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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번 휴가에 가볼 만한 여름 도시 5

2025.06.13.전희란

여름에 숨어들고 싶은 그 도시. 나의 사적인 여름 별장.

① 로타, 천사의 날개 아래

‘내 돈, 내 시간, 내 기력, 내 재능 써가며 갈 생각 없는 곳’ 목록이 있다. 그중 한 곳이 사이판이었다. 이 지명을 읊을 때마다 부곡 하와이가 떠오른다. 한때 아주 잘나갔지만 지금은 낡은 유물이 된 촌스러운 관광지. 로타는 사이판 옆 아주 작은 섬으로, 저 목록에 초성도 못 올릴 만큼 존재감이 미미한 곳이다. 그런 델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갔고, 이제 로타는 내 로망이 됐다.

아- 1000자 안에 그 까닭을 어떻게 축약할 수 있을까? 일단 써본다. 쌀뜨물에 파워에이드를 들이 부은 것 같은 물빛, 공기처럼 맑고 청량한 시야를 가진 다이빙 포인트 같은 풍경 찬탄으로 워드 한 바닥을 채울 수 있지만 일단 접겠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은 천지에 널렸으니까. 나를 매혹한 건 사방에 인간이 하나도 없는, 압도적으로 낮은 인구밀도다. 이 섬의 면적은 약 85제곱킬로미터로 인구가 약 2000명이다. 거주자 대부분이 모여 산다는 송송 마을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내가 본 것은 구름과 나무, 꽃과 새의 그림자뿐이었다. 그 적막은 머무는 내내 계속됐다. ‘후무후무누쿠누쿠아푸아’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물고기가 활개치는 절벽 ‘포나’, 영혼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정령의 나무 누누 트리를 품은 정글 ‘말리럭’, 병풍처럼 두른 암초가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라군 ‘스위밍 홀’에서 인적을 발견한 적이 있었나? 보통 이렇게 접근이 쉬운, 근사한 자연엔 그걸 누리려고 기를 쓰고 찾아오는 이들로 득시글하다. 로타엔 아무도 없고, 그 덕에 혼자 지구를 독차지한 것 같은 호사를 누렸다. 온갖 얕은 짜증, 깊은 수심을 품은 인간들이 풍기는 악기운이 가득한 서울에서 받은 상처가 그렇게 아물었다. 로타는 그런 곳. 오장육부와 눈을 정화하는 맑은 공기와 태초 같은 자연, 우주에 혼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황홀한 고립감이 간절할 때 (그치만 조금 무서워지면 30분 안에 인간이 사는 마을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비교적 만만한 액수의 돈으로도 누릴 수 있는 피난처. 내가 믿는 종교에선 그런 델 “천사의 날개 아래”라고 표현한다. 올여름 내가 숨어들 날개는 이 섬이다. 류진(여행 매거진 콘텐츠 디렉터)

② 감나무 밭 테라스에서 누린 고요 – 경북 청도

이미지 = 청도군청

왜 청도여야 했을까? 몇 해 전 여름, 대구 남쪽에 자리한 낯선 지방으로 휴가를 떠나면서도 의문이 걷히지 않았다. 소 싸움을 볼 것도 아니고, 미나리 삼겹살을 먹을 계절도 아니었다. 물론 청도에는 해수욕장도 없으니 도무지 피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먼 거리를 감수할 만한 숙소가 있다는 말만 믿고 차를 몰았다.

마을 어귀에서 숙소 주인을 만났다. 씩씩한 인상의 내 또래 여성이 SUV를 몰고 나타났다. 내비게이션도 헤매는 산골이어서 주인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감나무가 지천인 좁은 길을 한참 들어가서야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복층형 독채로, 고동색 목재를 활용한 인테리어가 차분한 인상이었다. 펜션? 비앤비?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집이었는데, 이용자들이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물에는 ‘감성 숙소’라는 해시태그가 많았다.

짐을 풀자마자 아내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강아지 산책 시간이 언제죠?” 이 숙소는 손님이 원하면 강아지와 산책하게 해준다. 주인 부부는 여러 유기묘와 유기견을 돌보며 산다. 오후 6시, 다부진 체구의 중형견 덕구, 덕분이와 함께 마을길을 슬렁슬렁 걸었다. 사람 한 명 마주치지 않았고 새소리, 벌레 소리, 종종대는 강아지 발소리만 메아리쳤다. 산책 중 황홀한 황혼을 만났다. 덕구와 덕분이도 걸음을 멈추고 촉촉한 눈으로 산 너머를 바라봤다.

숙소는 건축을 공부한 주인 부부가 직접 지었다. 차경을 고려한 창문 배치, 호텔 뺨칠 만큼 잘 정돈된 침구도 인상적이었지만 테라스야말로 주인공이라 할 만했다. 집 입구에 정사각형으로 꾸민 테라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는 이슬 내린 마당의 싱그러움을 느끼며 커피와 빵을 먹었고, 오후에는 책을 읽다가 살랑거리는 바늘붓꽃에 한참 시선을 뺏겼다. 저녁에도 어김없이 테라스로 나가 사위가 적막에 잠기는 풍광에 취했다. 언젠가 나도 주택에 산다면 널찍한 데크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공간이라면 권태로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될 것 같았다. 그해 여름, 바캉스나 피서와는 동떨어진 휴가를 보냈지만 내 마음은 오래 그곳에 붙박여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숙소 이름은 ‘키에튀드 quietude’였다. ‘평안, 정적’을 뜻하는 프랑스어인데 독채 옆 담벼락에 희미하게 쓰여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최승표(중앙일보 레저팀 기자, <조용한 여행> 저자)

③ 베를린과 여름

한여름의 베를린은 느슨하게 풀린 셔츠처럼 나른하고 자유롭다.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장벽, 알렉산더 광장 등 관광지가 북적일 즈음, 이곳 사람들도 하나둘 도시를 빠져나간다. 베를린은 그럴 때 가장 아름답다. 조금은 비워진 골목, 조금은 느려진 발걸음, 그런 여백 속에서 비로소 도시의 진짜 숨결이 들린다. 나는 그 틈새를 파고든다. 여름이면 한 달쯤 휴가를 떠나는 베를리너들의 집에 머무르며, 그들의 화분과 정원에 물을 주고 반려동물과 하루를 함께 보내는 ‘집사’가 된다. 동네마다 다른, 누군가의 일상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베를린의 여름은 서울의 일상과 거리감이 있다. 해는 늦은 밤까지 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어김없이 공원과 호숫가로 흘러간다. 굳이 어디를 가지 않아도 된다. 트렙토어 파크의 녹음 속을 자전거로 가로지르고 슐라흐텐제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곳곳에 자리한 비어가르텐에서 청량한 맥주 한잔 혹은 와인 한잔 마시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 집사로서, 동네마다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매력을 탐험하는 재미도 더해진다. 베를린의 북동쪽 프렌츨라우어 베르크를 선택한다면 쇤하우저 알레역 근처가 좋겠다. 이 지역은 통일 후 구동독의 오래된 아파트를 선점한 독일인부터 외국에서 온 직장인까지 조화롭게 살아간다. 주말이면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벼룩시장과 길거리 공연이 열리는 마우어 파크가 지척에 있고, 조금 덜 북적이지만 취향을 가진 다국적 식당과 바가 자리한다. 남쪽으로 향한다면 릭스도르프로 향한다. 힙스터의 성지인 노이쾰른 지역 한편,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래된 동네다. 울퉁불퉁한 자갈길과 19세기식 목조 주택, 안뜰에서 열리는 작은 클래식 콘서트, 골목골목에서 느껴지는 빈티지한 감성들은 또 다른 베를린의 면모를 보여준다. 다음 여름엔 또 어떤 동네의 정원 혹은 고양이와 함께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까. 베를린엔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그리고 그것이 이 도시가 여름마다 내 별장이 되는 이유다. 서다희(여행 칼럼니스트)

④ The Imperial Hotel Torquay – 영국 토키

영국 남서부 데본 해안가의 작은 마을인 토키는 나의 첫 영국 여행지였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고향이며 그녀의 소설 속에도 종종 나오는 마을인데, 그녀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아무 준비도 없이 갔던 것이다. 토키는 ‘영국의 리비에라’로 불리는 온화한 기후가 특징인데, 영국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뜨거운 여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서 매력적이다. 특히 조용한 여름을 보내기에 제격이다. 부담스럽게 시끄러운 여행자가 아니라 품위를 지키려는 예의 바른 현지인이 가득한 이곳을 추천하는 이유다. 해변가의 마을이 그렇듯 여러 호텔이 바닷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다. 내가 머물렀던 곳은 임페리얼 호텔이다. 1866년에 만들었으며, 그녀의 작품 세계에 영감을 주었던 토키 명소를 소개한 ‘아가사 크리스티 마일 Agatha Christie Mile’ 중 한 곳이다. 토키 뮤지엄, 로열 코베이 요트 클럽, 프린세스 가든, 토키 기차역 등이 마일에 포함되어 있는데, 임페리얼 호텔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생전 여러 사교 행사에 참석했으며, 3권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장소다.

“우리는 마제스틱 호텔의 한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세인트 루에서 가장 큰 이 호텔은 바다가 보이는 곶 위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들 아래 펼쳐진 정원에는 야자수가 여기저기 심어져 있었다. 바다는 깊고 사랑스러운 푸른빛이었고, 하늘은 더없이 맑은 데다 태양은 8월의 태양만이 지닐 수 있는 강렬한 열기를 온 누리에 전하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벌들이 윙윙거리는 즐거운 소리, 이보다 더 이상적인 곳은 없으리.” <엔드하우스의 비극> 제1장에서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아름다운 정원을 예찬하고 있지만, 잠시 후 상속녀를 죽이기 위한 총알이 그 앞에 떨어지면서 평화는 깨지고 만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소설 속 호텔 이름과 동네 이름을 살짝 바꾸었는데, 이곳이 살인 사건의 상징으로 불리는 것을 걱정한 배려로 보인다. 이 호텔은 <서재의 시체>, <잠자는 살인>에서도 중요 장소로 등장하며, 그녀의 소설을 좋아한다면 꼭 한 번 가고 싶은 곳으로 등극했다. 객실마다 해안이 보이는 수려한 전망은 유명 휴양 도시처럼 인위적이지 않아서 좋다. 암모나이트가 처음 나타난 고생대 데본기(Devonian Period)의 명칭이 이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세월을 담은 특유의 해안 절경을 놓치지 마시라. 아가사 크리스티도 어렸을 때부터 여름이면 바닷가에게 일광욕을 하고 수영을 했다. 미술가 데미언 허스트도 데본에 작업실을 차렸다. 이곳은 예술가와 여행자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임에 분명하다. 이소영(프리랜스 에디터)

⑤ 타히티 세레나데

나만의 여름 별장은 바닐라나무 향을 맡으며 상어, 가오리와 헤엄치는 ‘타히티’의 섬들이다. 섬 구석구석 깊숙이 가보면, 천혜의 자연 속에서 소박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체험 거리가 풍부하다. 타히티 직항은 없지만, 하와이안항공을 통해 호놀룰루를 경유해 가거나, 에어타히티누이를 타고 일본을 경유해 닿을 수 있다. 타히티에는 보라보라, 모레아, 랑기로아 등 118개의 폴리네시아 섬이 있다. 그중 내 여름 별장은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알려진 타히티 라이아테아섬에 있다. 타히티에서 국내선을 타고 이동하면 된다. 라이아테아섬에 가면 가장 먼저 에바 양과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웰니스 체험지 및 숙소 ‘니우 쉑 NIU Shack’으로 향한다. 에바와 함께 바나나, 코코넛 밀크, 꿀을 섞어 천연 샴푸를 만들어 머리에 바르고, 과일 껍질과 소금으로 만든 보디 스크럽으로 전신을 마사지한다.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들어가면 온몸이 건강하고 개운해진다. 자연 속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면 에바의 어머니표 비건 브런치 식사 시간이다. 과일, 채소, 견과류 등만으로 어찌 이렇게 속세의 맛을 구현할 수 있는지. 육식 러버지만 여기서 먹은 키슈가 인생 요리였다.

산보다 바다가 좋다면 라이아테아에서 보트를 타고 타하섬으로 이동한다. 최고급 바닐라가 자라는 타하섬의 르 타하 아일랜드 리조트 앤 스파는 타히티나 보라보라에 비해 화려함은 덜고 자연 속 한적함이 머문다. 바닐라의 섬 리조트답게 수많은 바닐라나무를 찾아볼 수 있다. 비치 방갈로 객실에선 발 아래로 헤엄치는 상어와 가오리들을 만나고, 정원의 풀 비치 빌라에선 돌담과 야자수, 바다가 어우러진 평화로운 분위기가 펼쳐진다. 타히티를 여름에 방문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매년 7월이면 타히티 최대 문화 예술 축제 중 하나인 ‘헤이바’가 열린다. 1881년에 시작해 매년 수천 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대규모 노래와 춤 공연으로 호텔에서 입장권을 구매하면 셔틀 보트를 통해 편리하게 즐길 수 있으니 놓치지 말자. 강예신(매일경제 <여행플러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