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겨누는 대신 이렇게 내밀어보는 건 어때요?

“제 자랑 좀 그만하세요”
💬 부모님께 이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부모님이 어딜 가시든 제 자랑을 엄청 하시거든요. 무조건. 내가 그렇게 잘난 것도 아닌데. 당신들 이야기하시지. 할 이야기가 그거 밖에 없나? 부끄럽다기보다 그냥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한테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요. – Y, 1990년생
↳ Y님, 안녕하세요. 부모님의 자랑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부끄럽다기보다 그냥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표현하신 부분에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우리 마음은 종종 말로 옮기기 어려울 만큼 복잡해서, ‘그냥 기분이 나빴다’는 식으로 간단히 표현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일(Emotion Labeling)은 실제로 뇌의 감정 활성에 관여하는 편도체 반응을 줄이고, 이성적 사고를 하는 전전두엽 활동을 높여 감정 조절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모님께 내 진심을 상처 없이 전하고 싶을 때, 먼저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이 마음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는 뭘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연습이 시작일 수 있어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훨씬 선명해지고, 오해 없이 전해질 것입니다. (김예슬,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 부모님의 자랑이 부담스럽다는 건, 스스로를 겸손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과장되게 비춰지는 게 불편하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때론 그런 자랑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것 같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지요. 부모님은 사랑의 표현으로 자랑을 하셨겠지만, 그 방식이 오히려 마음의 짐이 되었다면 조심스럽게 말해볼 수 있습니다. “나를 아껴주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실 때마다 부담스러워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해주시는 걸 더 느끼고 싶어요”처럼요. 중요한 것은 상대를 탓하기보다 내 감정을 진심으로 전하는 방식입니다. 사랑의 방향이 조금만 바뀌어도 마음은 훨씬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권순재,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아빠가 뭐가 피곤하다고 자?”
💬 고 3 때 입시 미술을 했어요. 학교 수업 끝나면 학원에서 늦게까지 입시 미술을 하고 도서관 갔다 딱 집에 왔는데, 너무 피곤한데, 아빠가 소파에 누워서 주무시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이런 말하면 그렇지만 꼴 보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아빠한테 괜히 막 화를 내면서 소리 지르고 울었어요. 나는 잠도 못 자는데 아빠는 어떻게 마음 편히 자냐고. 아빠가 뭐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 입시에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 난 잠도 못 자는데 어떻게 혼자 마음 편하게 잠을 자냐고. 사실 아빠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냥 잘 시간이어서 잔 건데. 아빠도 일하고 와서 피곤한 건데. 그러고 나서 너무 후회했어요. 화풀이를 아빠한테 할 게 아닌데 해버린 게. 짜증이 났던 게 아니라 사실은 서운했던 것 같아요. – J, 2001년생
↳ J님, 안녕하세요. 진료실에서 감정을 이야기하다 보면 “짜증이 났던 게 아니라 사실은 서운했던 것 같아요”처럼, 마음 깊숙한 감정의 이름을 나중에야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2차 감정(Secondary Emotion)과 그 아래 숨겨진 1차 감정(Primary Emotion)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겉으로는 분노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종종 서운함이나 슬픔, 이해받고 싶은 간절함이 숨어 있기도 하죠. J님이 그날 느낀 ‘화’는 어떤 마음 위에 놓여 있었을까요? 너무 지치고 버거웠던 순간, 아빠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 이렇게 힘든데,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아’라는 서러움이 먼저였던 건 아닐까요? 감정의 진짜 얼굴을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표현은 더 정교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정말 내 마음일까?’ 이 질문이 앞으로 후회의 순간을 줄이는 단서가 되어줄 것입니다. (김예슬,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 “아빠가 뭐가 피곤하다고 자?”라는 그 마음은 분명히 진짜였고, 그 상황에서 터진 눈물과 분노는 억울함과 지친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라 봅니다. 입시라는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그 부정적인 감정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로 향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화풀이가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때를 돌아볼 만큼 여유 있고 성숙해진 지금 아버지께 짧게라도 그때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그땐 너무 힘들었어”라고 털어놓아 보세요.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이해를 통해서만 풀리기 때문입니다. (권순재,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다른 엄마들은 젊은데 엄마는 왜 나이가 많아?”
💬 저는 막둥이예요. 초등학생 시절 학부모 참관 수업 시간에 엄마가 오셨을 때 제가 물었어요.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 왜 이렇게 나이가 많아?” 순수한 마음으로 멋모르고 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마음이 좀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때가 계속 생각나요. 엄마도 이걸 기억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 J, 1995년생
↳ J님, 안녕하세요.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어린 시절의 한마디가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는 건, 그만큼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일 거예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그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생각하며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질 수 있지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반추는 흔히 후회와 자책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반추(Rumination)는 우울감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들도 있어요. 때로는 그런 경험이 쌓여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거나, 말을 조심스레 아끼는 사람이 되기도 하지요. 그렇게 마음속에 남은 감정은 때론 표현되지 못한 애정의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떠오르는 후회 역시 어머니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마음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대화는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어요. 진심을 전하기 위해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김예슬,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말은 종종 의도와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상처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을 너무 후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나이 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궁금한 건 솔직하게 물어보기 마련이잖아요. 비록 사려 깊은 표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더라도 그때의 당신은 엄마가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했기 때문에 다른 엄마들의 모습과 왜 다른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혹시 언젠가, 먼 훗날 그때의 그 이야기가 다시 한번 엄마와의 대화에 올라온다면 엄마에게 말해주세요. “그때 그런 말해서 혹시 상처받았을까 봐 늘 마음에 걸렸어.” 어렸을 때의 짧은 에피소드 하나가 지금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권순재,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나 서울 갈래”
💬 제가 독립한 후 본가에는 제 방이 없어서 가면 거실에서 자거나 했는데, 그날은 설 전날이었어요. 이미 오빠랑 동생, 친척들이 곳곳에서 자고 있어 제가 잘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추운 방에서 혼자 잤어요. 너무 서러운 거예요. 그런데다 오빠랑 제가 같이 잘못해도 아빠는 오빠보다 저한테 더 뭐라고 하는 것 같고, 그게 쌓이다 터졌어요. “나 서울 갈래” 하고 가방을 막 쌌어요. 아빠가 놀라시면서 왜 가냐고, “여기까지 왔는데 설은 지내고 가야지”, “뭐 먹고 싶어” 계속 달래시더라고요. 그래서 싼 가방은 풀었고, 나중에는 제가 너무 미안했어요. – L, 2001생
↳ L님, 안녕하세요. 내 방이 사라진 본가, 낯설고 차가운 방에서의 수면, 그리고 오빠보다 내가 더 자주 지적받는다는 느낌까지, 이미 여러 겹의 감정이 쌓여 있던 설 연휴였겠네요. 그렇게 축적된 서운함이 결국 짐을 싸는 행동과 “나 서울 갈래”라는 말로 터져 나왔을지 모릅니다. 감정을 오랫동안 억누르다 보면,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튀어나오곤 해요. 정신역동이론(Psychodynamic Theory)에서는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무의식에 남아 행동화(Acting Out)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갑작스러운 분노, 냉담한 말투, 비꼬는 표현 등이 그런 방식일 수 있지요. 감정이 커지기 전에 작게 나누어 표현하는 연습은 오히려 마음을 더 단단히 지키는 힘이 됩니다. “조금 서운한데요”, “마음이 무겁네요” 같은 짧은 문장들이 감정이 넘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작은 밸브가 되어줄 것입니다. (김예슬,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 방에 내 자리가 없는 것이 그리도 서러웠던 것은, 자리가 단지 방의 면적이 아닌 가족의 마음속에서 내가 차지하는 면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일수록 가족 안에서의 ‘내 것’은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첫 시작이 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남의 개념이 있어야만 내 것의 소중함이 생기지만 내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기 일쑤이고, 그러다 보면 가족 안에서 마음이 다치기도, 엉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가방을 싼 이유는 누군가 그 가방을 열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소동이 있었기에 당신은 당신의 가슴속을 가족들에게 열어서 보여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권순재,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왜 나는 이런 거 사줘?”
💬 예닐곱 살쯤,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아빠가 퇴근하면서 제게는 <어린 왕자> 책을 사다 주시고 동생한테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사다 주셨는데 그 책이 너무 탐나는 거예요. 그래서 “왜 나는 이런 거 사주고 동생은 저거 사줘?”라며 화냈어요. 그 순간이 지금도 떠올라요. 아빠가 시무룩해지셨거든요. 막 혼내거나 ‘싫으면 이리 줘’라고 하셨으면 생각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시무룩해지신 얼굴이, 그 순간이 미안해서 계속 생각나나 봐요. – H, 1996년생
↳ H님, 안녕하세요. 어린 마음엔 질투와 서운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장면이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는 건, H님이 그 관계를 아끼고 아버지를 단순한 ‘의무’나 ‘역할’ 이상으로 여긴다는 뜻일 것입니다. 성인이 된 지금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감정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처음엔 경계성 성격 장애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지만, 지금은 감정 조절과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변증행동 치료(DBT)에서는 ‘DEAR MAN’이라는 말하기 전략을 제안합니다. 상황을 설명하고(Describe), 감정을 표현하며(Express), 바람을 전하고(Assert), 긍정적 결과를 덧붙이고(Reinforce), 중심을 잃지 않으며(Mindful), 자신감 있게(Appear confident), 필요 시 대안을 제시하는(Negotiate) 방식입니다. 관계를 지키며 진심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김예슬,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 어렸을 때 엄마와 아빠는 슈퍼맨이었죠. 우리가 못 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고, 우리가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사람. 어떤 의미로 어렸을 때 보는 엄마와 아빠는 신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 커다랬던 등이 작아지고, 신적인 존재감 뒤에 숨어 있던 약한 인간의 모습이 조금씩 튀어나오면서 우리에게 복잡한 후회의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세월이 지나며 자식과 부모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일 뿐이니까요. 점차 부모님은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나와 나란히 서게 되면서 서로 인간과 인간의 감정 교류를 시작하게 됩니다. 조금 더 진솔하고 현실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거죠. 기억 속의 그 순간은 어쩌면 아버지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해하는 시작이었을지도 몰라요. (권순재,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적절한 결핍이 나를 조금 더 빨리 철들게 했어”
💬 며칠 전 가족끼리 술 한잔할 때 “너는 엄마를 걱정시킨 적이 별로 없어”라는 엄마 말씀에 그랬어요. “적절한 결핍이 나를 조금 더 빨리 철들게 했어.” 괜히 말했나, 다음 날 일어나니 아차 싶더라고요. 엄마는 바쁜 부모 대신 초등학생이던 제게 밥 안치는 법을 알려주셨던 일을 여전히 너무 미안해하시거든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가게를 운영하셔서 엄마 손이 필요하다고 느낄 시절에 엄마가 곁에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적절한 결핍이 나를 조금 더 빨리 철들게 했다고 생각하지만, 엄청 진심인 말이었지만, 막상 하고 나니까 ‘내가 너무 T였나’ 싶어요. – O, 1997년생
↳ O님, 안녕하세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는 기대를 품고, 감정과 욕구를 생략한 채 대화를 주고받곤 합니다. 비폭력 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 NVC)에서는 대화를 관찰–감정–욕구–요청 네 단계로 설명하고, 서사 치료(Narrative Therapy)에서는 말 뒤에 감춰진 정서적 맥락을 되짚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머니의 말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O님의 말에는 ‘서운함도 있었지만 잘 버텨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감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말 앞뒤에 있었을지 모를 감정과 욕구를 상상해보고, 마치 영화 대본의 괄호 안에 적힌 비언어적인 부분을 말로 덧붙여보는 일, 그것이 때로는 가장 진심에 가까운 대화가 될 수 있습니다. (김예슬,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 어떠한 결핍은 시간이 너무나 지났기에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핍을 떠올리며 처음에는 아파하다가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되고, 어떤 경우는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소화하게 되지요. “적절한 결핍이 나를 조금 더 빨리 철들게 했어”라는 말은 자기를 돌아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낸 성숙한 시선입니다. 이것은 냉정함(T)의 표현보다는 사려 깊음의 표현에 가깝지요. 부모의 부재가 철듦을 앞당겼다는 해석은 누군가에겐 슬픔일 수도 있지만 당신에게는 감사였던 것 같네요. 중요한 것은 당신과 부모 사이에는 그 감정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있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면 말해주세요.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품에서 따뜻함을 배웠지만, 조금 더 커서는 어머니의 등에서 책임감을 배웠어. 나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르쳐줘서 고마워.” (권순재,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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