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함과 우울함이 공존하는 매혹적인 조합은 매년 이 앨범을 주섬주섬 꺼내어 듣게 한다. 60년 전 오늘 발표된 빈스 과랄디의 이 애니메이션 스페셜 재즈 사운드트랙은 감정적으로 복합적인 연말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크리스마스 음악을 듣는 경험은 길거리 음식을 먹거나 디저트 와인을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 조금일 때는 좋지만, 너무 깊이 빠져들면 금세 느끼함에 질려버린다. 크리스마스 노래들은 토끼가 커피를 마신 것처럼 쉴 새 없이 업되거나, AI가 만들어낸 축하 카드처럼 지나치게 달콤하고 감상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는 다르다. 재즈 피아니스트 빈스 과랄디가 만든 이 앨범에는 분명 사랑스럽고 경쾌한 순간들이 있다. 스케이팅 씬에서 빠르게 내리는 눈처럼 멜로디는 하강하고, ‘Christmas Is Coming’에서는 피아노 연주가 몰아친다. 무엇보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분명한 우울의 음색이 있다. ‘My Little Drum’의 시작은 밝지만 어딘가 사색적인 피아노 위로, 어린이 합창단이 의미 없는 “rum pum pum”을 반복한다. ‘Christmastime Is Here’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복잡한 화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앨범은 같은 제목의 피너츠 TV 스페셜의 사운드트랙으로, 바로 이달 60년 전 발표됐다. 이 스페셜은 원래 코카콜라의 의뢰와 후원을 받아 제작됐는데, 완성본을 본 TV와 마케팅 관계자들은 썩 만족하지 못했다. 웃음소리를 덧입힌 트랙이 없었고,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크리스마스의 상업화에 우울해하는 찰리 브라운을 중심으로 전개됐으며, 한 캐릭터는 킹 제임스 성경의 긴 구절을 낭독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음악도 문제였다. 과랄디는 피너츠의 창작자 찰스 M. 슐츠에 관한 미방영 다큐멘터리를 위해 작곡한 인연으로 참여하게 됐고,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오리지널 곡과 전통 캐럴, 스탠더드를 재즈풍으로 편곡한 버전을 함께 녹음했다. 이 음악 역시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명백히 들뜬 분위기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페셜은 큰 성공을 거두며 빠르게 클래식 반열에 올랐다. 사운드트랙 앨범의 인기는 꾸준히 상승해, 2022년까지 500만 장이 판매되었고,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음반 중 하나가 됐다.
사람들이 피너츠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축제 분위기의 재즈 앨범이 이런 수치를 기록하는 일은 흔치 않다.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의 마법, 그리고 그것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이 앨범을 이단아로 만드는 감정적 모호함에 있다. 존 루이스를 비롯한 브랜드들의 눈물샘 자극 광고들이 증명하듯, 크리스마스는 감정적으로 매우 강렬한 시기다. 선물과 파티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어떤 이들에게는 외로움이 더욱 선명해지는 시간이다. 몇 달 동안 부풀어 오른 기대에 비해, 질퍽하게 구워진 케이크와 오랜만에 만난 가족 간의 다툼 같은 현실이 찾아오며 씁쓸한 실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리고 매년 반복되는 거대한 의식처럼, 아이들이 너무 빨리 자라버렸다는 사실이나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는 친척들의 부재 같은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는 바로 그런 감정의 신경을 건드린다. 몇몇 곡에서 사색적인 구간이 갑자기 스윙하는 리듬으로 전환되는 방식은, 이 시기에 우리가 감정의 양극단을 탁구공처럼 오가게 되는 경험과 닮아 있다. 과랄디와 그의 협연자들의 연주는 훌륭하지만, ‘Christmastime Is Here’에서 들리는 삐걱거리는 업라이트 베이스와 드럼 브러시처럼, 과하게 매끈하기보다는 친밀하고 질감이 살아 있다. 일부 곡에 등장하는 어린이 합창단은 곳곳에서 음정이 살짝 어긋나 있어 오히려 매력적이다. 당시 어린이들은 녹음이 끝난 뒤 아이스크림을 보상으로 받았다고 알려진다. 귀엽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나름의 의식을 만들었다. 25일을 며칠 앞두고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를 틀어놓은 채, 미리 사둔 선물들을 포장하는 것이다. ‘O Tannenbaum’의 첫 화음은 이제 그 겹겹이 쌓인 복합적인 향수, 그러니까 기대, 평온, 우울, 그리고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뒤섞인 상태로 곧장 데려다주는 지름길이 되었다. 그 화음과 앨범 전체를 들으며 나는 미디어와 마케팅이 과장해 그려온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실제의 크리스마스를 듣는다. 기억과 의미가 흠뻑 배어 있는 하나의 의식으로서의 크리스마스 말이다. 가위와 테이프를 붙잡고 씨름하는 30분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너무 심각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충분히 깊은 시간이고,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는 바로 그 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