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얼굴로 만나서 좋았어요.”

GQ 먼저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오승욱 감독님도 감독상을 수상하셨고요.
DY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희 리볼버팀은 그날 난리가 났어요. 노미네이트도 5개 부문이나 됐고요. 새벽 1시에 다들 모여서 파티 했어요. 정말 너무 기뻤어요.
GQ 이번 상에 어떤 의미를 새겨본다면요.
DY 요즘 극장 상황이 안 좋잖아요. 편 수도 줄었고요. 그런 와중에 극장 영화를 찍었다는 거요. 그것만으로도 저한테는 큰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GQ 시간을 되감아보면 오승욱 감독님께 먼저 작품 제안을 하셨다고요. 유쾌하고 통쾌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고요.
DY 네. 원래 감독님이 쓰고 계시던 작품이 있었어요. 대작이었는데, 당시에 그 시나리오가 좀 정체기였던 것 같아요. 저도 작품이 없어서 좀 쉬던 시기였고요. 그때 감독님을 만나서 우리 저예산으로 짧고 굵게 찍을 수 있는 작품 한번 해보자고 말씀드렸죠. <무뢰한> 같은 진중한 작품은 해봤으니까 이번엔 유쾌하고 통쾌한 작품 찍어보자고. 감독님도 “너무 좋죠”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이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는 되게 빨리 쓰실 줄 알았거든요? 원래 글을 좀 오래 쓰시긴 하지만 네, 4년이 걸렸어요.
GQ 그사이 유쾌, 통쾌도 사라진 것 같고요. (웃음)
DY 그러니까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받고 이런 생각을 했죠. 오승욱 감독님은 유쾌, 통쾌가 잘 안 되는 사람이구나. 흐흐흐흐.

GQ 감독님께선 이소룡 이야기도 하셨다고요. 하수영 캐릭터를 설명하면서요.
DY 이야기해주신 건 굉장히 많았어요. 그중에는 1930~1940년대 고전 작품들도 있었고요, 서부 영화부터 이소룡 출연작들, <킬 빌> 시리즈 등등. 근데 저는 <킬 빌>을 좀 더 가까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GQ 전 칼을 쥔 ‘길복순’과 총을 잡은 ‘하수영’을 연이어 만난 것도 좋았어요.
DY 사실 그 자리에 <길복순>의 변성현 감독님도 계셨어요. 변 감독님이 오승욱 감독님의 팬이어서 소개시켜드리는 자리이기도 했거든요. 아무튼 그날 이후로 한참 시간이 지나서 <길복순>을 먼저 찍게 됐어요. 이후에 <일타 스캔들>도 하고요. 그러다 이제 좀 쉴까 싶을 때 <리볼버> 대본을 받았어요.


GQ 어땠어요?
DY 아주 솔직히는 ‘내가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도 있었어요. 그건 <무뢰한>에 이어 또 어두운 장르물이어서요. 저는 그 즈음 좀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길복순>은 스토리가 조금 어둡긴 해도 인물이 킬러인 것 말곤 괜찮았고, 또 <일타 스캔들>처럼 밝은 작품을 통해서 대중과 부쩍 가까워진 느낌도 있었는데 <리볼버>를 하면 다시 4년 뒤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민을 좀 하긴 했어요.
GQ 결정하게 된 계기는요?
DY 약속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감독님이 해준 말이 컸어요. “사람들이 보지 못한 전도연의 얼굴을 찾는 게 이번 작품의 목적”이라는 말요.


GQ 감독님의 목적인 동시에 배우님의 과제이기도 했겠어요. 극 중에서 ‘하수영’은 늘 무표정이었죠.
DY 저는 <리볼버> 시나리오를 읽고 여자 버전의 <무뢰한> 같다는 생각도 조금 했어요. 그러면서 장르적으로 닮아 있어서 조금 걱정되기도 했고요. 오승욱과 전도연을 떠올렸을 때 <무뢰한>을 지울 순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달리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으로도 곧장 연결되고요. 결과적으로 <무뢰한>의 김혜경은 표현도, 표정도, 감정도 다양한 인물이었으니, 그럼 하수영은 감정을 확 덜어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하수영이 바라보는 세상이 좀 건조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갔어요. 결국엔 어떤 쓸쓸함을 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내 시간을 희생당하고, 손에 쥔 돈은 희망이 될 수 없고. 왜 마지막에 꽁치에 소주 한잔 마시잖아요. 하수영의 진짜 얼굴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GQ 관용적인 질문이긴 합니다만, <리볼버>를 통해서 새로 얻은 것이 있다면요.
DY 최우수 연기상? 큭큭큭큭. 어머, 죄송합니다.


GQ 왜요, 맞죠.
DY 얻었다면, 오승욱 감독님 같아요. 저는 사실 <무뢰한>이라는 작품을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작품이 가진 힘에 비해서 많은 인정을 받진 못한 것 같아서 늘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감독님이 상 받으시고 수상 소감 이야기할 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이제 됐다.” 감독님이 영화 다 끝났을 때 이런 말을 해주셨거든요? “도연 씨, 저는 찾은 거 같아요. 도연 씨의 새로운 얼굴.” 사실 그때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거면 됐다고. 그래, 그럼 됐다고.
GQ 어떤 의미였어요?
DY <길복순>, <일타 스캔들> 연이어 찍으면서 좀 지쳐 있었어요. 킬러라는 새로운 역할도 해보고, 오랜만에 밝고 맑은 모습도 보여주면서 저도 모르게 많이 소모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내가 또 뭘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있었는데, 오승욱 감독님이 새 동력이 되어주셨어요. 전도연의 새 얼굴을 찾아보자고.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거면 됐다고. 그건 감사한 마음이었어요.


GQ 출연 작품 중 다시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면 다시 봤을 땐 어떤 마음인지 궁금해요. 이를테면 과거와 달리 새로 보이는지, 아니면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보이는지.
DY 저는 제 작품 중에서 오해한 작품이 딱 하나 있어요. 그게 <스캔들>이에요. 이재용 감독님하고 작업할 때 제가 되게 힘들었거든요? 왜냐하면 감독님은 ‘이렇게 연기해줘’가 명확하셨어요. 현장에 가면 모니터 앞에 계시지 않고 제가 맡은 ‘숙부인’ 역할을 막 하고 계세요. 그만큼 원하는 게 명확했고, 저는 또 제 나름대로 해석한 ‘숙부인’이 있다 보니 ‘나는 왜 하라는 대로만 하는 흉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같은 불평 비슷한 감정이 있었어요. 그래서 영화가 완성되고도 이건 내 작품이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한동안 못 봤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아는 분이 연락이 왔어요. 정지우 감독님이 영화 <스캔들>을 리메이크해서 드라마 시리즈로 만드는 중인데, 레퍼런스로 영화를 다시 보다 보니까 제가 너무 잘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보라고. 그래서 “언니, 나는 못 보겠어” 그랬죠. 그렇게 전화를 끊었는데, 정말 며칠 동안 생각나더라고요. 결국 큰맘 먹고 다시 봤죠.
GQ 어땠어요?
DY 제 입으로 말하기는 창피하지만 너무 잘했더라고요. 다 보고 나서 감독님한테 문자를 보냈어요. 이제야 <스캔들> 제대로 본 것 같다고. 너무 잘 만드셨다고요. 그랬더니 이재용 감독님 본인도 이제야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다고 답장을 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제 됐다고 말씀하셔서 죄송하다고 그랬죠. 제가 오해했다고요.


GQ 아주아주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전했어요. “전도연 연기 잘한다는 칭찬보다 기대되는 역할이 있다”라는 말이 좋다고요. <스캔들>을 오해했다면 단순히 연기를 잘하고 싶어서보다 무언가를 더 하고 싶어서였던 거 같아요.
DY 네. 제가 배우 생활을 굉장히 오래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전도연 연기 잘하지” 외에 어떤 반응이나 기대가 없는 걸 가장 두려워해요. 앞으로 계속 배우를 하고 싶은 사람으로서는 좀 좌절 비슷한 걱정이기도 하고요. 사랑하게 되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걸까.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저를 새롭게 발견해주기를 바라요. 그게 영화감독님이든, 작가님이든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스스로를 다르게 표현한다고 해서 뭐 얼마나 새로운 게 나오겠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날 발견해주길 늘 희망하고 꿈꾸죠. “전도연의 새로운 얼굴을 찾는 게 목적”이라고 말씀해주신 오승욱 감독님처럼 저를 보고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싶어 하는 분들이 그래서 너무 감사하죠.


GQ 그렇게 늘 새로 발견되는 전도연을 만난 동료들은 종종 그런 전도연을 두고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던가요?
DY 글쎄, 다들 모르겠다고 하던데.(웃음) 그런데 최근에 제 딸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엄마 말고 전도연은 어떤 사람인 것 같냐고. 적어도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단 아주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듯이 물어봤거든요?
GQ (미소)뭐라고 이야기해주던가요?
DY 똑같이 그대로 이야기해도 되나? “엄만 맨날 나 전도연이야, 하고 잘난 척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엔 낯설 정도로 정반대의 사람이 되기도 해. 아, 그리고 엄마 말이 다 맞는 것처럼 이야기할 땐 대화가 좀 꺼려질 때도 있어.” 그래서 제가 “근데 생각해보고 그게 아니면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그랬더니 이렇게 정리해줬어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엄마는 되게 복잡한 인간이야.” 근데 뭐, 나도 내가 좀 복잡하다고 생각하긴 해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