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강도하 인터뷰 – 나는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아요

강도하는 종잡을 수 없다. 만화작가 경력 20년 만에 느닷없이 이름을 바꾸고 그림체를 바꿔 웹 환경에서 <위대한 캐츠비>를 비롯한 청춘 삼부작을 내놓았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변화 중이다.

피겨와 책이 이렇게 많은 방은 처음 본다. 피겨에 먼지 쌓이면 흉한데 어떻게 다 관리하나?
내가 평소 아낌없이 착취하는 문하생이 알아서 청소한다. (웃음) 혹시 백남준 먼지 사건 아나? 어느 지방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청소 아주머니가 작품 먼지를 털었다가 크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먼지 자체나 시간의 누적까지도 그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겨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 우리 주위 모든 게 다 그렇다.

<위대한 캐츠비> <로맨스 킬러> <큐브릭>으로 이어지는 청춘 삼부작 완결에 대한 나름의 감회가 있을 텐데.
<위대한 캐츠비>가 워낙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로맨스 킬러>부터는 자신감을 갖고 좀 더 내 방식대로 밀어붙였다. 그런데 독자들이 많이 어려워했다. 어렵다는 이유로 공격받는 건 싫다. 좀 많이 아쉬웠다. 대중이란, 참 어렵다.

그래도 <위대한 캐츠비>를 보면 대중이 좋아하는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아도 의식적으로 기피할 것 같다. 당신 성격에.
어휴 들켰다.

대중을 계도의 대상으로 본 적도 있나?
좀 잔인한 말이지만, 대중이 미천해 보일 때도 있다. 원칙적으로 대중은 계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계도 대상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대중이 창작가에게 보여주는 태도, 그 경우의 수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나조차도 일정한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저 두렵다는 느낌이다. 나는 강심장도 아니고 완성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돌을 던지면 아프고 화살로 찌르면 피가 난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대중예술이 일상 언어로 쓰여 있지 않을 때 분노하는 사람이 많다. 일단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다 싶으면 ‘옳지 않다’고 본다. 영화도 음악도 만화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환경을 이용해 보이콧 운동까지 벌이지 않나.
종교로 따지면 사탄화시키는 것이고, 격리시키거나 마녀사냥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게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지역적 풍경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 요번에 앙굴렘국제만화전시회에 초청받아 프랑스에 다녀왔다. 독자들과의 만남이 준비돼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 시간이 임박해도 아무도 안 보이는 거다. 초조해하고 있는데 저 앞에 행사장 문이 활짝 열리더니 군중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등에 배낭을 멘 60대 할아버지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괴성을 지르며 내 쪽으로 한꺼번에 달려왔다. 이 장면만큼은 꼭 가지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들 만화 진짜 좋아하는구나! 말 그대로 좋.아.하.는.구.나! 바로 그런 실감. 너무 부러워서 치가 떨렸다.

역사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닐까. 한국에선 대중 예술은 반드시 쉬워야 한다는 강박이 보인다.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는 이미 69년도부터 만화에 문학적인 요소를 도입해 많은 논쟁을 낳고 또 그만큼 발전해왔다. 그렇게 세계적으로 어느 문화권이든‘부대낌’의 역사가 있으면 부흥의 시기도 있기 마련인데, 유독 우리나라는‘부대낌’만 계속 된다. 참 곤란하다.

한국 만화 부침의 역사는 정치적 맥락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정말 빼놓을 수 없다. 각 정권마다 만화를 인식하는 방식이 한결같았다. 아이들이 보는 것이되 공부에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 유해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어린이날에 만화책을 쌓아놓고 화형식을 했다. 학교 폐품 수집 날 만화잡지를 가져오는 아이들은 교사에게 특히 사랑받았다. 다시는 마약 안하겠다는 다짐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아주 모범적인 어린이가 되는 거지. 청소년 보호법 이후로는 3대 성인 만화잡지가 다 폐간됐고 시장은 무너졌다.

요전에 올해 계획이 구직이라고 했는데, 그건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이라는 의미인가?
아니다. 사실 내가 만화를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얼마 전 삼성 계열사에서 강의를 의뢰받았다. 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하는 거라 거절하기도 뭐하고. 그런데 막상 하려고 보니 ‘직업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내겐 만화가 직업이 아닌데, 만화를 직업으로 꿈꾸는 사람들 앞에서 뭘 설명해야 한다는 게 너무 난처했다. 만화를 직업으로 갖게 되면 일단 작가가 장르화되고, 더불어 캐릭터와 동일시된다. 독고탁하면 이상무, 까치 하면 이현세, 하니 하면 이진숙, 이강토 하면 허영만,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작가를 특정 캐릭터 특정 장르 작가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게 갔을 때 잃는 게 너무 많다. 늘 다른 걸 하고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럼 무슨 직업을 구하고 싶나?
내가 87년에 데뷔했으니 딱 20년째 작가생활 하고 있는 건데, 일종의 안식년이라고 생각하고 작품 활동은 쉴 작정이다. 이젠 뭔가 습성화된 것들을 멀리 하면서, 낯선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뭘 하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쨌든 특강을 나가면 학생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만화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에게선 어떤 감정을 느끼나?
못 할 말이지만, 참 좀비 같다. 밖에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창밖의 풍경으로만 보고 있으니까 도무지 실감을 못한다. 굉장한 착각들을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어도, 낭만적인 EBS 교육 강의 정도를 듣고 있는 표정이다. 적어도 학생이라면“현장에서 네가 좀 잘 나간다고? 그래 좋다. 내 질문 한 번 받아봐라!”는 심정으로 막 튀어나와야 옳다. 그건 학생의 권리라기보다 의무에 가깝다. 아주 어려운 시간 내서 기껏 찾아갔는데 어디 스포츠 신문 기자가 할 법한 질문을 하면 어떻게 하나.

일종의 팬심이 아니었을까?
작품을 좋아할 순 있어도, 작가를 좋아하면 안 된다. 작품이 싫어지면, 그땐 날 미워할 건가? 선후 관계가 잘못됐다. 특정 한 두 작품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난 어둡고 아픈 만화를 주로 그린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이다보니, <이웃집 토토로>같이 훗날 아이들에게 안겨주고 싶은 작품도 하고 싶다. 그런데 내가 그런 걸 하면 다들 변심했다고 하겠지. 뭔가 다른 걸 시도하면 저 사람이 요즘 빚 다 갚았나봐 바람 피나봐 흔들리나봐, 그런 추측들을 한다. 난 작품으로 일기를 쓰는 게 아니다.

<위대한 캐츠비> <로맨스 킬러> <큐브릭>은 각기 20대, 40대, 10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걸 청춘 삼부작으로 묶는다.
물리적 육체적 나이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다르니까. 매일마다 기도한다. “제발 오늘도 꼰대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마흔이 됐을 때부터 느꼈던 건데, 내가 결국 꼰대가 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보상 심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내가 이등병때는’운운하는 것부터 나이 먹고‘내가어릴때는’하는 것까지, 모두 자기가 누리지 못한 걸 타인이 누리고 있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다. 내가 이렇게 투쟁적으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가볍게 처리되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두려운 거다. 그래서 스스로를 보호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나의 꼰대가 완성된다.

하지만 자기 인생에 걸쳐 이뤄놓은 것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물론 꼰대는 악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선 치명적일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늘 끊임없이 바뀌고 변화해야 하는데, 지킬 것이 많으면 그렇게 행동하기 어렵다. 주위에선 왜 갈수록 어법을 어렵게 바꿔가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냐고 욕하는데, 나도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위험해서 그런 거다.

결국 아까 만화를 직업으로 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과 통한다.
그렇지, 그래. 직업화되고 장르화되고 캐릭터와 내 이름이 동일시되기 시작하면, 결국 권력이 생긴다. 권력이 생기면 남을 가르치려 하게 되고, 그 순간 꼰대가 된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뭘 해야 할까?
분노다. 내게 있어서 분노는 창작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분노가 쉽지않다. 분노보다 피로감이 먼저 밀려온다. 숭례문이 불타는 걸 보면서도 쓰러질 것 같은 피로를 먼저 느꼈다. 분노를 주는 사회는 차라리 즐겁다. 하지만 분노를 넘어 피곤함을 주는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다. 쉬면서 관망할 거다. 어떻게 되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