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택 인터뷰 – 이제 겨우 16강인걸요

이형택 인터뷰 – 이제 겨우 16강인걸요

2015-09-10T22:12:38+00:00 |ENTERTAINMENT|

이형택은 계속 웃었다. US 오픈 16강과 같은 최근의 좋은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무나 옳고 너무나 흔한 말이지만 삶에 대한 긍정과 상승에 대한 의지, 이 두 가지가 그를 구성하는 본질 같았다.

티셔츠는 컴플에잇 by 탕고드샤, 바지는 이형택 본인의 것

티셔츠는 컴플에잇 by 탕고드샤, 바지는 이형택 본인의 것

 

지난 US 오픈 32강전 앤디 머레이와의 경기 때 1,2 세트를 쉽게 따서 비교적 수월하게 16강에 진출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3세트를 내주고, 4세트에서 5:2로 앞서가다가 다시 5:5까지 허용했어요. 머레이가 게임 흐름을 갑자기 늦추는 바람에 제가 약간 당황 했었죠. 2대2까지 가면 제가 질 확률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위축되지 말고 과감하게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다 보니 플레이도 좋아졌고, 다행히 머레이가 쉬운 공도 에러를 내줬죠.

4세트 6:5로 당신이 앞서고 있고, 포인트 15:15 동점 상황, 당신이 머레이 뒤편으로 공을 찔렀을 때 뒤쫓아가던 머레이가 고개를 푹 떨구는 걸 봤어요. 그 순간 몸에서 어떤 전율 같은 걸 느꼈어요. 그 모습은 보지 못했어요. 공을 치고 난 다음에는 늘 다음 플레이를 준비해요.

머레이는 세계 랭킹 19위고 테니스 종주국 영국의 차세대 대표주자예요. 그런 선수를 꺾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사실 머레이가 매너가 안 좋거든요. 그래서 쟤한테는 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상대방이 잘 치면 저건 운으로 들어왔다는 식이라든지, 투정부리는 듯한 행동들을 많이 하죠. 사실 어떻게 보면 아쉬운 점이에요. 더 잘할 수 있는 선수인데, 상승세를 타다가도 그런 행동으로 자기 플레이를 위축시키니까.

7년 만에 다시 US 오픈 16강에 올랐어요. 2000년도에는 뭣도 모르고 갔죠. 16강에서 샘프라스랑 붙었는데 샘프라스는 거기서 영웅이었어요. 전, 전날 밤에 잠을 못 잤었어요. 가슴이 뛰고 긴장도 되고, 우리랑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잡지, TV에서만 보던 선수였으니까. 아무튼 그때는 16강이 대단한 건 줄 몰랐어요. 시간 지나면서 그게 참 힘든 거였구나 알았죠. 랭킹 50위 안에 있는 선수들도 16강까지 못 가본 선수들이 많아요. 근데 그때 랭킹 백 몇 위가 갔으니 굉장히 큰 거였죠. 사실 그 후에도 매년 16강을 목표로 잡았지만, 다시 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근데 이번에 1회전을 굉장히 어렵게 이기면서 자신감이 붙었죠. 기분은 2000년에 16강 갔을 때보다 지금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이제는 이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아니까.

그때 16강 상대가 하필 샘프라스였어요. 졌지만 대단한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제가 너무 뭘 몰랐던 게, 샘프라스가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어디로 쳐도 다 받아낼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첫 세트 중요한 순간에 힘을 팍 줘서 치고 멈추지를 못해서 네트를 밟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걔도 사람인데. 경기 중에 비가 와서 휴식 시간을 가졌어요, 샘프라스는 쉬고 난 후 경기가 더 좋아졌고 저는 안 좋아졌죠. 몸도 굳었었고.

투어 경기를 하는 톱 랭커 대부분이 당신보다 나이가 어려요. 질 때, 자존심이 상하진 않나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안드레 아가시도 어린 선수들한테 지거든요. 근데 저는 아가시 같이 뛰어난 선수도 아니고. 나이와는 상관없이 내 플레이를 못했을 때 창피해요.

로저 페더러하고는 두 번 싸워서 모두 졌죠. 사람들이 페더러한테 진 거니까 괜찮다는 반응을 보이면 좀 화가 나요. 솔직히 다시 붙어도 이기기 힘들 것 같아요. 한 단계 위의 테니스를 쳐요. 대학선수와 수준 높은 프로 선수의 차이라고 할까. 제가 어느 정도 잘 치면 위너가 되거나 치기 쉬운 공이 와야 하는데, 페더러하고 할 때는 그렇지가 않아요. 제가, 스트로크 위주로 치는 선수들하고 붙으면 좀 괜찮게 하는 것 같아요. 공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감이 잡히거든요. 근데 페더러는 그럴 기회를 안 주죠. 발리로 탁 끊어버리거든요.

그런 페더러도 나달한테는 종종 지잖아요. 나달이 굉장히 잘 뛰거든요. 페더러가 잘 쳤을 때 다른 선수 같은 경우는 제가 좀 전에 말했듯, 페더러한테 찬스 볼이 오든지 위너가 돼야 정상인데, 나달은 그걸 역습 해요. 워낙 운동량이 많고 체력이 좋아서 그런 것 같아요. 이런 것도 있죠, 다른 선수들과 할 때는 세 번 만에 끝낼 수 있는데 나달은 4번, 5번을 쳐내거든요.

당신 역시 톱 랭커들을 괴롭히는 복병이잖아요. 반대로 당신보다 낮은 랭커인데, 이상하게 경기만 하면 자신감이 없어지는 상대가 있나요? 승률이 좀 떨어지는 경우는 몇 명 있었어요. 누군지 기억은 잘 안나요. 주로 왼손잡이들이에요. 서브를 넣으면 오른손 선수와는 반대쪽으로 오잖아요. 거기에 익숙하지가 않아요.

당신이 16강에 진출해서 기뻤지만, 한편으론 앞으로 저 뒤를 이을 수 선수가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아휴…, 근데 솔직히 지금 현재로서는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투어를 가기 전까지는 고통이 따라요. 다 극복해야 하는데, 젊은 선수들은 무조건 다 톱 랭커가 되는 것만 생각하고 있어요. 20위 선수들은 뭐 한 시간 연습하고 컨디션 조절한다더라 그러니까 자기도 그런 식으로 하겠다, 이러는데 지금 젊은 선수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정신력이 예전 선배들 반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당신을 이을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는 전웅선, 김선용은 어떤가요? 그들이 메이저 대회에 나가 뛰는 건 좀체 상상이 안 가요. 생각이 바뀌고 독한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은 힘들 거 같아요. 해보겠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어요.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주진 못해요.

그건 좀 아쉽네요. 제가 한국 나이로 서른 셋인데 아직도 그 선수들이 저를 못 밀어내고 있으니 걱정이 되죠. 저는 주니어 때 외국 시합을 많이 못 나갔어요. 근데 얘들은 외국에서 주니어 1위도 하고 4위도 했던 선수들이라고요. 충분히 저보다 잘할 수 있거든요. 나이가 어리다곤 하지만, 사실 어린 게 아니에요. 외국 같은 경우에는 열 몇 살짜리가 지금 세계랭킹 3위예요. 백위권, 이백위권에 전웅선, 김선용 선수보다 어린 선수들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나라에서나 유망주라고 하지, 전체적으로 보면 유망주도 아니죠. 근성을 가져야 해요.

샘프라스, 아가시, 페더러, 앤디 로딕같이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기를 많이 해왔어요. 모든 경기가 기억에 남겠지만, 그 중 한 경기를 꼽으라면 어떤 경기인가요? 아가시와의 경기는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세 번을 했었거든요. 호주 오픈에서는 아주 박살이 났죠. 한 번은 이길 뻔한 게임이 있었는데, 3대1로 제가 앞섰어요. 그때 갑자기, 이러다 정말 이기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기 사작하더니, 긴장이 되는 거예요. 결국 졌어요. 경험이 문제였죠.

아가시는 2003년 <GQ KOREA>와의 인터뷰에서 이형택은 민첩하며 코트 감각이 뛰어난 선수다, 라고 말했어요. 정말이요? 제대로 봤네요, 하하. 농담이고요, 다른 선수들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래도, 아가시가 그렇게 얘기했다니 고맙고 좋네요.

 

아가시가 많고 많은 투어 선수들 중에서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랍진 않아요? 영광스럽죠. US 오픈에서 샘프라스하고 붙었을 땐 존 매켄로가 해설을 하러 왔었어요. 대기실에서 절 보고 아는 척을 해줬어요. 앤디 로딕의 코치는 지미 코너스잖아요. 시합 하러 가면 제 이름을 불러주고 그래요.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로 영광이죠. 연습하고 있으면 와서 보다 가고 그래요, 하하하. 저는 이런 게 굉장히 좋아요.

당신이 존경하는 선수는 지미 코너스나 존 매켄로인가요? 좀 바뀌는 편이에요. 존경까진 아니었고, 전성기 때의 에드버그 좋아했어요. 존경하는 선수는 샘프라스와 아가시예요.

 

무엇이 그 두 선수를 존경하게 만들었나요? 샘프라스는 플레이가 굉장히 멋있어요. 잘하면서도 담담하고 무엇보다 꾸준하잖아요. 아가시는 서른 다섯에 은퇴했잖아요. 돈이나 명성 때문에 그 나이까지 한 게 아니라, 테니스가 좋아서 한 거거든요. 대부분이 돈을 많이 벌면 나태해지잖아요. 몸도 많이 불고. 아가시는 백위권까지 랭킹이 떨어진 적도 있고 이혼까지 했는데, 위기를 다 이기고 다시 1위에 올라오고. 그 정신력이 너무 위대해 보여요.

당신은 여전히 갓 스물이 된 선수들보다 왕성한 운동량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월 앞에 장사는 없죠. 은퇴하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게 있겠죠? 내년 2월에 있을 데이비스컵 월드그룹 독일과의 경기에서 이겨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올림픽에 한 번 더 나가고 싶어요. 그러면 저한테는 네 번째 올림픽이거든요. 16년 동안 대표로 뛴다는 건 몸 관리를 잘했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제 개인에게 영광이고 자부심이 될 것 같아요.

라켓을 내려 놓기 전에 다시 붙어보고 싶은 선수는 누군가요? 옛날 선수들이요. 존 매켄로, 지미 코너스, 스테판 에드버그, 이반 랜들 이런 선수들이 지금 나오면 어떨까 궁금해요.

어머니가 경기만 보러 오면 지는 징크스가 있다고 들었어요. 여전히 유효한 건가요? 요즘은 오시질 않아서 모르겠어요. 한 번은, 꼭 이기고 싶은 경기가 있었는데, 앞서가다가 졌어요. 엄마한테 힘들게 뛰는 걸 보여주기가 싫어서 그랬는지 경기가 잘 안됐어요. 나중에 끝나고, 왜 왔냐고 제가 투정을 부렸죠. 전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랑 떨어져서 할머니 손에 자랐거든요. 제가 뭐라고 하는데도 아무 말씀 못하시더라고요. 마음이 아파서 나중에 전화 드려서 죄송하다고 했어요.

지금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가족이죠. 테니스도 좋지만, 가족과 테니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가족이에요. 전 어렵게 자랐어요. 식구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게 해주고 싶어요. 여유를 주고 싶고. 그러려면 성적도 더 잘 내야겠죠.

은퇴를 하면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잖아요. 한국 테니스에서 바꿔보겠다고 생각한 게 있나요? 기숙사가 있는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고, 영어 공부는 꼭 하게 할 거예요. 학교에서 테니스를 배우는 게 다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당장 성적을 내야 하니까, 선수가 성장하는 것보다 시합 결과만을 위해 가르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바꾸고 싶어요.

무엇이 이형택을 여기까지 오게 했나요? 내가 국제 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면 후배들도 그 기록을 깨기 위해 열심히 할 거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대강 할 수가 없게 됐죠.

그럼 내일 당장 전웅선 선수가 당신을 꺾는 것도 괜찮겠네요? 하하하. 지금 당장은 아니고 조금 있다가요. 하하하. 아이, 이렇게 빨리 깨지면 제 이름이 빨리 지워지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