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W OLD STUFF.
박지우 | ODDFLAT 대표
나의 오래된 사물 힐 하우스 체어 Hill House Chair 1980’s by 찰스 레니 매킨토시 Charles Rennie Mackintosh.
첫 만남 2020년 독일에서 구입했다. 가격은 약 1백50만원. 사실 기능적으로 보면 부족함 많은 의자다. 앉는 면적은 작아도 너무 작고, 등받이는 아주 높은 데 반해 앉는 높이는 또 매우 낮다. 하지만 이 모든 기능적 부족함을 채워주는 건 역시 빼어난 디자인이다. 실제로도 이 의자는 앉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가 본인 침실에 장식용으로 두려고 만들었으니까.
관리 비법 제아무리 콧대 높고 귀한 모델이어도 누군가의 쓰임을 기다리는 가구일 뿐이다. 같은 이유에서 고이 모셔두거나 매일 살피며 관리하지 않는다. 물론 아무렇게나 던져둔다는 얘긴 아니다. 아기가 앉아 있다가 실수로 넘어뜨려도 그러려니 하는 정도. 편하게 사용하며 자연스럽게 세월의 변화가 묻어난다면 더 멋지지 않겠는가. 이 의자가 내게 지니는 의미 나는 주로 20세기 중반에 디자인된 가구를 소개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은 대체로 그 이전에 디자인된 모델들이다. 이를테면 더 원시적이거나 고전적인 것들. 이 의자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모던 가구 디자인이라 불리는 이전의 모던, 당시 ‘현대적’으로 불리던 시대의 극단에 있던 디자인이 매혹적이다.
내가 붙인 애칭 ‘작은 왕자의 의자’. 실제로 보면 이토록 아담하다.
내가 생각하는 이 의자의 나이 이 의자가 처음 디자인된 연도는 190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매력적인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 무려 1백20여 년 전 매킨토시의 의도와 감성을 그대로 품고 있는 기백이 볼수록 근사하다. 내가 생각하는 물리적인 나이는 40년 정도. 하지만 1백20년이 넘도록 품위는 여전하니, 40년이라는 나이는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걸로.
유겸 | 뮤지션, 갓세븐, Jus2 멤버
나의 오래된 사물 위닝 Winning의 복싱 글러브.
첫 만남 AOMG에 들어오면서 찬성이 형의 체육관에 다니게 됐다. 그때 추천받은 글러브다. 무엇보다 오렌지색이 마음에 들었다. 가격은 약 50만원대. 에피소드라면 며칠을 웹 서핑한 끝에 마음에 드는 글러브를 발견은 했는데, 가격을 두고 고민했던 순간.
관리 비법 무조건 사용 후 건조.
이 글러브가 내게 지니는 의미 이 글러브를 곁에 두기 전까지 내 취미는 모두 음악과 관련되어 있었다. 낯설지만 설레는 새 취미가 생긴 후로 체육관에 가는 날을 아이처럼 손꼽아 기다린다. 꼭 처음 스트리트 댄스를 배우던 중학교 1학년 때처럼.
어울릴 것 같은 인물 저본타 데이비스 Gervonta Davis. 30전 30승 무패. 현 WBA 경량급 챔피언이다. 화려한 옷을 즐겨 입는 데이비스니까, 이 오렌지색 글러브는 당연히 잘 어울릴 거다.
적재 | 뮤지션
나의 오래된 사물 루이 가르노 Louis Garneau의 RSR4 하이브리드 자전거.
첫 만남 2010~2011년경 지금은 없어진 서울 대치동 어느 자전거 매장에서 60만~70만원 정도 주고 구매했다. 자전거가 필요 없었는데 모양과 색상이 예뻐서 충동적으로.
손때 묻은 기억 이 자전거를 타고 한강 끝까지 가보자 마음먹고 서울 양재동에서부터 양재천과 한강을 따라 방화대교까지 다녀온 적이 있는데, 방화대교에서 멈춘 이유는 그 다리부터 가로등이 다 꺼져 있어 무서워서였다. 다음엔 꼭 더 멀리 가봐야지 했는데 그 뒤로 멀리는 못 가봤다.
관리 비법 비법은 따로 없다. 관리를 거의 안 해서 색이 다 바랬다. 타고 싶을 때 바퀴에 바람을 넣는 정도. 새 자전거가 생긴 뒤로는 더욱 안 타고 있는데 왠지 버리기는 싫고, 가볍게 동네에서 자전거 타고 싶을 땐 이 자전거로 다니고 싶어서 그냥 방치하니까 오래 갖고 있게 된다. 나는 물건을 오래 지니고 있지 못하고 새물건 사는 걸 좋아하는데, 오히려 크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야 이 자전거처럼 오래 간직할 수 있나 싶다. 나의 오래된 기타들도 잊힐 때쯤 다시 생각나서 연주하면 꼭 새 기타를 발견한 것처럼 기분 좋을 때가 있다.
김민정 | 조명 컬렉터, 빅슬립 대표
나의 오래된 사물 2003부터 약 1년여간 롤러코스터가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의 녹음테이프와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신해철의 고스 트스테이션> 녹음테이프들.
손때 묻은 자국 당시 윤상이 소개해주는 제3세계 음악들을 들으며 나만의 음악 세계를 막 확장하려던 참이었다. 당시 너무나도 팬이었던 뮤지션 롤러코스터가 라디오를 진행한다는 소식에 가슴 떨며 기다리곤 했으나, 그 시간이 가혹한 새벽 3시였던 까닭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꾸벅꾸벅 졸다 라디오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소리와 동시에 녹음 버튼을 누르고는 쓰러져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플레이리스트를 찾아보는 게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에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곡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했다. 타이밍이 어긋나 곡 정보를 듣지 못한 날이면 그 음악이 나온 날짜와 시간을 메모했다가 다음 날 라디오 사이트에 접속해서 찾아보고 노트에 적어둔 기억이 난다. 간혹 타이밍 좋게 곡 제목을 듣게 되더라도 브라질의 뮤지션이나 프랑스 음악처럼 낯선 언어가 난무하기도 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구매하고 심취해 듣던 시절의 이것은 ‘내 리스너 인생에 바이블이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음악을 듣고 싶었던 팬심 가득한 어린 시절의 바지런함이었던 것 같다.
관리 비법 소중히 여기되 가끔은 그 존재를 잊는 것이 오히려 최고의 보관법이 될 때가 있다.
이 테이프들이 내게 지니는 의미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음악 하나로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듯한 경험을 한 지난날의 나를 기억하는 전리품 혹은 증거랄까. 새로 이사하거나 어색함이 느껴지는 공간에 있을 때 이 라디오 녹음테이프를 틀어놓으면 이내 편안해지고는 한다. 차가운 분위기를 감싸는, 오래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목소리들, 음악들, 당시 나를 웃게 했던 농담들.
이런 사람에게는 기꺼이 물려줄 수 있다 음악이 듣는 대상이라기보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요소의 하나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요즘이 서글픈 사람에게.
내가 생각하는 이 테이프들의 나이 새벽잠 참아가며 녹음 버튼을 누르던 그 시절의 스무 살 그대로.
안성재 | 셰프
나의 오래된 사물 위닝 복싱 글러브.
내가 붙인 애칭 천둥(왼쪽), 번개(오른쪽) 첫 만남 약 3년 전쯤, 같은 복싱장에 다니는 어떤 이로부터 선물 받았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이 글러브가 내게 지니는 의미 한 직업의 전문가로서 사용하는 어떤 도구는 영혼이 담기는 기물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라면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집중할 수 있다고 늘 주변에도 그렇게 말한다. 내 칼 역시 아무한테도 빌려주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내 칼 건드리면 내 칼에 찔릴 준비해라”라고 할 정도.(웃음) 복싱을 시작한 뒤로 내겐 글러브도 마찬가지다. “너는 내 손이야, 내 주먹이야” 이렇게 말한다. 내 신체의 일부로 여겨진다. 복싱이라는 예술적인 스포츠, 글러브가 내 삶에 관여하는 부분을 따진다면, 이 사물은 분명 글러브 그 이상이다.
관리 비법 땀이 차는 안쪽은 물론 바깥쪽도 잘 닦아준다. 가끔 껴안고도 잔다. 아, 농담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기꺼이 물려줄 수 있다 복싱이라는 이 거짓 하나 없는, 나 자신에 1백 퍼센트 몰입하게 해주는, 몸과 마음과 정신과 용기가 다 담긴 이 예술적인 스포츠의 가치를 이해하고 같이 즐길 수 있는, 순수하고 진실된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김효준 | BLUE SUNSET 대표
나의 오래된 사물 네이티브 아메리칸 주얼리 Native American Jewellery by 나바호 부족 Navajo의 댄 올리버 Dan Oliver.
첫 만남 2016년 9월, 애리조나에서 2백 달러에 구입했다. 단순히 예산도,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 선에서 구입을 생각했는데, 직원이 주얼리를 제작한 아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년에 돌아가셨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던 좋은 분이셨다. 너는 정말 멋진 주얼리를 갖게 된 거다.” 이유라면 이러해서. 이 작은 주얼리가 특별해지기 시작했다.
관리 비법 구매 당시의 영수증과 아티스트의 바이오그라피 서류와 함께 소중히 보관 중이다. 가끔 꺼내 은 전용 천으로 정성껏 폴리싱을 해준다.
이 주얼리가 내게 지니는 의미 네이티브 아메리칸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접근을 시작하게 된 매개로서의 의미가 크다. 현재의 작업에도 꾸준히 영감을 전하고 있다. 물론 어떤 순간에도, 어떤 이에게도 Not For Sale.
박유림 | 배우
나의 오래된 사물 유치원생 때 아빠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공책, 2018년 남대문에서 20만원 정도 주고 구매한 인생 첫 필름 카메라 코니카 빅 미니.
손때 묻은 자국 코니카 빅 미니는 나의 첫 필름 카메라다. 여행 다니며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것들을 필름의 색감으로 담아보고 싶어서, 남대문 시장에 혼자 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심하고 골랐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뿌듯함에 피식피식 새어 나오던 웃음이 기억난다. 코니카는 생일 선물 겸 아빠에게 받아내다시피 한 카메라인데, 노트 역시 유치원생 때 아빠가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 원래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은 되팔지 않는다. 그 물건을 쓰는 날이 거의 없더라도 마음이 가는 것들은 두고두고 옆에 남겨놓는다. 유치원생 때 선물 받은 노트처럼. 어린 나는 노트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지 아끼고 아끼다 쓰지 않았는데, 지금까지도 쓰지 못했다. 여전히 아깝고 소중해서.
어울릴 것 같은 작품 <카모메 식당>. 이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의 색감도, 큰 사건 없이 흘러가는 시간도, 함께하는 마음도, 시나몬 롤도. 캐나다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자그마한 카페를 차리는 상상을 한다. <카모메 식당>의 사치에처럼 나만의 시나몬 롤과 맛잇는 빵, 커피, 그리고 평화로운 시간으로 채워진 공간을 꾸리고, 아빠가 선물해준 귀여운 노트에 레시피를 적어보고 싶다.
황수아 | 영화감독
나의 오래된 사물 본네빌 Bonneville 안경.
내가 붙인 애칭 내가 물건에 애칭을 붙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깨달았다.
첫 만남 1993년. 그 전에 알던 <드라큘라>와는 전혀 달랐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드라큘 라>를 보고 충격을 받은 시절. 게리 올드만이 40년 전 와이프 위노나 라이더를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날 때 쓴 안경과 굉장히 흡사한 안경을 맨해튼 소호의 한 안경점에서 발견하고 홀린 듯이 구입했다.
오래 쓴 까닭 부모님 댁에 오래된 물건을 넣어두는 서랍이 있는데, 1년에 한 번쯤 가서 서랍을 열어 안경을 써본다. 시기별로 즐겨 쓰던 안경들이 있는데, 안경을 쓰면 나의 변화가 느껴진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외형도, 눈빛도, 생각도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안경을 쓰는 순간 비로소 깨닫는 것은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있다’라는 사실. 이 안경이 내게 지니는 의미 16~17세, 사춘기의 ‘시절’을 담은 물건. 나의 예전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안경을 쓴, 테두리가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 관리 비법 쓰지 않을 때는 서랍에 넣어둔다.
어울릴 것 같은 인물 게리 올드만.
이규한 | 가구 디자이너, 미술가
나의 오래된 사물 2013년 무리카미 다카시 전시 팸플릿과 내가 초등학생 때 만든 한지 상자.
손때 묻은 자국 카니예 웨스트 앨범 커버 아트를 통해서 무리카미 다카시의 작업을 접했고, 그가 궁금해 찾아가본 이 팸플릿의 전시가 내 인생 기억 속 첫 전시회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좋아했고, 내가 만든 이 한지 상자나 파일에 전시 팸플릿, 영화 티켓, 옷과 신발 태그 등 만족스럽게 소비한 기억과 관련된 물건을 모아왔다.
어울릴 것 같은 인물 도널드 저드. 박스 형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주관적으로 매기는 현재의 가치 신기하게도 지금 한지를 활용해, 무라카미 다카시처럼 창작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인 결과 같아 가격으로 매길 수 없다.
이현준 | 오디오 평론가, <오디오·라이프·디자인> 번역가
나의 오래된 사물 고야드 트렁크, 포르쉐 911 GTS.
첫 만남 내 오랜 취미 중 하나는 주택 단지를 걸으며 잘 지은 주택을 감상하는 일이다. 어느 날 맘에 쏙 드는 이상적인 건축물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은색 포르쉐 911을 발견하곤 감동에 빠졌다. 며칠 후 봄여름가을겨울 김종진 형님의 소개로 만난 분이 놀랍게도 그 집의 주인, 전설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나를 아껴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며 여자친구보다 더 가까이 지냈다. 그는 항상 내게 “우리는 컬렉터가 아니야, 철저한 유저여야 해. 최고를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최고를 디자인할 수 없어”라고 강조하며 자신이 아끼던 소장품들을 내게 선물했다. 10여 년 전 빈티지 리모와를 사 모으는 일에 빠져 있던 내게 또 다른 심미의 세계를 보여주겠다며 선물한 것이 이 1950년대 고야드 트렁크다.
관리 비법 써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는 그의 말에 호기롭게 수화물로 부쳤다가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는 걸 경험하고는 이제 국내 여행에만 쓴다.
이 트렁크가 내게 지니는 의미 고야드 트렁크를 거실 테이블로도 써보라며 나무 받침대를 제작해주겠다던 그는 눈이 펑펑 쏟아지던 2021년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도 거실에 놓인 고야드를 보며 타협 없이 ‘미의 극치’를 추구했던 그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 사진 속 트렁크 안에 놓아둔 것은 포르쉐 911 GTS의 키다. 나를 오디오의 세계로 인도한 이는 아버지였다. 패션, 자동차, 위스키, 오디오 등 선망의 영역에서 최고만을 고집했던 아버지의 취향을 물려받은 덕분에 그걸로 글 쓰고 말하며 밥 먹고 살고 있다. 자동차를 거침없이 바꿈질하던 아버지가 1990년대 초 새로 구매한 차는 포르쉐 911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했던 동승 경험에 나 또한 커서 이 차를 반드시 소유하리라 결심했다. 20대가 되어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와는 불화하며 자연히 멀어졌다. 오디오 평론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내 첫 목표는 포르쉐 911을 타는 전업 평론가였다. 이는 성공의 상징이자 아버지로부터 완전한 경제 독립을 이루는 자기 증명이기도 했다. 운 좋게도 10여 년 전 포르쉐 911 GTS를 구매했다. 단 한 번의 고장 없이 매일 짜릿한 감동을 전해준 애마였다. 그러던 2022년 8월 8일 서울 강남역에 내린 폭우로 침수되어 내 포르쉐 911은 허망하게 떠났다. 너무 아끼던 차라 대신할 차량을 선택하지도 못하던 와중에 아버지께서 올해 초 세상을 떠나셨다. 유품을 정리하던 중 어릴 적 아버지 차 앞에서 찍은 수많은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포르쉐 911를 보유한 10년간 아버지와 사진 한 장 못 남긴 일이 먹먹하게 느껴진다. 조만간 새로운 포르쉐 911를 구매해 어머님과 못다 한 드라이브를 즐길 생각이다.
박길종 | 길종상가
나의 오래된 사물 HAIN BELL, 알람 시계.
내가 붙인 애칭 태엽 시계.
첫 만남 1980년대 전후부터 부모님 집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릴 때부터 거실, 안방에 항상 있었는데 20대 때 독립하면서 가지고 나왔다. 익숙하고 예뻐서. 오래 쓴 까닭 태엽 시계라 고장이 나지 않고, 외국의 오래되고 세련된 시계와는 미묘하게 다른 한국적인 느낌이 좋았다.
관리 비법 태엽을 자주 감아준다, 무심히 둔다, 가끔 생각나면 먼지를 닦아준다.
이 시계가 내게 지니는 의미 추억 말곤 큰 의미는 없지만.
어울릴 것 같은 인물 시계의 이름을 찾아보니, 기형도 시인이 사용하던 시계와 같은 거였다. 그래서 기형도 시인.
내가 생각하는 이 시계의 나이 나와 동갑내기.
주관적으로 매기는 현재 가치 약 10만원.
강병국 | 건축가,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주간
나의 오래된 사물 라이카 바르낙 Barnack.
첫 만남 30~40년 전에 60만원 정도 주고 중고로 구매했다. 당시에는 모두 필름 카메라였고, 바르낙이 주는 약간 몽환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손때 묻은 자국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다 보니 결과물은 대부분 필름의 반도 못 건져서, 카메라를 협박도 많이 하고 구박도 많이 했다. 내 실력은 생각도 않고!
버리지 못하는 이유 첫 번째는 게을러서. 시력이 나빠져 거의 사용을 못 하는 터라 처분해야겠다고 생각한 지도 어느새 5~6년 된 것 같으니. 아무튼 30년 이상 같이 살아오며 오래된 것도 그 오래됨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간다.
이 카메라와 어울리는 인물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다미엘, 혹은 나의 건축 작품 논산 쌘뽈 요양원.
이런 사람이라면 기꺼이 물려줄 수 있다 막내딸이 요즘 레트로가 대세라며 필름 카메라 사용하는 것을 보고 팔지 말고 물려줄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불편한 카메라 사용하는 걸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 카메라의 나이 100살.
강지영 | JTBC 아나운서, <고나리자> 진행자
나의 오래된 사물 다프트 펑크 그래픽 티셔츠. 첫 만남 2011~2012년쯤 미국 뉴욕 어번 아웃피터스에서 25~35달러 정도에 구매한 걸로 기억한다. 평소 다프트 펑크의 팬이기도 했고, 프린트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왜인지 이 티셔츠를 입고 다프트 펑크의 노래를 들으면 좀 다를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기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이 티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길에는 다프트 펑크 노래만 들으면서 운전하는 나름의 의식이 있다.
관리 비법 검은색 티셔츠라 세탁할수록 조금씩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아서 건조기에 돌리지 않는다. 세탁 후 항상 자연 건조하는 방식으로 나름 관리한다. 맥주를 활용해 손세탁을 하면 색이 조금 돌아온다고 해서 몇 번 해본 적도 있다. 잘 말린 후에는 안팎을 뒤집어서 개어놓는다. 같은 티셔츠를 2장 살까 고민하다 말았는데, 지금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이 티셔츠가 내게 지니는 의미 이제는 은퇴해서 볼 수 없는 다프트 펑크를 추억하게 만드는 물건이자, 미국에서 유학하던 20대 시절의 내가 담겨 있는 물건이기도 하다.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장 먼저 손이 가는 티셔츠, 하지만 너무 자주 입으면 또 세탁을 자주해야 하니까 진짜 이걸 입어야겠다 싶은 날이 아니면 아껴두고 입게 되는 티셔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해가 지날수록 낡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어서 몇 번 정리해야겠다 생각한 적도 있는데 결국엔 못 버리겠더라. 그냥 나와 세월을 함께하는 전우 느낌이랄까. 낡았지만 내게는 너무 사랑스러운 티셔츠다. Oldie But Goodie.
이런 사람이라면 기꺼이 물려줄 수 있다 낡은 빈티지 티셔츠를 좋아하고 잘 어울리며, 다프트 펑크의 노래를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다.(기꺼이 줄 수는 없다.)
조웅 | 뮤지션,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보컬, 기타리스트
나의 오래된 사물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Fender Sratocaster 기타.
첫 만남 2000년 즈음. 낙원상가에서 중고 제품을 구입했다. 가격은 90만원 정도. 기타는 중학교 때부터 가지고 놀았지만 펜더 Fender사의 기타는 꿈의 모델이었다. 구입 당시 이 모델은 마침 넥이 부러져 수리한 제품이라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더 싸게 구입할 수도 있었다는 것.
손때 묻은 자국 에피소드 1. 이 기타를 들고 2005년, 클럽 공연에 데뷔했다. ‘구남’의 1집과 2집 역시 이 기타로 연주, 녹음했다. 에피소드 2. 기타의 원주인은 라이브 카페에서 즉흥 연주(일명 오부리)를 하던 이로, 픽업이 오리지널 세팅이 아닌 가요 반주에 맞게 개조되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오리지널 스트라토캐스터와는 다른 톤의 연주를 할 수 있게 됐다.
관리 비법 한국의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반드시 케이스에 넣어서 보관한다. 한 15년 전부터는 다른 기타들을 메인으로 사용하면서 오래 방치해두고 있는 것이 사실. 하지만 한 번씩 꺼내서 만져줘야 살아 있는 악기로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울릴 것 같은 인물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브라더스>의 주인공인 ‘성우’에게 어울릴 것 같다. 젊은 성우(박해일)가 얻어 나이 든 성우(이얼)가 될 때까지 미련스럽게 잡고 있을 오직 한 자루의 기타를 상상해보면 꽤 잘 어울린다.
내가 생각하는 이 기타의 나이 1990년대 모델이다. 사람으로 치면 40대 후반. 새삼 반갑게도 내 또래다.
주관적으로 매기는 현재 가치 요즘 나오는 고급 라인의 기타들과도 바꿀 마음이 전혀 없다. 단, 아무개가 잘 굴러가는 1990년대 BMW 3 시리즈랑 바꾸자고 하면 바꿀 수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김용관 | 건축사진가, 작가
나의 오래된 사물 허먼밀러 에어론 체어 Hermanmiller Aeron Chair.
첫 만남 2000년. 존경하는 이상철 선생님(우리나라 최초의 아트디렉터이자 우리나라 편집 디자인의 시초가 된 잡지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의 편집 디자이너)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이 의자가 내게 지니는 의미 무엇보다 이상철 선생님께서 전해주신 선물이라는 의미가 크다. 다른 의미를 찾아보자면 최고 수준의 디자인 가구를 경험한 시작점이어서 허먼밀러의 에어론 체어 이후 다른 디자인 가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 이후 많은 디자인 가구를 접하게 됐다. 아무튼, 그렇게 20년 넘게 내 몸의 일부처럼 사용해오다 몇 해 전에 의자를 젊은 건축가에게 물려주었다. 이상철 선생님으로부터 시작해 20년 동안 나와 함께한 이 낡은 의자를 그가 가져간 데는 이 사물이 품은 시간, 그 안에 깃든 이야기를 귀히 여겨주었기 때문이리라. 물려주었다고는 했지만 실은 눈에 보이는 거리에, 여전히 가까이 존재한다.
관리 비법 따로 관리법이 없을 정도로 타고난 메커니즘이 매우 견고하다. 그럼에도 관리법이라면 무생물이지만 꼭 생물처럼 애정해 함부로 다루진 않은 것. 많은 시간을 함께 앉아 있었다. 동료이자 친구였다.
어울릴 것 같은 인물 어떤 분야든 자신만의 색을 또렷하게 발하는 이들의 사물로서 잘 어울릴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박찬욱 감독 같은 분.
내가 생각하는 이 의자의 나이 의자를 처음 선물 받은 그때, 내 나이가 서른두살이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이 의자는 변했을까, 변치 않았을까. 어찌 됐든 사물의 나이라면 서른두 살이 좋겠다. 지금은 비록 젊은 건축가에게 물려주었지만 늘 가까이 있으니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광호 | 아티스트
나의 오래된 사물 628 다람쥐 강모 붓 Squirrel Pure Bristle.
내가 붙인 애칭 선인장 작품 제작용 붓. 이 붓이 있었기에 선인장 시리즈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50점 정도의 작품에 사용한 듯하다. 첫 만남 2007년 홍대 앞 호미화방에서 우연히 구입했다.
이 붓을 들인 이유 “명필은 붓 타령을 하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는데 나는 다양한 붓의 특성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새로운 형태의 붓을 보면 구입해서 테스팅하는 습관이 있다.
당시 구입 가격 2천원에 구입했지만, 모든 붓은 가격과 무관하게 그 붓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특성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 쓴 까닭 이 붓을 오랫동안 두드리는 기법으로 사용하면서 한쪽 면이 자연스럽게 마모되어 선인장 작업의 질감 표현에 최적화되었다.
관리 비법 항상 퇴근하기 전에 2차에 걸쳐 세탁하는데, 작업을 마치면 먼저 붓에 묻어 있는 물감을 걸레로 닦아내고 붓 세척제 Oil Cleaner로 1차 세척한다. 그다음 흐르는 물에 식기 세척제로 2차 세척을 한다.
이 붓이 내게 지니는 의미 화가에게 붓은 감각을 전달하는 육체의 또 다른 기관이다. 나에게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어루만지는 행위이고, 붓은 그 애무의 도구다. 다양한 붓에는 그 붓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특성들이 있다. 그 붓만의 존재감을 새롭게 확인할 때 화가로서 큰 기쁨을 누린다.
이런 사람이라면 기꺼이 물려줄 수 있다 붓은 화가마다 개별적으로 기능하기에 나에게 좋은 붓이라고 다른 화가에게도 좋은 붓일 수는 없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 나는 사용 기한이 지난 붓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습성이 있다.
내가 매기는 현재 가치 측정 불가.
김도균 | 서울예대 사진학과 교수, 작가
나의 오래된 사물 린호프 마스터 테크니카 클래식 카메라 Linhof Master Technika Classic와 빌링햄 카메라 가방 Billingham 355MKII.
첫 만남 1997년 7월, 남대문에 있는 한 카메라 가게에서 중고로 구입했다. 당시 가격으로 약 4백만원. 가방은 같은 해 명동에 있는 카메라 가게에서 신품으로 구입했다. 가격은 약 30만원. 당시엔 카메라가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던 시기. 처음엔 중형 카메라인 핫셀블라드를 구입했는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채 검은 비닐 봉투에 담겨 있는 모양새가 영 의심스러웠다. 다시 환불을 요구했지만 이미 포장을 뜯었고, 또 구입했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말도 안 되는 반 협박(?)에 결국 이 카메라로 교환했다. 생각해보면 신품인지 중고품인지 도통 알 수 없던 핫셀 블라드보다 중고지만 꼭 신품 같던 린호프 마스터 테크니카 클래식이 정신건강에도 더 나은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대형 카메라의 견고한 생김과 안정적인 그립감이 으뜸이었다.
이 카메라가 내게 지니는 의미 이 카메라는 내 작업의 정신적, 물리적 시작점에 있는 사물이다. KDK 작업의 중심이며, 늘 동행하는 파트너다. 30여 년 동안 이 카메라와 함께했으니, 지구 몇 바퀴 정도는 거뜬히 돌지 않았나 싶다. 유럽과 아시아, 북미,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대륙을 함께 누빈 동료다.
내가 붙인 애칭 4×5로 표기하고, ‘사오’로 발음한다. 내 작업실의 이름이 4×5zib인데, 이 카메라에 쓰이는 필름의 규격 4×5inch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카메라를 부를 때도 단순히 ‘사오’.
어울릴 것 같은 인물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서 사진작가 로버트 역을 연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좋겠다.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김대균 | 건축가
나의 오래된 사물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쓰시던 화로.
첫 만남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집 진열장에 신기한 물건이 있어서 아버지께 물어봤더니 할아버지가 쓰시던 화로라고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 아버지께 물려받았다.
이 화로가 좋은 이유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형과 재료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음.
오래 쓴 까닭 매일 앉는 소파 테이블 앞에 두고 본다. 어떤 아름다움도 전하려 하지 않는 무덤덤하고 무겁고 검은 존재가 생각을 비우게 만든다. 관리 비법 아무 관리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라면 기꺼이 물려줄 수 있다 무덤에 가지고 갈 것이다.
이 화로와 어울리는 인물 조르조 모란디 Giorgio Morandi.
내가 생각하는 이 화로의 나이 1백 살은 넘었을 것 같다.
버리려다 다시금 다잡게 된 계기 일상이 복잡하게 느껴질 때나 설계가 잘 안 풀릴 때.
곽재식 | 소설가, 숭실사이버대 환경안전공학과 교수
나의 오래된 사물 정확한 브랜드명은 잘 모르겠다. 손바닥만 한 수첩이다.
첫 만남 2009년 3월 1일, 내가 처음으로 진행한 작가와 독자의 팬미팅 행사에서 한 독자가 “작가님, 소설 쓰시기 위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실 때마다 잊지 말고 메모하세요”라며 선물로 주셨다.
손때 묻은 자국 2006년부터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2009년쯤 잠깐씩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 그때 마침 독자님께서 주신 수첩이라 그런 감을 굳히는 기회가 됐다. 2017년인가, 태풍 때문에 비를 쫄딱 맞았을 때 메고 있던 가방은 물론 수첩도 물에 푹 젖었지만 잘 말리니 그럭저럭 쓸 수 있게 되어 이후에도 계속 쓰고 있다.
관리 비법 2시간 이상 외출할 때는 항상 들고 다닌다. 이번 기사를 위한 촬영 때문에 수첩을 맡기는 게 아마 지난 15년 중 가장 오래 수첩과 떨어져 지낸 시간일 것이다.
이 수첩이 내게 지니는 의미 내가 쓴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게 해주는 물건이다. 무엇보다 글을 쓸 생각을 메모하는 데 실제로도 많은 도움이 됐다.
이런 사람이라면 기꺼이 물려줄 수 있다 부지런히 글을 쓰고 마감을 잘 지켜가며 글을 성실히 마무리 짓는 작가가 이 수첩을 필요로 한다면. 메모해둔 이 문장과 함께. “문학의 핵심은 비밀이다.”
정대건 | 영화감독, 소설가
나의 오래된 사물 리얼포스 R2 텐키리스 저소음 30그램.
내가 붙인 애칭 리얼30
첫 만남 2019년 초 용산 리더스키(오프라인에서 직접 키보드를 타건해 볼 수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에서 구입했다. 장편소설을 쓰기 전, 작가들 사이에서 ‘키보드 끝판왕’이라고 알려져 있어서. 타이핑 양이 많은 작가들은 손가락과 손목 고통을 호소하는데, 이 키보드는 키압이 가벼워 피로도가 적다.
오래 쓴 까닭 키압이 가볍고 손의 피로도를 낮춰준다. 글이 잘 안 풀릴 때는 책 한 권을 통째로 키보드로 쳐보는 습관이 있어 작업 결과물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관리 비법 사용하지 않을 때는 키보드 덮개로 덮어준다. 분기마다 키캡을 벗겨서 비누칠해준다. 매년 키보드를 분해해 기름으로 윤활해준다.
이 키보드가 내게 지니는 의미 첫 책 <GV 빌런 고태경>을 리얼30으로 썼고, 그 이후의 작품들은 다른 키보드와 병행해 사용했지만, 장편소설을 쓰다가 손가락이 아파오면 결국 리얼30으로 돌아온다. 모든 책과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 기계식 키보드에 입문하고 27가지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다 처분하고 3대만 남겨놓았다. 더는 새로운 키보드 사고 팔기는 하지 않고 있다. 리얼30과 해피해킹 스튜디오에 정착하기도 했고, 새로운 취미인 만년필에 입문했기 때문에.
김지혜 | 드라마 작가, 감독
나의 오래된 사물 로얄 덜튼 16센티 편수냄비.
내가 붙인 애칭 혼수.
첫 만남 아마도 2003년, 상암동 까르푸에서 엄마가 ‘구매 영수증 모으기 사은 경품 증정 행사’를 통해서 받았다.
오래 쓴 까닭 겉이나 속, 어느 면으로나 나와 똑같던 우리 엄마가 이 냄비를 꼭 끌어안고서, “이건 ‘지혜 혼수’니까 건드리지 마”라고 아빠에게 조용히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렸을 때, 해가 지고 있었는지 바람이 불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돌아가시고 엄마의 바람과는 다르게 아직 결혼하지 못했지만, 이 ‘혼수’가 내게 남아 있다. 몇 명의 연인과 ‘혼수’에 라면을 끓여 먹었고, 앞으로도 마지막 날까지 그럴 예정이다.
관리 비법 엄마 생각하면서, ‘혼수다’ 생각하면서, 막 쓴다.
어울릴 것 같은 인물 키키 키린.
내가 매기는 현재 가치 앞으로도 살면서 내내 한참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윤종후 | 가젯 컬렉터, 레몬 서울 대표
나의 오래된 사물 닌텐도의 뉴패미컴. 1993년에 일본에서 최초 발매된 모델이다.
첫 만남 2006년에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보고 어릴 때 즐겨 한 패미컴이 생각나 구매했다. 기존의 컬러풀한 디자인과는 다른 세련된 모습이 매력적이다.
손때 묻은 기억 어릴 때 패미컴 게임을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서 할 만큼 중독된 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 패미컴을 아파트 잔디밭에 묻어버린 적이 있다. 물론 3일 후에 다시 파와서 도루묵이 됐지만.
관리 비법 플라스틱이라 황변을 막으려면 직사광선에 오래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고, 전자제품이다보니 2~3개월에 한 번씩 ‘전기 밥’을 주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 게임기의 나이 인생에서 제일 처음 접한 게임기만큼 많은 추억을 가진 존재는 없을 거다. 가끔 켜보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라 묘하다. 실제로 패미컴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의 추억도 오래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조광진 | <이태원 클라쓰> 작가, <카브리올레> 감독
나의 오래된 사물 유니온베이 재킷. 나도 이번에야 태그를 보고 알았다.
첫 만남 2009년 서울 종로 광장시장에서 2만5천원 부르는 것을 2만원까지 깎아서 구입했다. 당시 호프집 아르바이트생이라 돈이 없어 광장시장 중고 의류를 많이 이용했는데, 빈티지 스타일에 꽂혀 있던 차에 딱 마음에 드는 재킷이 걸려 있었다.
손때 묻은 자국 평소 옷 잘 입는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옷을 입었을 때는 두 번 정도 들었다. 그렇다 보니 멋 부릴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입었다. 어느 날은 친구와 길을 걷다 똑같은 옷을 입고 계신 할아버지와 마주쳤는데, 친구는 내 옷을 비웃었지만 그 할아버지가 멋쟁이라서 괜찮았다. 만화가로 데뷔해서는 주인공에게 이 옷을 그려 입히기도 했고, 드라마 방송일 같은 중요한 순간에는 왜인지 이 옷을 입게 됐다.
관리 비법 전혀 관리하지 않았다. 굉장히 튼튼한 옷이다. 관리를 잘해서 오래 입는 게 아니었다. 마음에 들어서 오래 입는 것이었다.
이 재킷이 내게 지니는 의미 일하던 거리에서 이 옷을 입고 다니면 1백 미터 밖에 있어도 지인들은 나를 알아봤다. 몇 년이 지난 뒤 만화가로 데뷔하고 금전적 여유가 생겨 중고 의류를 구입하지 않게 됐고 간혹 명품 의류를 사 입기도 했지만, 역시나 겨울철에 제일 애용하는 재킷은 이 옷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이 재킷은 내 청춘과 함께한 옷이었다.
어울릴 것 같은 인물 내가 그린 <이태원 클라쓰>라는 만화의 주인공이 입은 적이 있다. 조이서라는 소시오패스 성향의 인플루언서인데, 표지 그림으로 이 재킷을 입혀 그렸다.
이런 사람이라면 기꺼이 물려줄 수 있다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에서 주인공 제시카가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물려받은 것이 ‘구린’ 갈색 재킷이었다. 구린 재킷을 힙하게 입는 신이 인상 깊었다. 보고 딱 이 옷이 생각났다. 내 딸이 갖고 싶다면 줄까 한다. 조건은 절대 버리지 않기.
내가 생각하는 이 재킷의 나이 사십. 질문을 들으니 떠오른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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