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야마 아키라는 일본 만화의 신화인 동시에 한국 만화의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글 / 김도훈(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어떤 면에서 나는 친일파에 가까울 것이다. 정치적 친일파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문화적 친일파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물론 이것도 어감이 딱히 좋지는 않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같은 엑스세대라면 내 고백에 숨죽여 동의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 엑스세대는 유년 시절부터 이미 일본 문화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살아온 첫 세대다. 1980년대 초 텔레비전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넘쳤다. 나가이 고 원작의 <마징가 Z>와<그랜다이저>,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은하철도 999>와<천년여왕>, 미야자키 하야오의<미래소년 코난>등 내 세대의 무의식을 여전히 잠식하고 있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이 일본산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유년기를 몽땅 쏟아부은 애니메이션이 모조리 일본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일종의 허무에 사로 잡혔을지도 모른다. 운동회에서 우리 팀을 응원하기 위해 가사를 바꿔 부르던 그 모든 주제곡이 한국의 것이 아니었다니.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이 한반도를 지키는 영웅이 아니라 일본 열도를 지키는 영웅이었다니. 유년기란 참 희한한 시기다. 그 시절에 부르던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는 도무지 두뇌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본능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고야 만다. 이를테면나는 글이 좀 막히거나 답답한 상황이 오면 저절로 노래를 부른다. “도마뱀, 도마뱀,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낸다”. 맞다. 홍상수 영화 <해변의 연인>에서 고현정이 홀로 숲속을 거닐며 부르는 바로 그 노래다. 이건 1980년대 중반 KBS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딱 한 장면에 등장한 노래다. 당연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나는이 애니메이션이 어디까지나 한국의 것이라고 확신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쨌거나이 굉장한 후크송은 전국 수백만 소년소녀의 입에 달라붙어 결국 홍상수와 내가 공유하는 어떤 공통적인 문화적 현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만 출판 만화 혹은 대본소 만화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출판 만화는 어디까지나 한국 고유의 시장에 머물렀다. 내가 처음 구입한 만화 잡지는 1981년에 등장한 <보물섬>이었다.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 김동화의 <요정 핑크>,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등 한국 만화의 역사를 만든 만화들이 모조리 <보물섬>을 통해 연재됐다. 1980년대는 확실히 한국 만화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대본소 만화의 영웅들인 이현세, 허영만, 고행석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성인들의 영웅이었다. 잡지에 연재한 뒤 단행본으로 나온다는 개념은 1980년대 중반쯤 시작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어느 날, 누군가 초등학생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만화를 가져왔다. ‘콩콩 코믹스’라는 이름의 출판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물섬>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나는 초기 한국 만화의 걸작들과 그 창조자들을 욕보이려고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아니다.) 많은 부분에서 확실히 나았다. 그리고 달랐다. 일단 그림체가 지나칠 정도로 완벽했다. 퍼스널 컴퓨터라는 것이 막 학교 도서관에 설치되던 시절이었다. 황신혜를“컴퓨터 미인”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가져온 작은 판본의 만화가 컴퓨터로 그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선이 완벽한 만화는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사람 손으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그렇다. <드래곤볼> 해적판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이 외에도 많은 해적판 만화가 아이들 사이를 떠돌며 선생들을 근심하게 했다.<시티 헌터>,<공작왕>,<오렌지 로드>,<쿵후보이 친미>,<북두신권>등 당대의 일본 만화들이 해적판으로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일본 해적판 만화의 한국 초등학교 침투에 단단히 한몫 한 문화적 친일파였다. 당시 해적판 만화는 학교 앞 문방구를 통해서 유통됐다. 권당 5백원이었다. 떡볶이가 1백원이던 시절이니 꽤 값이 나가는 취미였다. 가방 속에 몰래 넣어서 학교에 가지고 가는 건 꽤나 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자랑이냐고? 해적판 만화를 전국 문방구를 통해 유통하면서도 딱히 법에 걸리던 시절이 아니었다는 걸 한번 생각해보시라. 하여간 엉망인 시절이었다. 엉망인 시절이라 <드래곤볼>을 볼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드래곤볼>은 가짜 한국 작가 이름으로 출간됐지만 모두가 ‘일본 만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아마도 첫 번째 만화였다. 1980년대는 괴상한 시대였다. 일본 문화와 상품의 판매는 금지됐다. 그럼에도 길거리 가게에서는 일본 노래를 틀어 젖혔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들었던 콘도 마사히코의 히트곡 ‘긴기라기니’를 아직도 정확하게 따라 부를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시침 뚝 떼고 한국 애니메이션처럼 방영됐다. 캐릭터 이름은 모두 한국식으로 바뀐 채 말이다. 알고 보니 1980년대의 많은 히트곡이 일본 히트곡의 번안곡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런 세대에게 <드래곤볼>이 일본 만화라는 걸 깨닫는 순간은 일종의 정서적 혁명에 가까웠다.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의 ⅕ 수준이던 시절이었다. 나는 일본이 미운 국가라고 배웠는데 모든 앞서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일본에서 오고 있었다. 한국의 국민소득과 소프트 파워가 일본을 뛰어넘은 시대의 세대들에게는 이상하게 뒤틀린 세대의 고백처럼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로는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으로 오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이다.
<드래곤볼>은 한국 만화를 바꾸었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완벽한 그림체, 일본 출판 만화 특유의 계속해서 스토리를 확장하고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구조는그 이후 한국 만화의 변화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물섬>을 비롯한 한국 만화 잡지들은 해적판 일본 만화의 침공에 무너졌다. 거기에는 어쩔 도리 없는 수준의 차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서울문화사는 1989년에 만화 잡지 <아이큐 점프>를 창간하며 <드래곤볼>의 판권을 정식으로 사서 연재하기 시작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정식으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선포하기 10년 전의 일이었다. 처음으로 일본 작가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만화가 정식으로 한국 시장에 발매된 것이다. 한국 만화가들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는 <드래곤볼>의 위력을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큐 점프>와 <소년챔프>의 한국 만화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림체가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잡지 편집부와 독자의 반응을 시시각각 참고하며 오래 지속될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드래곤볼>이후<슬램 덩크>를 비롯한 많은 일본 만화가 한국에 소개됐다. <드래곤볼>처럼 한 세대의 문화적 장르를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치켜올린 만화는 없었다. 한국 만화의 역사를 다루는 백과사전이 나온다면 그중 한 챕터는 토리야마 아키라와<드래곤볼>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젠지세대 독자들은 일본 문화에 대한 열등감이라는것이 전혀 없는 채 자랐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부럽다. 내 과거가 부끄럽지는 않다. 한국 문화가 사실은 일본 문화를 카피하며 성장했다는 것이 더는 나의 깊은 열등감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세계는 어차피 서로를 카피하며 성장한다. 그러니까 토리야마 아키라가 나와 내 세대에 준 가르침은 이거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일본의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것이다. 보다 떳떳하게 더 나은것을 더 낫다고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극복하기 시작했다.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게 됐다. 혹은 다른 것을 만들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여기서 나는 정말이지 기쁜 마음으로 토리야마 아키라의 이른 죽음을 추모할 수 있다. 당신은 일본 만화의 신화였던 동시에 한국 만화의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내 세대의 세계관을 확장시켜준 진정한 아이콘이었다.당신의 죽음에 무천亀仙한 ‘에네르기’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