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터너의 가면 뒤에서 꼿꼿하던 작품들은 갈라졌고, 그 틈을 비집고 태어난 캐릭터들은 저마다 누군가의 별이 되었다.



2018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Fantastic Beasts: The Crimes of Grindelwald>에서 칼럼 터너 Callum Turner가 주인공 뉴트 스캐맨더 Theseus Scamander 역으로 등장했을 때, 그는 전형적인 런던 출신의 젠틀맨 이미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넘긴 슬릭백 헤어스타일과 헤링본 패턴이 들어간 두꺼운 스리피스 수트(거기에 커튼처럼 긴 코트까지!) 차림으로 습하고 차가운 런던의 골목골목을 누비는 모습은 ‘말쑥한 영국 남자’ 외에 다른 이미지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터너의 룩이 우리에게 꽤나 익숙했다면, 그건 한국에도 방영된 BBC 드라마 <전쟁과 평화 War&Peace>(2016)에서 아나톨리 쿠라긴 Anatole Kuragin 역할로 당대(1800년대) 러시아 귀족의 근사하고 클래식한 룩을 소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터너가 출연한 시대극은 이것만이 아니다. 2020년에 개봉한 영화 <엠마 EMMA.>에서는 19세기 초, 영국 상류층의 모습을 소화했고, 최근엔 애플 TV+의 오리지널 드라마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 Masters of the Air>(2024)에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폭격기 파일럿, 존 이건 John C. Egan을 연기했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천천히 살펴보면 이 밖에도 시대극은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칼럼 터너는 <더 플레이 리스트 The Playlis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맞아요. 왜 이렇게 시대극을 많이 하느냐는 질문을 정말 자주 받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아마도 제 머리 스타일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 재밌는 건, 영화 <보트 속의 소년들 The Boys in the Boat>(2023)과 드라마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2024)를 연달아 찍었거든요? 그땐 정말 거의 그 시대에서 살다 온 느낌이었죠. 하지만 제가 시대극을 원하는 건 결코 아니에요. 제가 작품에 참여하는 기준은 늘 감독과 팀이었어요. 조지 클루니 George Clooney가 다음 작품에서 화성에 가자고 한다면 저는 당연히 따라갈 거예요.(웃음)” (영화 <보트 속의 소년들>의 시대 배경은 1940년대 초중반이다.)



어린 시절의 터너는 런던의 첼시 지역에서 자랐다. 첼시 태생의 꼬마 터너는 당연히 축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고, 또래 친구들과 다를 것 없이 학교와 축구장을 쳇바퀴처럼 오갔다. <플런트 FLAUNT>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어요.이웃과 축구팀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됐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 관계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족과 친구, 축구는 여전히 제 삶에서 중요하죠.” 터너가 모델 일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학교생활을 별로 즐기지 못했어요. 학교가 아닌 진짜 세상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거든요.” 당시 계약했던 에이전시는 그런 터너를 더 넓고 다양한 유럽 무대로 데려갔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럭셔리 브랜드와의 작업을 하나둘 시작하며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재밌었어요. 그런데 정작 패션 에 대한 진정한 열정은 없었어요. 솔직히요. 그건 일일 뿐이었죠.”


그런 그가 배우 일을 시작한 건 단편 영화 <Think of England>(2010)에 서 이름도 없는 ‘소년’ 역을 맡으면서다. 이후 정식 데뷔작으로 평가받는 단편 영화 <제로 Zero>(2011)에서 ‘토니 Tony’ 역으로 첫 영화 연기를 경험한다. 그 뒤로 몇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던 터너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건 BBC 드라마 <전쟁과 평화>에서 아나톨리 쿠라긴을 연기하면서부터다. 쾌락과 허영에 젖은,이중성을 가진 아나톨리 쿠라긴을 연기하면서 그는 그저 그런 ‘잘생긴 배우’가 아닌 ‘연기 잘하는 배우’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아나톨리는 책임감이 전혀 없는 귀족 캐릭터였어요.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즐기는 것’뿐이었죠. 겉으로는 다정하고 유쾌한 남자지만, 알고 보면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에요.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아나톨리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위험한 남자’는 종종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니까요.”


터너는 아나톨리 쿠라긴을 연기한 이후 차세대 영국 배우로 주목받는다. 무엇보다 ‘시대극’에 특히 잘 어울리는 외모 덕에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와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엠마>, <보트 속의 소년들>,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에 출연하며 ‘시대와 장르’를 대표하는 도전적인 역할들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연달아 얻는다. 그는 이 시간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점점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제야 ‘연기’라는 ‘기술’을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제 안에는 여전히 영화에 대한 강한 열정이 있어요. 좋은 배우, 더 나은 배우가 되고자 하는 갈망도 늘 품고 있죠. 저는 제가 배우로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해요. 더 많은 경험을 통해서요.” <플란트>와의 인터뷰 내용 중


터너의 최근 작품은 영화 <영원 Eternity>(2026)이다. 클래식한 시대 의상을 벗은 터너는 말끔하고, 위트 있으며, 다정하고, 사랑스럽다. 그가 연기한 루크 Luke는 사후 세계에서 사랑을 기다리는 순종적인 인물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에요. ‘시간’과 ‘기억’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유머리스하면서도 진중하게 다루죠. 마치 연극과 같은 리듬이 있어요.” <더 플래이리스트> 와의 인터뷰 내용 중


터너가 연기한 루크는 스물일곱 살에 갇혀 있다. 사망한 시간에 갇혀서 더이상 성장하거나 변하지 못한 채로 한 사랑을 기다린다. 1990년생, 올해로 서른 여섯 살인 터너는 루크를 어떻게 해석했을지 궁금했다. 이에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루크는 스물일곱 살에 사망한 인물이니까, 아직 첫 번째 새턴 리턴 Saturn return(점성학적 주기로 토성이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인 30년을 말한다)도 겪지 않은 나이죠. 그 시절의 저를 떠올려봤어요. 스물다섯에서 스물일곱 살 무렵의 저를요. 제 경우엔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죠. 실제로 저는 그 시기에 정말로 나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거든요. 루크가 저라면, 이런 시간이 사라져버린 거겠죠? 그렇다면 루크는 어쩌면 ‘껍데기 같은’ 상태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 안에 무엇이 꿈틀대는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스스로를 전부 이해하지 못한 그런 젊은 친구요. 바로 이 부분이 캐릭터를 이해하는 여정의 핵심이었어요.” 작품 안에서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 Montgomery Clift가 언급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터너 역시 클라크 게이블 Clark Gable이나 게리 쿠퍼 Gary Cooper 를 떠올리기도 했고, 당대 할리우드 스타나 마티네 아이돌 matinee idol과 같은 대상을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스물일곱 살의 혼란스러운 루크에겐 그런 존재가 커다란 이정표가 됐을 테니까 말이다.


터너는 올해에만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 개봉이 예정돼 있다. 카림 아이누즈 Karim Aïnouz 감독의 <로즈부시 프루닝 Rosebush Pruning>과 마크 젠킨 Mark Jenkin 감독의 <로즈 오브 네바다 Rose of Nevada>, 그리고 애플 TV+의 10부작 시리즈 <뉴로맨서 Neuromancer>다. 작품의 장르는 각각 드라마, 미스터리, SF로 당분간은 터너의 시대극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영 아쉽지만, 늘 더 나은 배우가 되기 위해 기꺼이 낯선 이야기에 몸을 던지는 터너의 얼굴을, 몸짓을, 목소리를 연속해서 만날 수 있다는 건 대단히 기쁜 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