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인터뷰 – 그래요, 나는 소설가예요

김연수 인터뷰 – 그래요, 나는 소설가예요

2016-02-18T10:59:36+00:00 |ENTERTAINMENT|

김연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타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 지루했을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문학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몇 안 되는 소설가다.

셔츠는 빈폴, 안경은 샌프란시스코 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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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나기 전 2003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를 다시 읽었어요. “봉우와 산길과 어둠이 모두 하나로 뒤섞여 들면서 꼭꼭 닫아뒀던 마음자리 한쪽이 어둠 속으로 풀어졌다”는 문장에 밑줄을 쳐두었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소외된 개인이 세상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느꼈나 봐요. 사람이라는 게 개인마다 경계가 존재해서 겹치지 않고 고독하다는 게 제 인간관이에요. 그 소설은 봉우하고 한 여자가 사랑하는 관계인데, 둘 다 어두운 어디인가를 각각 헤매고 있거든요. 그런데 조그만 노란 것을 가지고 소통을 해요. 처음에 여자가 애기똥풀을 보는 장면이 있고 마지막엔 봉우가 보름달을 보는 장면이 나와요. 그렇게밖에 소통이 안 되는구나라는 심정이었어요.

결국 상징적인 소통만이 가능하다는 거네요. 남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죠? 실질적으론 소통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운다면 우는 사람은 나 혼자다,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가 없다고. 그러나 전해질 수 있다로 바뀌어버렸어요.

그렇게 변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중국에 있을 때부터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전적으로 제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썼어요. 독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왜냐면 나한테 급한 건 삼십대 초반에 내 소설의 가능성을 확인해봐야 한다는 거였거든요. 근데 중국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외롭단 말이죠. 그때 다른 사람에 대해 쓰는 게 진짜 소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에 대해 쓰려면 타인을 이해해야 하죠. 그러나 모든 소설가들이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진 않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고뇌가 필요하니까요. 중국에 있을 때, 그게 2004년돈데 제 머릿속을 지배한 건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해야 한다였어요. 연변에서 쓴 소설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거예요. 첫 작업으로 뭘 했냐면 중국사회주의 인명사전이라는 걸 들여다봤어요. 보면 간략하게 나와요. 중국 연변 어디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다니다가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민생단으로 몰려 총살, 몇 년 뒤에 복권, 이런 식. 이걸 한참 들여다보는데 콱 막힌 거죠. 지금까지 써온 방법으로는 이 사람들을 쓸 수가 없어, 난 도저히 상상이 안 갔어요. 동지들이 다 죽였거든요. 간첩이 아닌 걸 분명히 아는데 너는 간첩이다 하고 쏴 죽인 거예요. 동료를 안 죽이면 자기가 죽는 분위기였거든요. 지금까지는 소통이 불가능하다였는데 그렇게 되면 이걸 쓸 수가 없어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난 소설을 못 쓴다. 못 쓰는 건 상관없는데 이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처럼 보이더라고요. 이걸 이해 못하면 난 인생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이번에 나온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으면서 인간이란 참 외로운 존재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초반부에 ‘나’와 ‘정민’이 서로에게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서로에게 증명해 보이듯 말이죠. 그러나 이 소설은 절망적인 얘기는 아니에요. 서문 대신 인용한 메리 올리버의 시에 이런 말이 나와요.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개인은 고립되어 있고 누군가를 이해하기는 굉장히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소통되는 부분이 있고 그때의 기쁨이 크다는 거예요.

<문학동네>에 연재될 때는 제목이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 말이 언뜻 이해가 안 돼요. 개인적인 경험인데요, 예전에 실연당했을 땐데 슬퍼하고 많이 울었어요. 수습이 됐다고 생각했을 때쯤, 신문을 보는데 시위를 하다가 전경이 방패로 밀어가지고 한 할아버지가 뒤로 넘어가 죽은 일이 벌어졌어요. 정말 슬프더라고요. 내가 알고 있던 것 같고 저 사람이 이거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대폿집에서 소주한잔할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물이 줄줄 멈추지를 않고 흐르는 거예요. 그 경험을 하고 나서 내 슬픔이 넘쳐흐르니까 다른 사람 슬픔까지도 다 이해가 되는구나, 제가 지금까지 얘기했던 소통도 이런 거예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길이 존재를 하는구나.

따뜻하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긍정적인 거 아닌가요?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요. 아, 물론 긍정적으로 보는 거죠. 모든 걸 다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아니죠. 이해가 가능한 순간이 존재를 한다는 거죠. 모두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이해를 하려고 하고, 설사 그게 지상 최대의 악인이라 할지라도 이해를 하는 게 저의 최종적인 지점이라는 거죠.

요즘의 관심사는 뭐예요? 영화요. 옛날엔 안 봤어요. 그런 거 볼 시간에 문학 작품을 하나라도 더 본다고, 난 문학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소설이 영화에서 배울 게 있을까 생각도 하게 되고.

그래서 그걸 찾았어요? “난 디테일이 풍부한 영화가 좋은 영화인 것 같아요. 디테일이 가득할수록 스토리는 단순해져요. 일상적인 이야기가 돼요. 지금 내 관심사는 좀 더 일상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래야 사람들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

인생이 오로지 소설로만 구성된 사람 같네요. 그건 너무 외로운 일 아닌가요? 얼마 전 <황순원 문학상> 수상 소감에, 예전에 소설가가 안 됐으면 뭐가 됐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택시 운전사나 빵집 주인 혹은 천문학자가 됐을 거라고 얘기한 적 있는데 그게 틀린 것 같다, 아마도 외로운 택시 운전사나 외로운 빵집 주인이나 외로운 천문학자가 됐을 거다라고 썼어요. 정말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소설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관심도 가지게 됐고. 외롭다기보단 내가 굉장히 소통을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 당신이라면 소설이 읽히지 않는 이 시대에 대한 고민도 있겠네요. 나는 소설을 매우 사랑해요. 아주 위대한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소설이 가진 많은 장점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읽힐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이 장점을 가지고 읽히는 방법이 뭔가, 그것은 2004년도에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싶다와 똑같은 과제예요. 지금으로선 해결할 수 없는, 근데 그걸 해보고 싶은 욕망이 이제 생겨요. 아무튼 해볼 때까지 해볼게요.

구체적으론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아까 말했던 대로 스토리가 간단해지면서 디테일이 풍부해지는 거요.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문장이고, 문장만 소비해도 그 사람은 소설을 다 소비한 거거든요. 굳이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이 시점에서 다시 원론적인 얘기를 하나 해야 할 것 같아요. 왜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거죠? 이야기를 하고 듣는 순간 상처가 치유가 돼요. 그게 정체성을 만들어주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니까요. 영화도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면에서 비슷하지만, 소설처럼 화자가 등장하지도 않고, 사적인 관계는 아니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존의 문제를 떠나서 소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간과 현실에 대한 고민을 의도적으로 거세시키려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구체성의 세계거든요. 모순적인 인간이라든지 정체성의 혼란이라든지 이런 게 없이는 소설 속에서 구체적인 세계가 존재할 수 없어요. 현실 세계를 떠나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전부 동화라고 생각해요. 소설은 어른들의 장르거든요. 협잡의 장르예요. 황석영 선생이 잘 쓰는 말이 시정잡배들이 하는 짓이다, 예요. 그 말이 딱 맞아요. 어른들의 간통과 배신과 두 얼굴의 사나이, 이게 소설이 다루는 세계예요.

그러나 소설이란 응당 이래야 한다는 강박이 소설의 범위를 한정해 온 건 아닐까요? 그들은 소설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소설이 현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소설이 어떤 식의 문장으로 구성이 되는가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에요. 구체적인 세계가 상정되지 않고는 소설이 성립이 안 돼요. 근데 지금까지 쓴 소설들이 이 현실 세계 안에서 너무 갇혀 있었다, 그러니 우주 공상으로도 나가고 다른 세계로 가보자 해서 다른 세계를 가지고 쓸 수는 없어요. 그 정도의 생각만을 가지고는 어림없어요. 그 다른 세계를 이 현실만큼 세밀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소설의 문장이 나오는 거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 정도까지 인식을 안 한 상태에서 단순히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 법칙, 물리적인 법칙을 벗어나고 싶다는 거예요. 뜬금없이 서울 시내에 메뚜기 떼가 비처럼 떨어진다 혹은 도로 위에 고래가 출현한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것뿐이에요. 초월만 가지고 상상력이라고 할 순 없는 거죠. 그거는 반칙이에요. 모두가 완전군장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그 친구들만 다 풀고 뛰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다양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소설은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거 아닌가요? 소설의 범위라는 것도 자꾸 변하고 넓어져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구체적인 세계를 그리지 못하면 영역을 아예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전제로 깔고 있는 사람들이 크게 벗어난 것도 없어요. 태도가 마치 뭐 대단히 다른 것처럼 하지만, 그걸로는 안되죠.

작가란 모국어와 싸우는 자에게 내리는 작위잖아요. 그런데 언어 자체에 대한 숙고가 없는 작가들이 부쩍 늘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서사가 그들의 무기가 되었더라고요.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겠죠. 근데 나는 독자로서 그런 작품을 읽지 않을 것 같아요. 읽는 사람도 있겠죠. 언어를 소비하지 않고 서사를 소비하겠다고 한다면 읽겠죠. 근데 그걸 가지고 주도권 논쟁을 하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시대가 변하는데 한국 문단은 너무 늙었다, 이제 주도권이 서사로 가야 한다 이러면 곤란해요. 예전보다 현실의 템포가 빨라졌다는 거는 인정을 해요.

어렵네요.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어려운 얘기만 한 거죠? 문학 얘기를 하면 결국 어려워질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축구 얘기를 했으면 좀 덜 지루했을텐데. 저 축구 굉장히 좋아해요.

그러면 다음에 만나면 축구 얘기를 하죠. 만날 자살골만 넣는 수비수에 대한 소설은 어때요? 그럼 그를 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