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김 나는 영화를 보며 미리 다짐한다.
① <그린치>, 후빌 Whoville

인생이 눈 뭉치처럼 제멋대로 굴러가도 그게 제맛이지 하며 호호 히히 웃는 긍정 가득 주민들이 사는 마을, 그래서 그린치가 더욱 부루퉁하게 매일 아침을 맞는 따스한 동네 후빌은 아쉽게도 실재하는 지역은 아니다. 대신 원작 동화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 How The Grinch Stole Christmas!>(1957)를 실사 영화 <그린치>(2000)로 옮길 때 그림 속 마을을 그대로 유니버설 스튜디오 할리우드에 구현했다. 세계 최대 영화 세트장 겸 촬영장이자 테마파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 할리우드에서는 매해 12월에 ‘그린치마스 기념식 Grinchmas Celebration’을 연다. 모나서 사랑스러운 그린치를 닮은 삐쭉빼쭉 대형 트리가 파크 중앙에 세워지고, 그린치와 맥스(진짜 강아지가 등장한다!)가 꾸미는 뮤지컬 무대가 열린다. 혹 그린치를 마주치면 그가 가장 사랑하는 말로 반겨주기를. “완전 싫어 Double Hate.”
TRAVEL GUIDE 무대 오른편에 앉을 것:그린치 뮤지컬을 관람하게 된다면 무대 오른편에 앉기를 추천한다. 영리한 개 배우 맥스의 점잖은 연기, 탐나는 초록 털을 휘날리며 썰매를 타는 그린치를 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② <007 노 타임 투 다이>, 오슬로 Oslo

설원을 뚫고 찾아온 미지의 방문객. 킬러가 분명한 그와 쫓고 쫓기는 얼음 위 추격전.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마지막으로 제임스 본드로 활약하는 다니엘 크레이그를 보는 포인트도 있었지만, 그 포문을 여는 새하얀 설원, 꽁꽁 언 호수 정경이 스크린을 압도했다. 광활하여 더욱 긴장감을 조여내던 눈밭, 얼음, 숲. 배경이 된 곳은 노르웨이의 북쪽 마을 하카달 Hakadal 근방에 자리한 랑반 호수 Langvann다. 노르웨이 여행에서 기차는 편리하고도 멋진 정경을 품은 교통 수단이다. 수도 오슬로에서 부채꼴로 펼쳐진 철도망이 주요 도시를 촘촘히 잇고, 빙하가 만든 골짜기 피오르와 산악 고원, 잔잔한 시골과 호수, 자연 면면을 품는다. 오슬로에서 하카달까지는 기차로 약 1시간 30분, 하카달역에서 랑반 호수까지는 숲을 지나는 산책 겸 도보로 1시간 내 닿는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촬영한 시기는 2019년 3~4월경. 이때는 노르웨이도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시점이라 제작진이 마음 좀 졸였다고 전해지니 꽝꽝 언 호수 면을 보고 싶다면 2월 내 여행하는 편이 좋겠다. 물론 침엽수에 둘러싸인 에메랄드빛 물색, 얼음이 녹은 호수도 말문을 막는다.
TRAVEL GUIDE 오슬로 중앙역 근처 일몰 명소도 놓치지 말 것:오슬로 중앙역 뒤편에서 연결 통로로 이어지는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 Oslo Opera House는 현지인도 일상적으로 즐겨 찾는 도시의 대청마루 같은 존재다. 바다 위 빙하 형상으로 빚은 새하얀 건축물의 이곳 지붕은 이탈리아 대리석과 화강암 3만여 개로 완성했다. 언제든, 누구든 올라갈 수 있도록 야트막한 언덕처럼 터두었다. 북해로 저무는 석양에 물드는 일몰 명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 <테넷> 촬영지로도 고려했는데, 불가사의한 세계를 나타내는 장치로서 부합하는 장소들을 추렸다고 한다.
③ <추락의 해부>, 빌라렘베르 Villarembert

오두막 주인인 파스칼린과 요한에 따르면 “<추락의 해부> 제작팀은 사람이 떨어져 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높이를 갖춘 집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단란한 세 가족과 어울리게끔 아늑하면서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게 묘한 긴장을 품은 3층짜리 별장. 쥐스틴 트리에 감독과 운명처럼 닿은 이 집은 현재 에어비앤비를 통해 일반 여행객에게도 열린다. 영화에서는 애석한 사건의 시작점이지만 이 집이 자리한 프랑스 사부아 지방 빌라렘베르 Villarembert 마을은 예부터 평화롭고 고풍적인 겨울 휴가지로 저명한 곳이다. 차로 5분 거리에는 알프스 중심부에 자리한 산악 리조트이자 가족 모두가 스키를 즐기기 좋은 완만한 경사 리프트와 산악 여행을 할 수 있는 케이블카를 갖춘 르 코르비에 Le Corbier, 10분 거리에는 1천8백 미터 고도에서 스키와 보드로 활강할 수 있는 리조트 라 투쉬르 La Toussuire가 있다.
TRAVEL GUIDE 추위를 노곤하게 풀어주는 ‘자양강장제’를 맛볼 것:프랑스 알프스 지역에서 나는 약초 1백여 가지로 담근 전통주 샤르트뢰즈 Chartreuse를 핫초콜릿에 타 마신다. 설산을 누빈 스키어들이 즐겨 찾는 마실 거리.
④ <파고>, 미니애폴리스 Minneapolis

도쿄에 사는 스물아홉 살 쿠미코는 지루한 일상 중 <파고>라는 영화를 접하고 “이것은 실화”라는 오프닝 자막에 이끌려 극 중 남자가 92만 달러를 묻은 눈밭을 찾아 떠난다.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2014) 속 <파고>는 코엔 형제가 1996년에 만든 실제 작품이다. 요약하자면 8만 달러로 시작해 1백만 달러로 불었다가 결국 92만 달러가 허허벌판 눈 속에 파묻히며 ‘무 無’에 수렴하게 되는, 인간의 탐욕과 오만과 멍청함과 허무함이 담긴 이 영화는 엔딩에 자그맣게 “픽션”, 즉 실화가 아니라고 밝히며 블랙 코미디적 방점을 찍는다. 쿠미코가 찾아 떠난 곳이자 <파고> 속 눈밭은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Minneapolis다. 파고 Fargo라는 지역이 실재하지만 코엔 형제는 중의적 의미를 담아 ‘Far Go’라고 짓고 자신들의 고향인 미니애폴리스를 주요 배경으로 삼았다. ‘쿠미코’는 실화인가 아닌가, 미니애폴리스 어느 땅에 한화 약 12억 8천만원이 정말 묻혀 있을까 아닐까, 픽션으로 밝혀진 지금까지도 관객과 트레저 헌터들을 쥐어짜는 이 작품들은 눈안개처럼 모호하지만, 미니애폴리스의 겨울은 지독하게 춥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10월부터 기온이 하락하기 시작해 5월까지도 으슬으슬하다. 평생 미니애폴리스에 살아서 코엔 형제가 ‘샤라웃’한 프린스는 생전 이 도시에 머문 이유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너무 추워서 나쁜 사람들이 모두 떠난다.”
TRAVEL GUIDE 미니애폴리스에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실내 다리 스카이웨이 Skyway가 있다. 개방 시간은 가변적이므로 확인하고 이용할 것. <파고>의 설경 위 비릿한 심리전에 위축된 근육이 스카이웨이 안에서라면 느슨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