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GQ KOREA HEROES – LEE JUNG HOO
오늘도 이정후는 1루 베이스를 밟는다.

“강하게 밀어 쳤습니다! 높게 떴고, 그의 공이 아름답게 날아갑니다. 홈런입니다!” 이정후가 친 공이 오라클 파크 오른쪽 담장을 넘어갔다. 7회 말, 4점 차로 앞서고 있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바짝 쫓는 귀중한 2점 홈런이었고, 전날에 이어 이틀 연속 터진 홈런포였다. 이정후를 만나기 하루 전, 마치 웰컴 선물처럼 전해진 홈런 소식은 오늘 그에게 붙인 ‘히어로 HERO’라는 타이틀과 꼭 어울렸다. 좀처럼 쉬는 날이 없는 빽빽한 메이저리그 스케줄을 떠올려봤을 때, 어쩌면 오늘 <지큐>가 이정후와 만나는 건 행운 같은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시즌 6호 홈런과 함께 우뚝한 기록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지금의 이정후’를 만나는 건 더욱 특별하다. “처음엔 힘들지 않을까 싶었어요. 경기 일정을 생각하면 정말 쉬는 날이 없거든요. 그러다 한편으론 이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죠.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 반가워요. 그런데 저, 촬영 시간은 좀 짧게 해줄 수 있을까요?”

<지큐>도 그의 루틴을 깨고 싶진 않았다. 48안타, 6홈런, 29타점으로 타율 2할8푼 6리를 기록 중인 지금의 좋은 흐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상승세가 지난 8일, 시카고 컵스전부터 11일 미네소타 트윈스전까지 12타석 연속 무안타로 침묵한 뒤 맞은 반가운 기세였기에 더 그랬다. 이정후의 정중한 부탁에 힘을 실어주고 싶어 카메라가 쉬는 사이사이에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히어로라는 타이틀은 마음에 들어요? 이정후 선수에게 히어로는 과연 누구일지 궁금하네요.” 질문을 들은 그가 수줍게 웃는다. “한국에서 야구했을 때의 나?(웃음) 이건 아무래도 구단 이름이 ‘히어로즈’여서 더 그런 것 같아요. 키움 히어로즈. 히어로즈에서 주축 선수로도 활약했으니까. 그래서 영웅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같은데요? (미소)” 장난 섞인 대답이었지만 진심이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2017년부터 2023년까지, 넥센 히어로즈와 키움 히어로즈 시절의 이정후는 표현 그대로 팔팔했다. 통산 타율 3할4푼, 5백15타점, 6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누가 뭐래도 KBO를 대표하는 강타자이자 스타 플레이어였다. 무려 7시즌 동안 3할대 타율을 유지했으며, 타자로서의 모든 기록은 늘 상위에 랭크됐다.


이정후는 그런 ‘영웅’이 되기 위해 어떤 시간들을 지나왔을까. “그런데 사실 저는 영웅이나 슈퍼스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야구 선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이를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한 번도 없었고요. 그냥 야구가 너무 좋아요. 제가 뭐든 기여해서 저희 팀이 승리하고, 또 팀을 응원해주시는 팬 분들이 기뻐하면 저는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매 게임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매 타석, 매 게임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 사이 메이저리그에 와 있더라는 그의 말이 결코 그저 그런, 겸손한 인사치레로 들리지 않는 건 기록이라는 증명서가 있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맞은 이정후에게 꿈에 대해 물었다. 메이저리거라는 꿈을 언제부터 품었는지 궁금했다. “메이저리거요? 아휴, 막연했어요. 메이저리거가 되겠다고 꿈꿨다기보다 그냥 메이저리그라는 멋진 곳이 있구나, 정도? 그래서 어릴 때 떠올린 메이저리거의 모습은 어땠는지 사실 기억이 나진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메이저리거가 됐고요. 그래서 지금요? 너무 행복하죠.” 메이저리거가 꿈은 아니었지만 그가 들인 투명한 노력은 이정후를 메이저리그에 가져다 놨다. 2024년 3월 29일은 이정후의 메이저리그 첫 타석이었다. “데뷔전이라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어요. 그냥 한 걸음 더 내딛었다는 느낌. 이런 욕심은 있었어요. 앞으로 더 잘해서 이곳에서 오래오래 야구할 수 있는 선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요.” 메이저리그는 전 세계에서 야구 꽤나 한다는 ‘괴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 괴물들이 겨루는 리그에서 이정후는 당당하게 등 번호 51번을 달고 주전 외야수로 뛰고 있다. 또 최근엔 팀에서 4번 타자로 기용되며 팀 내 가장 뜨거운 방망이로도 인정받고 있다. “저도 가끔 신기하긴 해요. TV로만 보던 선수들과 같이 플레이를 하고 있으니까요. 맞아요. 솔직히 종종 믿기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주눅 들거나 기죽진 않아요. 불필요하죠. 그저 한 경기, 한 경기 열심히 뛰자는 생각만 하고 있어요.”

이토록 실력도 멘털도 단단한 이정후지만 작년, 그에겐 끔찍한 시련이 있었다. 5월 12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제이머 칸델라리오의 홈런성 타구를 쫓다 펜스에 크게 부딪치며 쓰러졌다. 이후 몇 차례의 구단 브리핑이 있었고 결국 5월 17 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구단은 이정후의 어깨 관절 수술을 공식 발표하며 시즌 아웃을 확정했다. 총 37경기를 소화하며 38안타, 2홈런, 8타점으로, 평균 타율 2할6푼2리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던 그였기에 팬들은 그의 메이저리그 루키 시즌이 이토록 허무하게 마무리되는 걸 크게 아쉬워했다. 그리고 분명한 건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본인, 이정후였다는 것. “재활에만 집중했어요. 오로지 경기 생각만 하면서요. 경기를 뛰던 순간, 경기장의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재활, 재활, 재활. 달리 도리가 없었어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죠.”


한창 주목받으며 기대치를 끌어올리던 이정후의 루키 시즌이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면서 언론과 팬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2025시즌으로 옮겨왔다. 시범 경기부터 이정후의 부활을 두고 여러 의견이 요란하게 부딪혔다.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를 고르라면 그건 단연 이정후였다. 그리고 들썩이는 여론들을 잠재운 것도 이정후였다. “재활 기간 동안 디테일하게 어떤 노력들을 했고, 어떤 시간들을 지나왔는지 설명하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건 그 시간들이 지금 제게 절대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무언가를 했던 게 아녜요. 이전에도 해왔던 것들을 계속해서 이어왔을 뿐이죠.” 재활은 전적으로 선수의 몫이다. 어쩌면 선수 생명이 걸린 재활은 그래서 간절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구단은 모든 지원과 역량을 총동원한다. 하지만 불편하게도 그런 중요한 재활 과정을 흔드는 존재들이 있다. ‘기대’라는 말로 포장된 외부의 시선들이다. “신경 쓰지 않아요. 저는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집중하고, 노력하죠. 그게 다예요. 경기 외적인 부분들은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요. 음, 대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해본 적 없고요. 오로지 시합만 생각하죠. 저는 야구 선수니까요.”


헤어스타일을 다듬는 이정후에게 조금은 어려워할 법한 질문을 던졌다. “이정후가 가진 많은 재능 중 변치 않았으면 하는 건 뭐예요?”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통해 말한다. “꾸준함이요.” 언론은 이정후를 자주 ‘천재 타자’로 묘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그가 들려준 이야기 중 가장 많은 내용은 ‘노력’에 관한 것이었다. “노력도 재능이라고 하잖아요. 생각해보면 제가 야구를 대했던 태도는 언제나 ‘꾸준함’이었어요. 어려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그래서 운동선수로 그라운드에 설 때까진 이 꾸준함을 늘 유지하고 싶어요. 한국에서 뛸 때 많은 분이 저의 장점으로 ‘꾸준한 성적’을 꼽아주셨거든요? 메이저리그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러려면 네, 꾸준해야겠죠?”

이정후는 지나온 시간을 믿는다. 그가 들인 꾸준한 노력들을 믿는다. 그런 이정후가 오늘도 1루 베이스를 밟았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가발을 쓴 그의 팬클럽, 후리건스는 그가 타석에 설 때마다 ‘오늘도 1루 베이스를 밟는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