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경이 고른 오늘의 BGM은 드뷔시 ‘아라베스크 1번’.

GQ 한국에 오면 꼭 즐기는 시간이 있나요?
EK 무조건 영화관에 가요. 그때그때의 개봉 작품들, 화제작들, 웬만하면 다 극장에서 보려고 해요. 요번에는 지금 계속 일이 있어서 아직 영화관에 못 갔는데 한국에 오면 일단 극장 사이트에 들어가서 예매 스케줄을 쫙 잡습니다.
GQ 혼자 터벅터벅 가서 보는 느낌이네요.
EK 예. 그냥 혼자 가서. 제가 하고 있는 업이기도 하니까 그 연장선상이라고 여겨요. 영화는 극장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OTT로 보는 편리함도 있지만 학생들이 독서실 가서 공부하듯이 저는 영화관 가서 영화 보고 새롭게 알아가는 것도 있고 얻어오는 지식도 있고. 여러 가지 의미로 한국에 오면 무조건 극장에 가는 패턴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GQ 며칠 전에 씨네큐브에서 <해피엔드> GV, 관객과의 대화 시간도 진행했죠?
EK 와, 영화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종종 말씀하시잖아요, 한국은 시네필의 나라라고. 정말 실감했어요. 제가 나온 작품은 아니라서 “저기···, 제가 여기 왜 왔나 싶죠?”라고 인사드리고 GV를 시작했는데(웃음), 저는 작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보고 너무 좋았고,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날 관객분들께 말씀드린 대로 저도 관객분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감독님과 배우분들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고, 그리고 관객분들의 질문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참여했어요.
GQ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각자의 감상, 각자의 생각, 각자의 질문이 흥미롭고 재밌어서요. 관객이자 배우로서 은경 씨에게도 자극되거나 인상 깊었던 질문이 있나요?
EK 맞아요. 그 관객분의 질문은 저뿐만 아니라 감독님과 배우분들, 참여하신 분들께 더 확 와닿았던 것 같은데 무엇이었냐면, 영화를 두 번째 보니까 의도적으로 하늘을 찍지 않은 듯했다. 하늘이 건물 사이로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의도하신 건가. “혹시 저만의 착각이면 죄송합니다”하셨는데 정확하게 보신 거더라고요. 감독님의 생각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더라고요. 그래서 와, 그동안 나는 영화를 어떻게 본 거지? 나는 뭘 본 거지? 어머.(웃음)
GQ 감독의 시선과 겹친 거군요.
EK 정확하게 보셨다고, 어딘가 막혀 있는 공간감을 연출하고 싶었다고, 의도를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소라 네오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보면서 ‘하··· 더 공부해야 되겠구나···.’ 저는 영화를 볼 때 그런 작은 디테일은 좀 보질 못하고 전체적인 뉘앙스와 분위기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이 스토리를 관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 하는지 그걸 중점적으로 많이 보는 편 같은데, 그런 디테일을 짚어주시니까 GV가 더 풍성해졌었어요. 맞다, 청춘 이야기인데도 푸르른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네.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겠구나 저도 좀 배우게 되는. 그 질문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GQ 심은경이라는 배우이자 관객은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라인, 메시지에 보다 먼저 마음과 눈이 가는군요.
EK 미장센도 물론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고요. 예를 들어 <서브스턴스>는 제가 진짜 너무 사랑하는 영화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다 사랑해요. 그래서 “한 장면만 꼽아주세요” 그러면 한 장면을 꼽을 수가 없어요. 다 사랑하니까.
GQ 등이 찢어지는 장면도.
EK 아우 짱이죠. 최고죠. 영화라는 건 결국 이미지인 건데, 이미지로서 표현되고 보여지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드러내야 하는 예술 매개체인데, <서브스턴스>가 그와 너무 일맥상통하니까. 제가 (<더 킬러스>를 함께한) 이명세 감독님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느낀 부분도 ‘영화=이미지’라는 게 있어요. 그럼에도 뭐랄까, 홀리게 된달까? 제 마음을 흔드는 건, <해피엔드>도 그렇고 말을 걸어주는 영화 같아요. 말을 걸어주는 영화에 동하게 되지 않나 싶어요. 그 대표적인 작품이 제게는 <애프터 양>이거든요.
GQ 어떤 말을 걸어오던가요, <애프터 양>이.
EK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건 무엇인 것 같아요? 존재한다는 건 뭘까요? 우리는, 당신은 어떤 기억을 갖고 계속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애프터 양>은 AI인 양이 갑자기 (전원이) 꺼지고 그 양의 메모리카드를 보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잖아요. 저는 이 영화에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OST가 흘러나온 순간 그냥 정지됐어요. 그때부터 그냥 쑥 빨려 들어간 것 같아요. 한때 제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너무 사랑했거든요. OST를 무한 반복해서 듣던 그 시절이 떠오르면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건 뭘까, 약간 띵해지더라고요.

GQ 덕분에 저도 보게 돼서 다행이다 싶은 작품을 만났어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새벽의 모든>. 은경 씨와 함께 다음 영화를 만드는 미야케 쇼 감독이 궁금해서 찾아보다가요.
EK 아 너무, 너무 좋았던. 그 영화도 제가 도움된 건 하나도 없고 그저 미야케 감독님과 배우분들, 많은 스태프가 만든 훌륭한 작품이지만(웃음) 미야케 쇼 감독님은 인간의 본질을 계속 탐구해나가시는 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GQ “인간은 누구나 마음에 싱크홀 같은 구멍을 갖고 있어” 하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어요. 그럼에도 하루하루 성실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힘을 받았고요.
EK 저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엔딩을 너무 좋아하는데, 케이코라는 청각 장애인 복싱 선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를 그려내는 시선에 어떤 동정심이나 감동을 짜내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좀 더 멀리서 객관화한 시선으로 그 캐릭터를 계속 바라보잖아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쉽지만은 않은 여정이 있겠지만 케이코는 그럼에도 살아갈 거예요. 또 그렇게 무너지고 아프고 힘들어도 살 거예요. 또 그렇게 연습하면서 살아갈 거예요, 케이코니까”라는 것을 영화 말미에 되게 많이 느끼게 해줬다고 생각해요. 동네 풍경을 보여주면서 엔딩 롤이 올라가잖아요. 그때 (복싱을 그만둘까 고민하던) 케이코가 계속 뛰는 듯한 숨소리가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 마을 백색 소음이 들리는 사이로 들려요.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케이코는 그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GQ 숨소리가 들린다는 걸 이제 알았어요. 엔딩 롤 때 이어폰을 뺐거든요.
EK 뛰는 소리가 약간 들려요. 케이코가 사는 동네 풍경을 쭉 보여주면서 “이 동네에서 계속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 삶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요” 하듯이요.
GQ 그래,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 싶은.
EK 네. <새벽의 모든>도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서로가 별로 얽히려고 하지 않지만 결국 인간은 이 세계에 살아가면서 얽힐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있고, 그러면 우리,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 간에 분명 있는 정,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녹아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 지금 시대가 좀 잃고 있는 것들을 많이 그려내시는 감독님이다 싶어요.

GQ 그 미야케 쇼 감독과 함께한 차기작 <여행과 나날>(가제)이 일본에서 11월, 한국에서 12월에 개봉 예정이죠.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하나의 여정이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요?
EK 일단 언젠가 감독님과 같이 작품을 찍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런데 올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함께 작품을 하게 돼서 어리벙벙했어요. 정말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실제로도 그런 어느 설국, 눈의 고장에 가서 찍은 것도 처음이었어요. 정말 눈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캐릭터에 그냥 자연스럽게 동화돼서 찍었다고 할까요. 그 자체로, 자연체로 들어가서 찍은 느낌이 많아요. 정말 꿈같아요. 이렇게 분위기가 좋고 온화한 촬영장이 얼마나 있을까, 배우뿐 아니라 모든 스태프가 여행하는 기분으로 촬영했다고 느껴요. (<여행과 나날>(가제)은 슬럼프에 빠진 각본가 ‘이’가 눈 내리는 여행지의 산속, 지도에도 없는 오래된 숙소에 가면서 생긴 이야기다.)
GQ 그런 여정 속에서 심은경은 어떤 여행자인가요? 가령 지도를 보지 않고 다니는 여행자처럼 촬영 현장에서도 그런다든지, 그 예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심은경이라는 사람을 여행자에 빗대어본다면 어떤 유형이에요?
EK 저는 실제로도 그렇고 여행을 가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좀 아니에요. 랭보 같은 사람도 절대 아니고.
GQ 산책을 사랑하는 랭보는 아니다.
EK 네. 랭보는 방랑벽이 있어서 여기저기 막 다녔다는데 저는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고(웃음), 지도 없이는 안 되고 겁도 많아서 길 잃으면 “어, 어떡해” 하는데, 신기한 게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지도도 있으면 좋겠고 안전한 곳에 가고 싶고 편안한 곳에 있고 싶은데, 뭔가 저를 당기는 힘이 알 수 없는 곳에 저를 놓는다고 해야 할까? 어떤 불가항력의 힘을 많이 느껴요. 저도 모르게. 상황들이 나를 내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 같아요. 그럼 이제 그 속에서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고 그 길을 잘 걸어서 빠져나오느냐는, 온전히 저에게 달린 거예요. 저만의 일인 거예요. 그런데 사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사는 게 항상 이런···, 그러니까 알지 못하는 곳으로 나를 이끄는 힘이 있고, 그 속에서 어떻게 잘 헤쳐 나오고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 같아요.

GQ 그러니까요. 아까 지도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의문이었던 게, 아주 대표적인 예로 <써니>(2011)로 대국민 사랑을 받고 나서는 갑자기 미국으로 가버리고, <수상한 그녀>(2014)로 또 대국민 사랑을 받고 나서는 일본으로 가버리고, 심은경이라는 인물은 본인이 어떤 방점을 찍을 때마다 완전히 핸들을 확 틀어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았거든요. 불가항력적인 힘이군요.
EK 네. 유학은 학창 시절 좀 더 이른 나이에 더 넓은 곳에서 경험해보면 어떨까 부모님과 상의한 계획적인 일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10대가 지나고 20대부터는 제가 예상치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 예상치 못함에 맞닥뜨렸을 때 20대 초반에는 많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상처가 되는 일도 있었고, 이걸 어떻게 잘 받아들여 이겨내고 나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게 전혀 없어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도 있었는데, 이게 계속 연속이다 보니까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아, 그냥 사는 게 이런 건가?’ 싶은 거예요.
GQ 하하하하. 사는 게 이런 건가!
EK 그러니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맨날 상처만 받고 살 수가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냥 이렇게 사는 건가’ 무뎌지게 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일본에 가게 된 건, 내가 다시금 새 출발하고 싶다, 이런 건 전혀 없었고, 저는 정말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어서 간 거였어요.
GQ 밴드가 하고 싶었다고 했죠?
EK 네. 그래서 일본에 갔는데 음악 활동을 하고 싶은 건 있지만 일단 내가 해온 것부터 하면서 천천히 봐야겠다 싶어서 몇몇 작품에 출연하게 됐고, 그중 하나가 <신문기자>라는 작품이었고, 정말 예기치 못하게 일본 아카데미상까지 받게 됐는데···, 그런데 다들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 거라는 걸 알면 그건 또 삶이 아니니까. 미야케 감독님과의 작업도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고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냥 그 힘에 계속 ‘아아’ 질질 끌려 다니면서 탕 놓이게 되는데, 그게 참 당황스럽기도 하고 좋은 순간들도 있으면서 고민이 될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그냥 ‘하··· 어떻게 또 이거를 잘 헤쳐나가야 될까?’ 해요. 저도 잘 몰라요. 제 스스로가 그걸 막 헤쳐 나가는 힘이 있다기보다는 저도 제 주변분들의 지혜나 도움을 받으면서 그렇게 또 살아가거든요. 거기서 배운 게 또 제 것이 되기도 해요. 인간은 그렇게 배워 나가고 그 힘으로 ‘그때는 내가 이걸 배웠지. 이런 얘기를 들었지. 그럼 다음에 이런 순간이 왔을 때는 주의를 해야 되겠다’ 이렇게 나침반을 삼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일련의 행위들을 반복해 나가면서 잊지 않고 잘 가지고 있다가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 작업이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GQ 사는 게 이런 걸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궁금했어요. 그런 마음이군요.
EK 중요한 건 유연한 자세, 저는 그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유연한 인간이 아니어서. 저는 대쪽 같은 사람이고 한번 아니면 아닌 거고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건데, 그런데 좀 유연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연기 부분에서도 그렇고요. 어릴 때는, 생각해보면 뭘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내가 왜? 뭐가 부족하지? 왜 안 되지? 왜 이러는 거지?’ 굉장히 골몰하기 쉬운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지금도 하고 있어요. 그냥, 그냥 사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해. 그냥 살아”라고 하면 예전에는 그 말에 되게 반박을 많이 했어요. 왜? 왜 그냥 살아야 돼? 난 그냥 살 수가 없는데? 왜 그냥 해야 돼? 난 싫어. 그러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그냥 할 수가 있어? 왜! 그 말에 엄청 예민해서 혼자 폭발한 시기도 있었지만(웃음), 제 자신 안에서만 계속 탑을 쌓아놓고 있는 걸 조금 열어두고, 작은 틈이라도 만들어두고, 타인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구나. 나하고는 조금 다른 의견이지만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편하게, 말 그대로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어요. 결국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사람과 사람이 얽혀서 살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 관계들을 맺고 살아갈 것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나만 생각하지 않고 주변을 잘 보고 소통하고 감사할 줄 아는지, 그게 중요하다고 느껴요. <해피엔드>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데 제가 영화를 두 번째 봤을 때 너무 좋았던 캐릭터가 톰이에요. 다섯 명의 친구 무리 속 한 명인데, 제가 생각했던 유연한 자세와 성격의 소유자 같았어요. 친구들 사이에 균열이 일고 서로 점점 멀어져감을 느낄 때 톰이 그래요. “같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잖아.” 어우를 줄 알고 보듬을 줄 아는 사람 같아서 마음이 많이 갔어요. ···제가 말을 너무 두서 없이 길게 해서 어떡하죠? GV 때는 그래서 원고를 준비하거든요.

GQ 아뇨, 천천히 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이 녹취를 그대로 받아 적어도 온전한 문장이 되겠다. 실제로 <더 킬러스> 각본집 서문도 직접 썼잖아요.
EK 아니, 그 일도 갑자기, ‘왜 이걸 나보고 쓰라는 거지?’ 이랬어요.
GQ 실제로 그 물음으로 시작되죠, 글이.(웃음)
EK 그게 진짜예요. 제가 쓰면 안 될 것 같다고,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아니 이명세 감독님이 대표로 쓰시면 될 텐데 내가 왜 써야 되지, 그랬어요.(<더 킬러스>는 이명세 감독을 필두로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을 모티프로, 배우 심은경을 페르소나로 하여 장항준, 김종관, 노덕, 윤유경, 조성환 6명의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다.) 내가 쓰는 게 실례이지 않나 했는데 어쨌든 참여했으니 써보라고 하셔서 촬영하면서 제가 느낀 부분을 진솔하게 적은 것뿐이었는데, 제 소양이 너무 부족해서 아직은 좀···. ‘아직은’이라기보다도 저는 일단 제가 하고 있는 일부터 좀 잘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연기부터 좀 잘하고 그다음 스텝을 밟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셰프님들이 어떻게 하면 궁극의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시는 것처럼 저는 어떻게 하면 궁극의 연기를 펼칠 수 있을까, 그게 저의 가장 큰 관심사고 목표예요.
GQ 어떻게 하면 궁극의 연기를 펼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담백하게 적은 그 글이 떠올랐어요.
EK 아··· 감사합니다. 그거밖에 없어요, 제가. 그거밖에 없습니다.
GQ 밴드 이름은 정해뒀어요?
EK 그게 그냥, 원맨밴드를 생각했어요.
GQ 보컬과 기타를 혼자 하는?
EK 보컬밖에 할 수가 없지만(웃음) 그냥 원맨밴드. 언젠가 꼭 하고 싶어요.

GQ 요즘의 심은경에게 BGM을 붙여본다면 어떤 노래를 고르겠어요?
EK 결국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 Arabesque No.1’을 떠올리게 돼요. 드뷔시라는 작곡가는 제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클래식에 입문하게 된 계기이기도 해요. 그의 연주 앨범, 전집, 거의 다 모았어요. 그중에서도 ‘아라베스크 1번’을 잊을 수가 없는 게 처음 들었을 때 뭐랄까···, 느꼈던 그 감정, 감각이 아직도 선명해요.
GQ <애프터 양>에 빠진 계기도 그렇고, 어째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그리 깊이 각인됐어요?
EK 처음 본 게 중학교 2학년 때거든요. 심지어 비디오 가게에서 빌린 VHS로 봤어요. 그때는 영화를 지금처럼 깊이 이해하던 시기도 아니었는데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전혀 다르다고 느꼈어요. 그런 만듦새의 영화를 그때 처음 봤어요. 영화 속 인물들, 특히 음악을 사랑하고 그 음악에 빠진 아이들의 모습이 제 자신과 너무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음악을 들으며 혼자 몽상하면서 저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거든요. 그 작품을 계기로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제게 영화와 컬처라는 세계를 처음 열어준 기억의 시작이에요. 그 영화 전체에 울려 퍼지던 곡이 ‘아라베스크 1번’이에요. 그래서 잘 못 들어요. 마음이 힘들어서 잘 못 듣겠어요.
GQ 마음이 왜 힘들어요? 너무 좋아서 힘든 건가?
EK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슬퍼서. 가보지 못한 어떤 시대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것 같고, 어떤 그리움 같은 게 떠오르면서, 그래서 자꾸 마음이 힘들어져요. 어떻게 보면 <애프터 양>에서 양이 처음 들은 음악을 계속 기억하는 것처럼 저한테도 ‘아라베스크 1번’이 그런 음악인 거죠.
GQ 당신을 존재하게 하는 건 무엇인지 <애프터 양>이 말을 건네는 것 같다고 했죠. 그 답 중 하나가 은경 씨에게는 ‘릴리 슈슈’와 그때의 기억들 같네요.
EK 평생 못 잊을 첫사랑 같은. 이제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다시 봐도 더 이상 그때와 같을 수 없다는 걸 느껴요. 그 시기를 통과했기 때문에. 하지만 처음으로 영화라는 세계를 마주하게 하고 그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든 건 분명해서, 어딘가에는 제게 잔상으로 남아 있어요. 저의 BGM을 고르라면 그래서 결국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 같아요. 제게 처음으로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을 선물한 곡. 어떻게 이렇게 슬픈데 아름다울 수 있지? 그게 늘 저를 무너지게 해요. 그게 늘 저를 벅차오르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