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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세상 속 멈춤이 필요한 당신을 위한 책 5

2024.02.20전희란

멈춤의 기술을 설하는 대신, 잠시 멈추어 갈 수 있는 기회나 순간을 맞이하게 해주는 책 다섯 권으로부터 나선 길.

글 / 박정훈(작가, 번역가)

신림에서 신촌으로 향하는 2호선 전철. 갑자기 낮아진 기온이 외투를 더 두툼하게 불린 덕에 보다 비좁아져 보이는 좌석에 몸을 욱여넣는다. 옆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려 양팔의 폭을 최대한 좁히며 가방 속 책을 꺼낸다. 책갈피를 잡기 전 나와 마주하고 앉은 일곱 명의 승객을 훑어본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좌석의 어느 분, 책을 들고 있다. 책 제목이 익숙해 어쩐지 더 반가운 것이 꼭 옛 친구를 만난 듯하다. 전철은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잠시 지상으로 올라온 차량의 넓은 창문으로 빗살처럼 쏟아지는 오후 햇살의 온기가 잠시나마 이 계절을 잊게 만든다. 그리고 햇살에 기대어 신중하게 책장을 넘기는 그이의 모습은 종착역 없는 순환선의 트랙을 빠르게 내달리고 있는 전차와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화면이 전환되는 디지털 기기가 객차 여기저기에서 고립된 인공의 빛을 발하는 이곳의 시간을 잠시 더디 가게 만든다. 한결 느슨해진 시간을 타고서 나도 책 속으로 들어간다. 그 안의 길로 발을 들여놓는다.

세상 모두가 색색이 화려하게 피어난 꽃을 바라볼 때,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돌아본다. “캄캄한 하늘의 깊이에서 눈의 눈부신 몸부림은 태어난다. 덧없는 생애를 예감한 눈송이의 흰 몸짓은 내리자마자 부드럽게 죽는다. 스스로의 최후를 덮기 위하여 다시 내리는 슬픈 적설량 위에서 아편처럼 잠드는 미시령 밤의 눈.” 까만 밤을 타고 내려오는 하얀 눈의 콘트라스트를 배경으로 형태도 없는 고갯마루의 찬바람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낙하의 운명을 지고 태어나 지상에 닿자마자 죽음에 이르는 눈송이들, 그리고 그 위를 이불처럼 덮어주려 몸을 던지는 또 다른 눈송이들의 기나긴 행렬. 눈의 짧고 옅은 한 생애를 하염없이 바람에 날려보내지 않고, 무심코 밟고 지나치지도 않고 돌아서서 눈의 최후를 잠연히 지켜보는 시인의 마음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지. 덧없는 생애를 향한 무상에의 사랑. (허만하,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문학동네, 2023)

집을 나서며 곡식과 견과류 한 움큼씩을 챙겨 넣는다. 겨울철에는, 특히나 눈이 몇 날 며칠씩 쌓여 있는 기간에는 먹이 찾기가 쉽지 않다 하여 보시하는 마음으로 새들의 양식을 안동하고서 산으로 향한다. “사랑 앞에선 누구나 아이가 된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으며, 만물의 탄생과 더불어 매번 다시 태어난다. 아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열린 손안에 하느님을 붙잡아둘 수 있다. 비에 흠뻑 젖어 뼛속까지 얼어붙은 채 시끄럽게 울어대는 한 마리 참새를. 새처럼 지저귀는 하느님이 아이들의 빈손 안으로 와 모이를 쪼아 먹는다. 하느님은 아이들만 알며 어른들은 모르는 무엇이다. 어른에겐 참새들을 먹이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다.” 산길을 오르며 여기저기에 흩뿌린 먹거리에 날아들 산새들을 그려본다. 건방지구나. 내가 새들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 새들이 나에게 공덕을 쌓을 기회를 준 것일 텐데. 존재들 사이에 어디 일방적인 행위란 게 있을까. 우리는 모두 생태계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한데 엮인 중생들일 뿐인데. 나 자신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생명이라는 너른 우주를 내다보는 태초의 맑은 눈을 가진 이, 어린아이. (크리스티앙 보뱅, <지극히 낮으신>, 1984BOOKS, 2023)

장자莊子는 어찌하여 자신이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단언했을까? 계통분류학을 들먹일 것도 없이 인간은 물고기가 아니고, 오랑우탄과의 관계처럼 유전적 유사성도 없기에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 모른다 언감생심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나, 직관의 눈으로 계통과 종차의 벽을 꿰뚫고 생명의 약동 그 자체를 바라본 장자에게 유영하는 물고기의 유연한 움직임은 다분 하나의 놀이, 즐거움으로 보였을 것이다.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온전히 현재를 사는 것이다. 새들은 이미 매 순간을 즐기기에 애초에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새들은 지금 삶 속에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자기 자신 사이에 그 어떤 작은 틈새도 없다. 박새는 단순히 지금을 산다.” 존재와 행위 사이에 작은 틈도 없다면 존재는 곧 행위가 된다. “I LIVE MY LIFE” 라는 관용어처럼 나와 삶이 주어 동사의 관계로, 소유 종속의 관계로 거리를 둔 게 아니라 내가 곧 삶이 된다. 나와 삶이 한 몸이니 온갖 번뇌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나뭇가지의 박새처럼, 호수濠水의 물고기처럼 지금을 온전히 산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이다. (필리프 J. 뒤부아 · 엘리즈 루소,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다른, 2019)

“어느 순간 정적의 시간이 찾아올 때 사물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들을 따라가는 짧은 산책 속에서, 무심히 지나쳐왔던 풀과 벌레와 나무들을 만나고, 우리가 만들었지만 알지 못하는 사물의 뒷모습을 만난다. 정처 없는 이 여정은 끝이 없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이 길들은 어딘가에서 서로 만날 것이다.” 하나의 물건을 선택해 눈으로, 그다음엔 손으로 그 윤곽선을 따라간다. 익히 알고 있던 그 형태 및 질감과 동일한가.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사물의 실용성을 잠시 접어두고 사물성에 집중한 까닭에 있을 것이다. 익숙함의 뒷면에 있는 생소함의 발견. 이러한 발견은 단지 감각의 새로운 차원으로 가기 위함이 아니라 나 아닌 것 그 자체를 존중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결국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가짐과 만난다. 재화의 원천, 휴식의 제공이라는 쓸모를 잊고서 자연과 그 속의 뭇 생명들을 돌아보기, 사람을 수단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대하기. 모든 것을 수단화하고 자본화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절실한 윤리적 명령이다. (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현대문학, 2021)

단일 경작 농업이 경작의 용이성과 생산량의 증대를 꾀하는 효율적인 재배 방법인 듯 보일지도 모르나, 식물 다양성의 손실과 식물 병원균의 증가를 불러오는 폐해임이 그 실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각 통로의 일원화는 언어 및 감각과 같은 두뇌의 다양한 기능을 저하시킨다. 우리 인간의 뇌는 손으로 여러 도구를 만들고, 이를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써 발달했다고 한다. 반대로 말해 손의 기능이 디지털 기기의 화면을 터치하는 것으로 수렴되면 손과 동기화된 뇌의 활동 역시 단일화된다. 일원화, 단일화된 손과 뇌는 다원화, 다양성에 고됨을 느껴 그 자리를 회피한다. 복잡한 연산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타인의 마음과 이어진 섬세한 끈을 끊어버리고 이진법의 고립된 인간이 만들어지는 게 가장 큰 재앙이다. 촉감은 공감의 시작이고, 공감은 지성의 완성이다. “우리의 일상은 육체에서 분리된 눈과 뇌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점점 시각화되는 세상 앞에서 뼛속까지 불안해한다. 만지는 행위는 한 인간이 세계를 탐구하는 첫 번째 수단이다. 주변 사물에 몸이 닿고 부딪치면서 제 육신의 범위와 경계를 감지하고 이 정보를 이용해 의미를 확장하는 방식을 습득한다. 또한 접촉에서 비롯한 미세 신호를 해석하여 걷기를 배우고 물체를 잡고 최초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한다.” (수시마 수브라마니안, <한없이 가까운 세계와의 포옹>,동아시아, 2022)

기술과 자본이 깔아놓은 신작로에서 빠져나와 잠시 책 속의 오솔길을 걷는 시간은 세사世事의 트랙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그 속도를 얼마나 늦추고 있는지. 그 이탈과 지연은 시간의 뒤안길을 돌아볼 수 있게, 다시 볼 수 있게 한다. 뭇 존재가 서로를 만져볼 수 있게, 온전히 볼 수 있게 한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눈에 맺힌 존재는 행위와 분리되지 아닐 터이니, 오솔길과 그 위를 걷는 나는, 책과 그를 읽고 있는 나는 틈새 없는 온전한 한몸이다. 나 자신, 우리 자신은 책이다. 책 속의 오솔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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