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다른 스타들이 블록버스터 출연으로 막대한 출연료를 벌어들이던 시절, 에단 호크는 뜻밖의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이 이제 다시 에단 호크의 시대를 연다.

에단 호크는 약속 장소인 브루클린의 작고 사람들로 가득 찬 카페에 15분 일찍 도착했다. 결혼한 지 20년 넘은 아내 라이언, 두 아이와 근처에 산다고 한다. 오늘은 아이들의 학부모 상담을 마치고 곧장 카페로 온 길이다.(호크에게는 14세부터 27세까지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이 중 두 명은 우마 서먼과의 결혼 생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처음 가졌을 땐 이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지 몰랐어요.” 호크가 운을 뗀다. “그래서 지금은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 하죠.”
그는 닳은 블루 코듀로이 수트에 노란 줄무늬가 새겨진 스니커즈를 신은 채 나타났다. 카페의 누군가가 혹여 에단 호크를 알아봤다 하더라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손님들 사이에 끼어 앉아 어깨조차 펼 공간이 없는 테이블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그는 아널드 파머와 루콜라 샐러드를 주문하고는 부스러기들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1980년대부터 명성의 가장자리를 맴돌아온 호크의 얼굴에는 이제 이마를 가로지르는 주름과 회색빛 수염, 세월의 흔적이 선명하다. 그의 나이는 이제 54세다. 하지만 시베리안 허스키와 같은 푸른 눈빛과 날렵한 턱선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는 1989년 작 <죽은 시인의 사회>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1994년 <청춘 스케치>로 단숨에 X세대의 불안과 냉소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그때가 배우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된 순간이었어요. ‘죽은 시인 중 한 명’에서 ‘아, 그 사람’으로 알아봐주시는 계기가 되었죠.” 푸른 눈빛이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 이듬해, 그는 <롤링 스톤> 표지를 장식하며 영화계에서 마치 전설적인 록 밴드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른 라이징 스타들이 여름 블록버스터나 향수 광고로 그 순간을 성대하게 이어갔다면, 호크는 달랐다. 그는 20대와 30대를 새로운 문화적 시도가 나타나는 곳들을 탐구하며 보냈다. 소설을 쓰고, 자신이 공동 설립한 극단에서 연극을 연출했으며, 브로드웨이에서 셰익스피어 무대에 섰다. 첼시 호텔을 배경으로 한 독립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미친 듯이 돈을 벌어 전용기를 갖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이 있죠.” 호크가 멀리 두던 시선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저는 예술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관심이 있었어요.”
호크의 선택은 흥행 공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창작자로서의 충만함을 가져다주었고, 대부분의 배우가 갈망하는 조용하면서도 긴 생명력을 가능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그는 ‘레터박스 세대’를 완벽하게 상징하는 배우가 되었다. 10대들이 자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를 기록하고, 6백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아노라>가 <듄: 파트 2>와 <위키드>를 제치고 작품상을 거머쥐는 시대 말이다. “저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호크는 말한다.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냉소적인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냉소는 결국 굴복으로 이어지더라고요.”

올가을, 호크는 세 작품으로 폭넓은 스펙트럼을 선보인다. 공포 영화인 <블랙폰 2>에서는 섬뜩한 악역으로, TV 드라마 <더 로우다운 The Lowdown>에서는 광기 어린 이야기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오랜 파트너인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연출한 달콤하면서도 멜랑콜리한 뮤지컬 영화 <블루문>에서는 뉴욕 5번가의 전설을 연기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지금까지 호크와 아홉 편의 작품을 함께했다. 두 사람은 1993년 어느 날 친구를 통해 만나 그날 새벽 4시 반까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얼마 후 링클레이터는 한 남자와 여자가 기차에서 만나 비엔나의 밤거리를 거닐며 사랑과 삶의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독특한 시나리오를 호크에게 보냈다. 그 시나리오는 우리 모두가 아는 훗날의 <비포 선라이즈>(1995)다.
“그 시절 에단은 정말 많은 주목을 받았죠. 가장 ‘핫’한 배우였잖아요.” 링클레이터가 회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어요. 웨스트 빌리지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할리우드 스타의 흔적이라곤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비트닉(Beatnik, 비트세대) 그 자체였거든요.” <비포 선라이즈>의 대본은 두 배우의 대화로만 이루어진다. 드라마틱한 사건도, 화려한 액션도, 감초 같은 매력의 조연도 없는 철저히 대화 중심의 영화다. “세대를 뒤이을 생각을 가진 경력주의자라면 ‘이건 좀 위험한데? 커리어에 타격을 줄 수 있으니 하지 말아야겠다’며 도망쳤을 겁니다. 하지만 에단은 ‘이걸 어떻게 잘 해낼 수 있을까?’라고 물어봤죠.” 링클레이터가 그때를 떠올렸다. “그것이 바로 스타와 예술가의 차이죠.”
최신작인 <블루문>은 20세기에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와 함께 ‘마이 퍼니 밸런타인 My Funny Valentine’ 같은 쓸쓸한 명곡들을 세상에 남기며 멜랑콜리를 재정의한 불운한 작사가 로렌츠 하트의 전기 영화다. 1990년대 동료 스타들이 3억 달러짜리 블록버스터에서 ‘스턴트맨’으로 칭송받으며 활약하는 동안, 호크는 시적이고 기묘한 소규모 작품에 출연하며 창작의 대가가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떠한 대가를 치렀는지 조심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예술에 관한 영화지만 이 영화 또한 예술 그 자체다. “로렌츠 같은 사람들은 마치 안테나와 같아서 혼란스럽고, 아름답고, 경이롭고, 슬프고,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모든 요소가 뒤섞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죠. 그러다 보니 뇌가 무너져버리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호크가 가만히 응시한다. “사실 우리 모두 그런 것들을 느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호크는 커리어 초반부터 천재들과 가까이했다. 그는 리버 피닉스와 함께 1985년 데뷔작 <익스플로러스>에 출연했고,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했다. 두 사람을 통해 천재성이 어떤 모습인지 배웠지만, 동시에 쇼 비즈니스가 연약하면서도 갈망에 찬 재능을 어떻게 끝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도 목격할 수 있었다. 호크는 자신이 파괴적 충동을 갖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운 덕분이라고 말한다. 또 지나치게 유명해지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는 <타이타닉>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맡은 배역을 오디션 봤지만 떨어졌다. 되돌아보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한다. “저는 레오만큼 그 성공을 잘 감당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는 말한다. “레오는 비틀스 같았잖아요.”

대신 호크는 자신의 창의성을 북돋워줄 수 있는 영화 제작자들에게 더 매력을 느꼈다. <비포 선라이즈>의 매력 중 하나는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호크와 줄리 델피에게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대사에 참여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덕분에 대사들은 더욱 시적일 수 있었고, 배우들은 보다 높은 급여를 챙길 수 있었다. “호크가 비엔나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이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했어요.” 링클레이터가 증언한다. “대충이었던 적이 없어요. 무언가에 도달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에단은 자신이 맡은 모든 일에 ‘올인’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죠.”
<비포 선라이즈>는 그렇게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러브 스토리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고, 링클레이터와 호크는 이후에도 2004년의 <비포 선셋>, 2013년의 <비포 미드나잇>, 그리고 12년에 걸쳐 한 가족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기록한 <보이후드>까지 함께했다. 이런 작품들이 호크의 역량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주었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서조차 그의 표정에는 진정성, 거친 매력, 지적이면서도 진실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크는 파티에서 예술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늘어놓는다고 고백한다. “강렬함, 살아낸 인생, 내면의 움직임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요.” 작품에 비친 호크를 보며 링클레이터는 말했다. “호크는 불타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에요.”
호크가 파파라치의 표적이 될 뻔했던 순간은 우마 서먼과 결혼했을 때인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였을 것이다. 그러나 Y2K 타블로이드 문화가 한창이었던 그 짧고도 아찔한 시간은 오히려 그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알게 해줬을 뿐이었다. “매우 굴욕적이었어요. 긍정적인 말을 해줘도 굴욕적으로 느껴졌어요.” 결국 2003년에 끝난 둘의 관계는 사실상 영화의 매력을 좇은 결과였다고 한다. 둘은 1997년 작 <가타카>를 함께 찍으며 사랑에 빠졌다. 배우들이 현장에서 종종 사랑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호크는 이렇게 답했다. “병 돌리기 게임해본 적 있으시죠? 빈 병을 돌려서 병 입구가 가리키는 사람과 무언가 하는 게임. 저희가 하는 일에는 어떤 친밀감이 생겨요. 상상력에서 비롯된 매우 강렬한 친밀감이죠. 위험하고 짜릿하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삶의 온도를 확 끌어올려 주죠. 마치 여름 캠프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달까요. 하지만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일상과는 전혀 연관이 없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거든요.”
호크는 한 번도 ‘미션 임파서블’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의 주연을 맡은 적도, 데킬라 브랜드를 론칭한 적도 없다. “저는 스스로를 ‘무비 스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스타’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제 이름으로 상표권을 갖고 수백만 달러를 버는 건 저의 꿈이 아니에요.” 심지어 그의 필모그래피 중 그나마 가장 대중적인 블록버스터라 할 수 있는 <트레이닝 데이>에서도 호크는 덴젤 워싱턴의 조연 자리에 만족했다고 말한다. 호크는 2002년 이 영화로 오스카 후보에 올랐지만 황금 트로피를 들고 집에 간 배우는 덴젤 워싱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크는 후보에 오르면서 그 덕분에 동료들로부터 진심 어린 격려를 받은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현장에 나와 최선을 다하면 누군가는 알아봐준다는 증거가 되었다고도 덧붙인다. “저는 캠페인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저를 위해 광고를 내지 않았죠. 지금은 정치적으로 변질된 것 같기도 해요. 하비 와인스타인을 탓해야지 어쩌겠어요. 그가 상을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업계는 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투자하기 시작했잖아요.”
<블루문>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수상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호크는 캠페인, 그러니까 홍보를 위해 순회를 도는 일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저는 이 작품에 자부심이 있거든요.” 어쩌면 그는 완벽한 수준의 명성에 정착한 듯도 보인다. 때때로 레드 카펫에 서야 할 만큼의 유명세는 있지만 <TMZ> 같은 가십지가 쫓아다닐 정도는 아니다. 덕분에 그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뜻밖의 장소에서 관객을 만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동안 에단 호크라는 배우는 수년에 걸쳐 북유럽 신화 속 전설적 왕(<더 노스맨>(2022)),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테슬라>(2020)), 쳇 베이커(<본 투 비 블루>(2016)), 그리고 햄릿(<햄릿>(2000)) 역을 맡아왔다. “살면서 정말 불편했던 시기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저 웃으며 돌아볼 수 있어요.”

이전에는 또한 공포영화 <시니스터>(2012)나 <더 퍼지>(2013), <블랙폰>(2021)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딸 마야를 주연으로 세워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 삶을 그린 영화 <와일드캣>(2023)를 연출했고,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는 아마 미국의 전설적인 컨트리 뮤지션 멀 해거드 Merle Haggard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한창 작업 중일 것 이다.(이 다큐멘터리를 위해 윌리 넬슨을 인터뷰했다 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다고 호크는 자랑했다.)
게다가 그래픽 소설 두 권을 포함해 여섯 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2024년에는 테일러 스위프트와 포스트 말론의 뮤직비디오에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했다. “저를 공포영화 전문 배우라고 생각하는 사람 도 있고, <트레이닝 데이> 이후 뭘 했냐고 묻는 사람 들도 있었죠. 또 이들은 제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와만 작업한다고 생각하죠.” 호크가 웃는다. “제 커리어에 약간 거미줄처럼 뻗어 있잖아요.”
그는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가지고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업계의 현실을 마주하는 용기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흥행이 저조했던 폴 슈레이더의 <퍼스 트 리폼드>(2017)에서 절망에 빠진 목사를 연기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출연한 넷플릭스 스릴러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2023)로 첫 주에만 수천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미니시리즈 <문나이트>를 통해 MCU에 진출했을 때는, 이전에도 비슷한 역할 제안을 받았지만 ‘제한’ 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고사한 적이 있다고 밝힌다. “돈은 결국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정해져요. 자유를 위해 쓸 수도 있어요. 제가 작업한 최고의 영화 중 상당수는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어요. 동시대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예술적 진정성을 지킨다는 건 균형의 문제예요.” 호크가 털어놓는다. “폴 슈레이더가 당신을 캐스팅하고 싶어도 돈을 못 구할 것 같다면 그 역할은 다른 사람한테 가겠죠. 수수께끼 같은 거예요. 거기에 너무 신경 쓰다보면 맥락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이번 가을, 호크는 스트리밍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는다. <레저베이션 독스>의 공동 제작자인 스탈린 하르조가 만든 FX 신작 <더 로우다운>이다. 스트리밍은 인디 영화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배우들에게 종종 까다로운 영역으로 통하지만 이번 작품이 결코 ‘항복’은 아니다. 오클라호주 털사에서 지역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한 음모론자이자 시민 기자의 이야기를 담은 기괴한 드라마로 “물론 여기에 앉아 독립영화가 예전만 못하다고 투덜댈 수도 있어요”라고 호크는 말했다. “하지만 인디 정신이 어디서든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죠. 스탈린처럼 말이에요.”
<더 로우다운>에서 호크는 미치광이 역할을 맡았다. 그가 첫 화에 등장하는 상당 부분은 멍들고 피 범벅이 된 얼굴로 나온다. 마치 방금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난 듯 장면 사이를 오가며 화면에 몽황적인 자연스러움을 불어넣는다. “이 캐릭터는 에단과 제 가 매력을 느끼는 것들을 상징하고 있어요. 마법과 아름다움, 그리고 광기와 어둠의 경계를 걷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 캐릭터는 삶의 면도날을 탐색하거든요.” 스탈린 하르조가 설명했다. “호크가 표현해내는 연기 방식은 중독적이죠.”

<더 로우다운>이 호크의 가장 거친 모습을 보여 준다면 <블루문>은 그의 차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상실과 고립이 오가던 1943년 어느 날 저녁을 통해서 말이다. 호크가 연기한 로렌츠 하트는 브로드웨이의 명소 사디에서 열린 <오클라호마!> 개막식 파티에 참석한다. <오클라호마!>는 하트의 오랜 파트너인 리처드 로저스가 작곡한 대히트작이다. 로저스와 하트는 1920~1930년대에 수많은 뮤지컬을 함께 썼지만, 1940년대 초반부터 로저스는 점차 실용적이고 함께 작업하기 쉬운 작사가이자 대본가인 해머스타인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이후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은 여러 작품에 함께한다. 그리고 영화는 로저스와 하트가 함께 작업한 불멸의 명곡 중 하나인 ‘블루문’에서 제목을 따온 동명의 작품이 성공을 거두자 하트가 절망과 술에 빠져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거릿 퀄리, 앤드루 스콧, 바비 카나베일이 연기한 캐릭터 들이 등장했다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사랑과 음악, 삶에 대해 읊조리는 하트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질적으로 1인극인 셈이다. “그는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 있어요.” 퀄리가 카메라 앞 호크를 떠올렸다. “정말 놀라운 연기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아일랜드에서 촬영하는 동안에는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며 가능한 한 매번 풀충전 상태로 촬영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로렌츠 하트로 변신하기 위해 머리를 밀어 대머리처럼 보이게 했고, 키도 152센티미터로 줄여야 했는데 이 부분은 다양한 무대 기술을 통해 구현할 수 있었다. 알코올 사용 장애로 괴로 워하던 폐쇄적이고 성취욕이 강했던 천재 하트는 매력적이면서도 천박했고, 사랑스럽다가도 창피해했으며, 유쾌하다가도 불쾌했고,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격렬하게 동요했다. 호크는 매력적일 정도로 악랄하 다가도 한순간에 처절하게 초라해진다. “저는 모든 걸 쏟아내야 했어요. 그 영화는 제 모든 걸 요구했죠. 저는 몇 달 동안 세상 밖에 나가질 못했어요.” 그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냥 사라져 있었죠.”
어떤 의미에서 <블루문>은 하트만큼이나 호크 를 향한 링클레이터의 러브레터라 할 수 있겠다.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온 절친이 가진 가능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무대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미니멀해 보이는 영화지만, 에단의 입장에서 는 맥시멀한 작업이었을 거예요.” 링클레이터가 설명했다. “자신의 큰 부분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자신 이 상상한 삶을 채워 넣어야 했거든요. 그것이 예술가가 하는 일이죠. 일종의 마법 같은 전이죠.”

혼잡했던 점심시간이 끝났다. 비가 내리고 난 뒤, 호크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고 바에 남아 있는 몇몇 손님을 제외하면 카페는 우리 둘뿐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셀피를 요청하거나 그의 작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하며 방해하지 않았다. 호크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명성이 때로는 상황을 왜곡시키기도 한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잡기 위해 현실 자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제 아내는 정말 유머러스 해요. 가끔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 제가 ‘방금 저 웨이터 참 무례하네’라고 말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아내가 말해주죠. ‘무례하지 않았어. 그냥 당신을 못 알아 봤던 거지. 그게 정상이야. 당신은 사람들이 항상 웃거나, 뭔가를 더 챙겨주거나, 줄을 건너뛰게 해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거야.’ 그런 호의의 문제는 ‘정상’ 이 차갑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경기 티켓을 받았는데 앞줄이 아닌 열 번째 줄에 앉아 있으면 누가 엿 먹이는 기분이 들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호크가 인생에서 받은 가장 값진 선물은 그에 딱 알맞은 수준의 ‘성공’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매일 마주하는 고단함으로부터는 그를 어느 정도 지켜주면서도, 동시에 그를 보통의 경험에서 완전히 단절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남들은 누릴 수 없는 이상적인 사고와 순수한 호기심를 잃지 않고 간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들이 바로 에단 호크라는 사람의 본질이에요.” 하르조가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냉소적으로 변하거나 번아웃 을 겪거든요. 커리어를 쌓으면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그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너무 편안하지도 너무 지치지도 않는 황금 비율의 균형을 유지하며 늘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상태. 그러한 상태는 축복처럼 들린다. “젊고 잘생긴 남자는 늘 여자들과 어울린다고 가정하죠. 그래서 아무도 당신을 응원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당신이 무너지는 걸 바랄 거예요.” 링클레이터가 짚는다. “그럴 땐 그냥 자기 페이스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죠.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해냈죠.”
이제 50대 중반에 들어선 호크는 자신의 선택이 (<기묘한 이야기>로 잘 알려진 그의 딸, 배우 마야 를 포함한) 젊은 배우들에게 하나의 청사진이 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한다. “흡연자에게 ‘담배 피우지 마라’라는 잔소리는 의미 없죠. 돈 때문에 일하면서 ‘돈을 좇지 말라’는 이야기도 귀에 들리지 않잖아요.” 그럼 우리는 어떤 이야기로 귀를 열 수 있는 걸까. “‘인생은 기니, 실수할 시간은 충분하다.’ 제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에요.”
폴 메스칼이나 제이콥 엘로디와 같은 할리우드의 라이징 스타들이 흥미로운 배역과 진지한 연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호크에게도 흥미로운 지점이자 업계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진심을 다하는 젊은 사람들을 좋아해요. 알고리즘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도요. 예술에 인생을 바친다는 건 자기 자신과의 연결을 유지하겠다는 일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원할 것 같은 일에 맞추려고 애쓰는 일이 아니라.”
<블루문>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의 지속적인 목적 의식을 찾은 호크는 이제 모든 영화를 인생을 걸어야 하는 거대한 성명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났다. 영화를 만들고, 내놓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무서운 스릴러에서 과장된 연기를 하다가 기괴한 TV 쇼에서 광기를 드러내고, 또 다른 시도를 하는 것.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멀 해거드 다큐멘터 리 작업을 위해 곧장 편집실로 향할 것이라 말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서. “아직 최고의 순간이 오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보면 늘 최신 앨범이 최고의 앨범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단지 최신 유행에 빠져 있어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카페 문을 열고 나와 회색빛 뉴욕 거리를 함께 걸으며 호크가 이어 말한다. “제가 늘 그렇게 느끼거든요. 항상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