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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주인공이 마신 위스키 5

2024.01.30송민우

얼마나 실감나게 표현했는지 군침이 꼴깍 삼켜진다. 입술을 슬며시 핥으며 읽는 다섯 권의 소설과 그 소설 속 위스키를 소개한다.

고전 속 위스키

구조가 늦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마침내 홈스가 감사의 기도를 중얼거렸다. 헨리 경도 벌써 눈썹을 파르르 떨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레스트레이드가 남작의 입에 브랜디 병을 밀어 넣자, 헨리 경은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 보았다. – 아서 코난 도일, <바스커빌가의 개>

셜록홈즈 시리즈 뿐 아니다. 다수의 고전 소설에는 아픈 사람에게 소량의 브랜디를 입에 흘려넣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브랜디는 포도를 발효하여 증류한 술에 붙이는 이름이었지만 현재는 과실을 주원료로 하는 모든 증류주에 브랜디라는 이름을 붙인다. 맛은 코냑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알코올향이 지나고 나면 부드러운 목넘김과 향긋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오크통에서 숙성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치가 올라가지만 병입 후에는 가치가 올라가지 않으니 어서 마셔버리도록 하자.

하루키와 시바스 리갈

우린 얼음도 넣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시바스 리갈을 마시고, 고기 안주가 바닥나자 오이와 샐러리를 길게 썰어 된장에 찍어 먹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서 음악과 술을 없앤다면 하루키의 절반을 잃을 것이다. 하루키의 초기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맥주를 마시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하루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위스키를 마신다. 하루키의 소설에 문득문득 등장하는 섬세한 음식 묘사는 위스키의 향을 풍성하게 부풀리는 듯하다. 
시바스 리갈은 깊고 부드러운 향을 가진 술이다. 카라멜 향이 섞인 단 맛 덕에 칵테일 베이스로도 많이 사용되며 보통 온더락으로 많이 마신다. 여기서 하나의 팁. 공기와 접촉할수록 부드러워지는 술이다. 소량을 마신 뒤 뚜껑을 닫은 채 몇 주 보관하게 되면 궁극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킬러의 위스키

그리고 남은 위스키를 싱크대에 붓기 시작했다. 자신과 격이 맞지 않음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한잔도 마시지 않은 술병의 남은 술을 싱크대에서 흘려보내고 있었다. – 임성순, <컨설턴트>

주인공은 킬러다. 킬러하면 위스키가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 그는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구조적’으로 죽인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킬러 일을 수락하면서 위스키를 처음 마시는데 아직 학생인 자신의 격보다 높게 느껴지는 위스키를 보며 감탄한다. 위스키는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대부호인 회장님을 마주할 때다. 회장은 오직 독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마시기엔 너무 싼, 위조방지캡이 달린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회장님이 마시기엔 너무 싼 거”라고 말한다. 위스키에도 격이 있을까? 어쩌면 성향 자체는 있을 수도 있겠다. 셰리, 피트, 싱글몰트, 블랜디드… 위스키에 격이 있을진 몰라도 진정한 매니아라면 자신의 성향을 찾는 보람이 더 크게 와닿을 것 같다.

아내의 라가불린

아내는 특별한 날에만 라가불린 16년을 마셨다. 언젠가 아내는 행복한 사람에게 특별한 날이란 기쁜 날이 아니라 슬픈 날이라는 말을 했다. 행복하다는 말은 농담이겠지만 어쨌든 라가불린은 아내가 슬플 때 마시는 술이었을 것이다. 그 술이 품고 있는 바다냄새와 연기의 향이 자기가 자란 고향의 저녁 풍경을 떠올리게 해준다고도 말했다. – 은희경, <중국식 룰렛>

소설 속에서 화자는 아내가 떠난 뒤 아내가 모아둔 위스키 병의 수를 세어보다가 문득 그들이 함께 산 햇수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라가불린은 아일라 섬에서 생산되는 싱글몰트 위스키 중 하나다. 아일라 섬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를 종종 피트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맥아를 건조할 때 석탄대신 피트를 태워 특유의 향이 입혀지기 때문이다. 라가불린 16을 처음 맛보면 우선 훈연향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느껴진다. 식도까지 느껴지는 강한 알콜향이 지나고 나면 그 속에서 약간의 과실향이 느껴진다. 아내가 가장 좋아했다는 라가불린 16은 어쩌면 그녀가 살던 삶을 닮아있던 게 아닐까?

바닷가의 글렌모렌지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웃었고, 고양이들은 여전히 난리였으며 K는 벌떡 일어나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글렌모렌지 위스키였다. 피곤한 와중에도 우리는 무드등을 켜고 술상을 차렸다. 동생이 한잔을 쭉 들이켜더니, “글렌모렌지라도 없었으면 오늘 울면서 잤겠다” 했고, 그렇게 고양이 둘과 인간 셋은 동이 트는 광경을 보고 잠들었다. – 송지현, <동해생활>

최근 수많은 에세이에서도 술을 찬양하고 있다. 에세이 속 동해생활은 서울 살이에 지쳐 동해로 떠났지만 결국 동해에서도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 인물들의 유일한 낙이 술상을 차리는 것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글렌모렌지는 싱글몰트 스카치 위스키다. 피트를 사용하지 않으며 주로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한다. 에세이 속 글렌모렌지가 몇 년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대체로 부드러운 맛과 향이 특징이니, 아마 그들의 지친 하루를 달래주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