든다는 얘기고, 반대로 그 전에 바빠서 가족에게 소홀했던 부분을 채우는 계기도 되었어요. 자연인인 나로 돌아오면 편하지만, 내 안을 들여다보면 단점이 많이 보여요. 영화적 캐릭터로 보여지는 면보다 훨씬 나약하고 부질없는 인간이라고 느끼기도 하고요. ‘네가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작품들의 캐릭터를 해왔어?’ 자책하기도 하고, ‘그래, 너는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구나, 껄껄’ 자조하기도 해요. 그럼에도 ‘고생했고, 바쁘게 잘 마무리한 것 같다’고 다독여주기도 했어요.
GQ <헤어질 결심>을 “고양이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주인과 마주하는 듯한 연출법을 지닌 영화”라고 설명했었죠.
HI 맞아요. 말이 삐쳐 나와서 미안하지만, 우리 집에도 그 전부터 살던 길고양이가 있어요. 그 친구와 항상 거리가 멀었는데, 매일 밥을 주고 인사하다 보니까 경계심을 서서히 푸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조금씩 가까워져서 지금은 한 50센티미터까지 다가왔어요. 고양이···. 요즘 참 흥미로운 대상이에요.
GQ 저도 고양이와 함께 살거든요. <헤어질 결심>을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번 보면서, 영화는 거기에 있는데 제가 고양이가 되어 점점 영화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것이 아주 신기한 영화적 체험으로 느껴졌어요.
HI ‘맨 오브 더 이어’에 초대받은 것까지 모두 포함해 감사한 것은, <헤어질 결심> 덕분에 영화를 극장에서 한번 즐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운을 곱씹는 분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덕분에 저 또한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좋은 시기를 만났구나, 이럴 때도 있는 거구나, 느껴요. 매번 홈런을 칠 순 없으니까.
GQ 저는 OTT에서 박해일의 작품을 종종 다시 찾아봅니다. OTT 가입하셨나요?
HI 그럼요. 가족들도 워낙 좋아하고요. 들어가서 뭘 볼까, 하다가 2시간 동안 영화 예고편만 본 기억이 있어요. 시리즈는 시간을 감내해야 하잖아요. 성격상 몰아서 봐야 하는데, 그러니까 또 섣불리 선택을 못 하겠고. 그런데 예고편만 보는 나름의 재미도 있어요. 미리보기 보면서 요즘 어떤 작품이 제작되고, 어떤 장르와 이야기가 있는지 살펴보죠. 한번 고르고 나면 끝까지 봐요. 최근에본 것?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을 재밌게 봤어요. 다큐의 입장을 좋아해요. 조미료가 덜 들어간 느낌이라고 할까. 등장인물이 그 공간, 그 시점에 사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가공의 인위적인 편집 기술을 활용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적인 감정을 볼 수 있는 장르라 흥미롭더라고요.
GQ 본인이 나온 작품은 잘 보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어떤가요?
HI 능동적으로 찾아보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문득, 제가 연기한 어느 작품의 어느 신의 감정을 어떻게 썼던 건지 궁금해질 때가 있어요. 일상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거나, 외부적 상황을 보고 그 감정이 ‘이거 내가 옛날에 연기했던 감정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그 장면을 막 서치해서 찾아봐요. 주로 임순례 감독님, 박찬옥 감독님처럼 사실주의 작품이에요. 찾아보고 ‘달랐구나’ 느끼기도 하고, ‘이렇게 할 수도 있었겠네’ 생각해보기도 해요. 일상에서 그런 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둬요. 적금 드는 것처럼.
GQ 오래전 연극하던 시절에 한 선배가 연극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서 “인간이 되기 위해 연극을 하는 거야”라고 한 적이 있다고요. 기억나세요?
HI 기억나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이라 더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열려 있기도 하고, 굉장히 단호하기도 한 말이죠. 그 말은 지금도 제게 유효해요. 저만의 숙제, 태도,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때는 몰랐어요.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돼, 생각했었죠. 한 해 한 해 지나고, 한 작품 한 작품 하면서 “인간이 되기 위해 연기한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였다는 걸 느껴요.
GQ 인간이 되기 위해 연극을 한다는 말을 박해일의 언어로 표현한다면요?
HI 배우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희로애락이라는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는 일을 하기 전에 ‘인간이 먼저 돼라’라는 태도는, 사람을 다루는 부분에 대해 진중해야 한다는 말로 들려요. 현재는 그렇게 느껴지는데, 더 곱씹다 보면 또 달라질 수 있겠죠. 나이를 더 먹고 작품을 계속하다 보면 생각의 넓이나 깊이가 달라질 테고, 말의 해석을 다시 갱신하게 되겠죠.
GQ 배우는 자신의 내면으로 깊게 들어가는 직업임과 동시에, 나를 잃기도 쉬운 환경에 놓인다고 느껴져요. 그 환경 속에서 박해일은 나다움을 잘 유지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고요.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HI 쉬운 표현으로 이야기해볼게요. 오늘 우리가 구찌와 협업을 하면서 만나게 된 거잖아요. 처음엔 어떻게 섞여야 할지 의문이었어요. 스타일리스트에게 물어봤죠. “나 어떻게 해야 돼?” 그러니까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그러더라고요. “하던 대로 한다”는 것은 “네가 해왔던, 너라는 사람이 하는 것을 믿어”라는 얘기잖아요. 사실 제안한 쪽에서도 내가 하던 대로 하길 바랐을 테고요. 구찌라는 브랜드를 역사가 있는 유럽의 한 캐릭터로 보았어요. 한 선을 가진 저라는 배우가 구찌라는 넓고 큰 캐릭터를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일까? 상상을 해봤죠. 어떤 옷을 입혀주면 그 옷에 감정을 담기도 하고요.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 매번 그 캐릭터와 어떻게 만날 것인지란 고민을 포함해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루하거나 익숙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보이길 바라지 않으니까. 그 고민을 하다 보면 순간의 상황 속에서 해결책이나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나답게 활용해야 할까, 고민할수록 이 질문이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중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GQ “하던 대로”라는 말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네요.
HI 자기를 잃지 말라는 얘기 같아요, 정확하게. 잃지 말고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면서 활용해봐. 낯설면 낯선 대로 활용해보고 믿어봐, 그런.
GQ 해준의 품위가 자부심에서 온다면, 해일의 품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 같아요?
HI 저에게 자부심이 크게 부각되어 활용되는 에너지는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으니까 용기를 내겠죠. 일단 불안해하지 않고, 마음을 편하고 단단하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혼자 해낼 수 없는 결과물을 만드는 작업에서 나부터 불안함이나 부담이 되는 요소를 최대한 줄여 나가자고 마음먹어요.
GQ 늘 불안에 시달리는 저에겐 영원한 숙제입니다. 불안은 어떻게 다스리죠?
HI 불안이 좋은 에너지로 변하는 경우도 있어요. “불안이 나의 힘”이라고 이야기하는 창작자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방법과 노하우가 있어야 하고, 마음 상태도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아직은 안 되지만, 잘 다스리고 싶어요. 매번 되는 것도 아니고, 늘 달라지는 것 같아요. 운도 따라야 하고요.
GQ 박해일은 운이 잘 따르는 편이죠?
HI 어느 글귀에 “나는 운이 잘 따라주는 사람일 게 분명해”라고 믿으면 조금 더 운이 따라준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사소한 운을 감지하게 되는 삶이 불안을 덜 느끼게 되는 방식이라고요.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요즘 유튜브에서 삶의 지혜, 노자의 영상들 틀어놓고 잘 때가 있어요. 좋더라고요.
GQ 새로운 깨달음도 있었나요?
HI 제 식대로 이야기 해보자면, 예전에는 불편한 감정이 들면 ‘이 불편한 감정의 근원은 뭘까’ 진지하고 예민하게 찾아 헤맸다면, 그게 어느 순간 되게 불필요한 에너지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찾아낸들 저한테 별로 유익하지도 않은 것 같고요. 그래서 비록 다시 겪게 되는 상황의 감정이라도 그런 감정은 그런 대로 흘려보내자, 하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리고 나 자신에만 집중하지 말고 좀 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작품을 대할 때나 현장에 있을 때 나의 캐릭터를 해내기 위해서는 내 자신에게 집중해 예민한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나를 도와주는 각 파트의 사람들에게 귀와 눈을 열어 도움도 받고, 그들에게도 영향을 받아서 내 것으로 더해보자 하고요. 차이가 느껴지나요?
GQ 그럼요. 굉장한 변화로 들리는데요.
HI 안 되면 다시 돌아오겠죠. 으흐흐.
GQ “하던 대로”요.
HI 어차피 나란 사람은 안 변할 테니까요. 성격 고쳐 쓰지 말란 말도 있고.(웃음)
GQ 어느 선배가 한 “철들지 마라”라는 말에 동의한다고 말한 적이 있죠.
HI 맞아요. 배우로서 ‘아이다움’을 잃지 말라는 의미였었죠.
GQ 그 말에 동의하는 마음은 여전해요?
HI 오늘 촬영 결과물 보면 아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