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1900년 10월 25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도의 날’

2025.10.21.신기호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중략) 관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독도)를 포함한다.

여지도(팔도 중 강원도), 작자 미상, 간행 미상.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이는 1900년 10월 25일,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독도를 공식 지정한 날을 기념하면서 만들어졌다. 독도의 날이 낯설다면 이유는 아직 국가 기념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일본은 지난 2005년 1월 14일,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을 제정했고, 3월 16일에 가결했다. 물론 일본도 국가 기념일은 아니지만, 지방자치단체인 시마네현의 제정을 통해 가결됐으므로 자치법규에는 포함된다는 점이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독도의 날’을 처음 지정한 건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였다. 2000년의 일이다. 이후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국회 청원 및 서명 운동, 법안 발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상황은 아직 계류 중이다. 얽히고설킨 국가적 이해관계의 셈법 속에서 법률에 따른 결정은 지난하게 정체돼 있다. 올해는 고종이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황제의 칙령 제41호로 기록하고, 반포한 지 1백25년이 되는 해다. 독도의 날 지정일로부턴 25주년이 되는 해다.

대한제국의 칙령 제41호가 갖는 의의는 우뚝하다. 대한제국은 칙령의 내용을 관보에도 게재했는데(1900년 10월 27일), 이 대목이 중요한 건 당시 관보는 각국 공사에도 배포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중앙정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의 성격을 넘어 국제적 선언, 고시의 성격까지 갖게 된다. 이런 이유로 고종 황제의 칙령 제41호는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알리는 데 있어 역사, 외교적으로 중요한 기록물이 되는 것이다. 그 칙령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1조. 울릉도를 울도라고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며, 군 등급은 5등으로 한다. 2조.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한다. (중략) 6조. 본 칙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것. 광무 4년 10월 25일. 여기서 2조에 등장하는 석도(石島)는 독도를 뜻한다. 예부터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으로 불렀다. 이는 ‘돌섬’의 방언이다. 한자어인 섬 ‘도’자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셤’으로 표기되는데, 이런 이유에서 독도의 명칭은 ‘독셤’에서 ‘독섬’을 지나 다시 한자어로 표기되면서 ‘독도’가 됐다. 고종 황제의 칙령 외에도 독도를 확인할 수 있는 고서와 고지도는 넘친다. 그리고 독도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독도의 흔적을 찾아 사료의 맨 꼭대기로 올라가보면, 거기에서 울릉도와 더불어 독도를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명칭이 나타난다. ‘우산국’이다. 우산국에 대한 현존 사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사기>로 신라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에 관한 이야기가 꽤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는 무려 6세기 초의 기록이다.

해동지도, 작자 미상, 18세기(영조 1724-1776년).

독도에 관해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독도박물관의 이경희 학예연구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독도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며 전시물의 수집과 관리, 연구, 교육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 그가 전해온 독도박물관의 소개에는 투명한 사명감이 묻어 있었다. “독도박물관은 대한민국 유일의 영토박물관입니다. 따라서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침탈 시도에 대응하고, 또 독도 주권 수호와 관련해서도 이론적, 실증적 토대를 마련하는 업무를 하고 있죠. 이 밖에도 울릉도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서 <울릉도민구술사연구>라는 학술총서를 발간하며 도민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울릉도 고대국가인 우산국의 흔적을 찾기 위한 학술조사도 포함되고요.” 그가 독도를 연구한 이래로 가장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는 사료는 무엇일까. 독도와 관련된 수많은 사료의 숲 안에서 유독 자주 찾고 떠올리는 나무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놀랍게도 그가 꺼낸 사료는 우리나라의 것이 아닌 일본의 것이었다.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지도는 18세기 지리학자인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가 만들었는데, 이후 수차례 개정판을 거쳐서 일본 사회에 널리 유통됐습니다. 이 지도가 흥미로운 건 일본의 독도 인식을 발견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이경희 학예연구사가 해당 지도가 처음 제작되었을 때의 모습을 이어 설명한다. “이 지도가 처음 제작됐을 땐 울릉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로, 독도를 송도 (松島, 마쓰시마)로 표기하고 조선의 영토로 분류했거든요. 일본 스스로가 두 섬을 조선의 외곽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개정된 지도에서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와 같은 색으로 채색됐고, 일본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수정되어 버립니다. 이는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강제로 자국의 영토에 편입하기 이전부터, 이미 체계적으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이어왔음을 보여주고 있죠.”

틸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조선), 광해군 3년(1611년).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보면 좋을 역사적 사료들 은 더 어떤 게 있을까. 이를테면 일본의 망언, 얼빠진 오기들이 툭툭 등장할 때마다 쉽게, 또 바로 꺼내어 던져주기 좋은 자료들 같은. 이에 이경희 학예연구사는 ‘지도’를 꼽는다. 당대 사람들의 지리적인 인식과 세계관을 살펴보기에 좋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근 광복절을 맞이해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있는 ‘수토역사전시관’에서는 (재)독도재단과 함께 <고지도, 독도를 보다>라는 공동기획전이 열렸습니다. 기획전에서는 독도가 일본에 의해 어떻게 점진적으로 편입되었는지를 지도상에 나타난 변화를 통해 보여줬는데 굉장히 자세히 설명됐습니다. 처음 유럽 사회에 ‘조선해(Sea of Corea)’라고 알려졌던 동해가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과 맞물리면서 어느 사이 ‘일본해(Sea of Japan)’로 바뀌고, 다시 일본 스스로가 조선의 영토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던 독도를 어느 순간 자신의 영토 안으로 포함하는 이 과정 전부를 고지도를 통해 증명하고 알렸거든요.” 그가 전해준 이야기 안에는 고지도 밖에서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도 있었다. 그건 우리가 미처 알고 있지 못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하지만 알고 있으면 좋을 내용들이었다. “많은 분이 동해상에 울릉도와 독도, 두 섬만 있다고 알고 계실 텐데요, 그런데 해수면을 조금만 낮춰보면 그 아래에는 총 5개의 지형이 형제처럼 줄지어 있어요. 왼쪽부터 차례로 살펴보면 울릉도, 안용복해산, 독도, 심흥택해산, 그리고 이사부해산입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빼곤 모두 인물의 이름이에요. 안용복은 울릉도 쟁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1693년과 1696년에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분명히 주장한 인물이고, 이사부는 512년 ‘우산국 정벌’을 통해 두 섬을 신라에 복속시킨 장군이죠. 그럼 심흥택은 누구인지 아실까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몰랐다. “심흥택은 대한제국이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격상한 후 세 번째로 부임한 울도군수입니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울릉군수에 해당하는 인물이지요. 독도를 이야기할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대한제국 공식 문서에 ‘독도’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기 때문이에요. 뿐만 아니라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킨 사실을 인지한 직후, 일본 관리들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또 이를 조선 정부에 즉각 보고하기도 했죠. 중요한 건 바로 이 보고에서 울도군의 관할 구역에 독도가 포함됨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죠. 이는 당시 대한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음을 재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자 증거입니다.”

대한제국 관보 1716호, 대한제국, 광무 4년(1900년) 10월 27일.

이경희 학예연구사는 종종 울릉도의 산에 올라 독도 방향을 바라본다.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는 날은 1년에 30일에서 40일 정도. 그래서 해무 너머로 그림자처럼 은은하게 피는 독도의 모습을 바라볼 때면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과거 사람들이 보던 풍경을 저도 볼수 있다는 건, 독도가 멀리 떨어진 섬이 아닌, 울릉도와 함께 생활권을 이뤄온 한 공간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독도가 가진 아름다움들을 이곳 울릉도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독도박물관은 매년 ‘세계 속의 독도 알리기’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년에는 베트남 하노이 한국국제학교에 ‘독도상설전시실’을, 올해는 태국 방콕한국국제학교에 ‘독도상설전시실’을 마련 중이다. 전시실은 오는 독도의 날에 맞춰 개관된다.

독도의 역사

930 (태조 13년)
고려시대에 울릉도와 독도를 부른 명칭은 우산국 또는 우릉성이었다. <고려사>에는 “우릉도에서 백길 토두가 방물을 바치니, 백길은 정위에, 토두는 정조에 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에서 온 백길과 토두가 고려에 속국으로서 방물을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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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 (태종 3년)
왜구의 침입을 우려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주민 거주가 금지되고, 섬을 비우는 ‘쇄한정책’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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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 (숙종 19년)
안용복 도일 사건.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불법 어로 행위를 하던 일본의 오오야 가문 어부들에게 강제 피랍된 사건이었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공식적인 영유권 다툼, 울릉도 쟁계의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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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개화파 정부는 울릉도 수토를 공식 폐지, 이후 울릉도 이주가 계속되면서 1897년 3월에는 12개 동리에 397호, 1천1백34명이 거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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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2일,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청의서를 내각 회의에 제출, 10월 24일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10월 25일 칙령 제41호가 판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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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다케시마라 칭하고, 시마네현의 오키도사의 관할로 둘 것을 결정한다. 이는 오늘날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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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을 맞은 이후,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내린 지령인 ‘SCAPIN’에 의해 규정됐고, 기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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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7월 독도경비대 창설, 이때부터 독도에 상주 경비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