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여름

10년 전 봄여름가을겨울의 샘은 바짝 말랐었다. 그 샘은 지금 다시 차올랐다.



두 분 마지막으로 뵌 건 2007년 여름 ‘쌈싸페(쌈지싸운드페스티벌)’였어요. 1년 만이네요. 스튜디오 안에는 7집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틀어놨어요, 지금 들으니 어떠세요?
종진 작곡도 좋고 죽이네. 오랜만에 순서대로 쫙 들으니까, 우리 음악 같지 않아요.

<경향신문>이 꼽은 ‘한국 100대 명반’에 두 장이 선정됐어요. 1988년 1집 <봄여름가을겨울>과 1989년 2집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태관 그때 음악은 미숙하지만 열정이 묻어나죠. 대중은 모든 아티스트의 초창기 음악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리도 그래요. 산타나도, 스티비 원더도 옛날 게 좋죠.
종진 그래서 핑크 플로이드나 레드 제플린이 위대하죠. 끗발이 안 떨어졌으니까. 처음이나 뒤나 죽이는 거죠. 그게 정말 어려워요. 음악 역사를 보면, 모든 음악 인생은 10년이면 다 끝나는 것 같아요. 스티비 원더가 그렇게 죽인다고 해도 10년 했고, 비틀스도 10년은 못 넘겼어요. 그걸 뛰어넘으면 위대한 반열에 들어가는 거죠. 우리는 매번 확신을 가지고 음반을 내요. 지난번보다 이번 게 나을 거다. 옛날을 뛰어넘으려는 거죠.

최근작이 최고작이라는 확신인가요? 이번 앨범은 12명의 일반인을 인터뷰해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주제는 사랑이고요.
종진 애절하고, 처절하고. 다들 살벌한 스토리들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친구는 첫 사랑이 초등학교 1학년 때래요. 그 여자아이를 처음 본 날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해요. 그 인터뷰에 빠져들어서, 걔가 다녔던 리라 초등학교에도 갔어요. 그 앞에 가면 그 여자애네 집이 있고, 걔가 하루도 안 빼고 숨어서 그 여자애가 오나 안 오나 봤던 전봇대도 있어요. 다 확인하고, 그 집에도 들어가 보고 그랬어요. 지금은 30대 후반인 친구죠.

이번 앨범이 뮤지션의 자의식과 현실이 예민하게 교차하는 데서 나온 컨셉트는 아니죠. 이벤트라는 느낌예요. 싱글 <더 높은 곳을 향해>도 그랬죠. 7집부터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모든 고민이 다 끝난 것 같아요. “자식, 겪어보니 인생 원래 그래, 힘 내라.” 그냥 토닥토닥.
종진 우리가 20년 됐잖아요. ‘20’은 음악하는 사람에게 치명적이고 두려운 숫자일 수 있어요. 우린 다행히 고마운 숫자가 된 것 같아요. 스물이 되면 성인으로 인정하고 야동도 볼 수 있고 술, 담배도 하는 것처럼, 이제 인정. 봄여름가을겨울 지금까지 음악 했던 거 인정. 하나의 음악 인격체로 접어든 단계라고 규정했어요. 지금까지는 우리 내면, 사춘기의 해결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시간이었죠. 이젠 성년기에 접어들었으니까, 우리의 달란트인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줘야겠다. 음악은요, 절대적으로 받은 거거든요. 우리 잘 먹고 잘 살라고 받은 게 아니고, 스포츠카 타고 계집질 하고 그러라고 받은 것도 아니죠. 음악에는 용도가 있어요. 노동가, 장송곡도 있잖아요. 음악은 철저한 수학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과학이에요. 그걸 전하려면, 사람을 더 많이 알아야겠더라고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서 음악으로 녹여내고 싶었던 거죠.

김종진 전태관의 얘기가 아니라요?
종진 우린 우리 얘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손과 입으로 연주하니까. 다만 이제는 우리라는 그릇에 사람들 얘기를 담아서 버무려 나눠드리고 싶은 거죠. 주제가 사랑이었던 별다른 이유도 없어요. 옛날부터 계집질이 동반돼야 음악도 잘 나오고 그런 게 있거든요. 그걸 잘못 해석해서 범하는 섹스 쪽으로, 범하는 성으로 가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지금 미국 음악들이 상당히 그렇잖아요.

오늘 출렁이는 네 엉덩이 맘에 쏙 들어, 나 그거 가질래. 같이 자고 싶어, 그런 거요?
종진 그렇죠. 우리나라 단어가 미국보다 훨씬 좋은 거 알죠? 뭐 ‘쫀득쫀득’하달지. 하지만 본질로 돌아가면, 음악의 파장에는‘카타르시스’라는 놀라운 기능이 있어요.

그분들의 사랑을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그릇에 담으면, 음악은 어떻게 나올까요?
종진 사실, 날 섰던 것도 둥글어지고, 과거에 비해 상당히 무뎌진 게 아닌가 생각도 했어요.

스스로 그렇게 느끼셨다고요?
종진 그래서 사람들 이야기를 들은 거죠, 계속 나만의 것을 하다 보면 구태의연해지기도 하니까. 싱어송라이터니까 그런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는 것 같아요. 작가가 창작을 하다가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평론도 하는 것처럼. 그런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을 수혈 받자. 그랬더니 정말 수혈이 징하게 되더라고요.

아티스트는 그렇게 소진되기도 하죠. ‘무뎌졌다’는 느낌이 딱 온 건 언젠가요?
종진 그걸 언제 느꼈지? 한 96년?
태관 10년 좀 넘었을 때지.

6집 <바나나 쉐이크> 때요?
종진 <바나나쉐이크> 딱 했는데, 이제 완전 ‘뽕빨’났다. 음악의 샘이 말라버렸다. 다 펐다. 그런 생각이 딱 들었어요. 그동안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앨범을 1년 반에 하나씩 냈으니까. 너무 힘들었는데 그때는 그것도 느리다고 했어요. 그때는 거의… 우리가 좋아하는 그 사람들도 10년 하고 끝났는데 우리도, 음악의 샘이 마르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도 했어요.
태관 88년부터 8년 동안 여섯 장을 냈는데, 96년부터 2008년까지 달랑 두 장 냈죠.
종진 앞에 10년 동안 여섯 장, 뒤에 10년 동안 두 장이죠. 음악은 우리 음악의 샘에서 솟는 샘물이다, 그 샘물을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도 먹고 사슴도 와서 먹는데, 샘이 늘 넘쳐흘러야 깨끗한 물을 먹고 토끼, 사슴이 좋아하지, 고이지도 않았는데 고인 척하고, 넘치지도 않는데 고여서 썩은 물을 주면 병 나잖아요. 충분히 흘러 넘칠 때 음반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6집을 하고 나니까 뭘 할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죠.

그때 기분은, 위기감 같은 거였나요?
종진 사실 몰랐어요. 진짜 마른 건지 몰랐어요. 마른다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건지도 몰랐어요. 늘 넘쳐서 충만했으니까. 이유도 몰랐어요. 사랑처럼, 뜻대로 안 되는 거죠. “다시 충만하게 음악에 젖어 들었을 때 하자. ” 근데 그게 진짜 안 오더라고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그때 온 노래군요. 그 노랜 10대도 좋아했죠.
태관 그때 처음으로 공연장에 고등학생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전혀 없었어요.

말라 붙었던 샘은 어떤 계기로 다시 차오른 거죠?
종진 음악하는 사람들의 계기는 단순해요. 음악 정말 그냥 좋아서 시작하거든요. 딱 듣고, 어, 좋다. 그거거든요. 음악의 샘이 차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2000년도 지나서, 어느 날 “야 노래 죽이는 거 나왔어” 그랬어요. “이건 대박이야. 전 국민의 노래고. 지금까지 우리가 발표한 것 보다 훨씬 죽이는 게 나올 거야. 음반 준비하자.” 그냥 그렇게 오는 것 같아요.

이번 8집도, 고갈된 샘을 채우려고 다른 분들에게 자극을 받으신 거죠?
종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내고 바로 이듬해에, “야, 이번엔 브라질로 가자. 어쿠스틱으로 가는 거다.” 그래서 브라질 가는 티켓도 알아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태관이가 약간 호응을 안 해줬어요. “어…뭐…브라질?” 그러면서 시큰둥했죠. 그래서 제동이 걸렸어요. 다시고민하고. 그 세월이 다 뭉쳐서 지금이 된 거죠. 하지만 결국은 계획한 대로 가요.

사실 뮤지션에게 최대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은, “아 이 사람도 아직 방황하고 있다, 나랑 같이 가고 있구나”하고 느껴질 때예요. 그건 나이와 관계없는 위안이죠. 요즘은 광고만 봐도 힘내라고 그러는데, 그게 봄여름가을겨울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죠. 같이 고민하던 동네 형님이 이제는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다 커서 재미 없어진 느낌 있죠?
종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제목만 브라보지, 가사들 보면 그때도 엄청 흔들리고,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하지만 그럴 땐, 스스로라도 “브라보”를 외쳐야 하는 거죠. 이번에도 ‘아름답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있어요. 열두 명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만든.

열 두 분 인터뷰에 ‘아름답다 아름다워’니까, 8집은 열 세곡이네요.
종진 그런데 하나하나가 그 사람들 곡은 아니에요. 다 듣고 나서 기억의 뿌리를 뽑아 만들었죠. 다 죽도록 힘들고, 애절하고 뻑이 가는 사랑들을 했는데, 다 아름답다. 우리도 이렇게 사는데, 그냥 우리 사는 모양 아름답다고 하자. 달리 뭐라고 하겠어요. “힘들다 힘들어”라고 하겠냐, “죽겠다 죽겠다”고 하겠냐.

“말랐다 말랐다”고 하겠냐.
종진 그렇죠. 그래서 그냥 ‘아름답다 아름다워’라고 한 거죠. 실제로 아름다워요.

봄여름가을겨울은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위대한 아티스트의 반열에 가겠다, 그러고 싶다는 거죠?
종진 그렇긴 한데, 이제 레드 제플린도, 핑크 플로이드도 음악 그만뒀으니까 좀… 말하자면 계속 가야 하는 거죠. 우리가 신화를 만들어야지. 올해부터 앨범 표지에 한자로 “춘하추동 春夏秋冬”을 쓰기로 했어요. 좀 더 글로벌하게 황인종의 밴드로, 아시아 대중음악의 자존심으로, 그렇게 가고 싶은데…
태관 이 인터뷰,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꿰뚫었네요. 지금까지는 “이번 앨범의 특징이 뭔가요?” 그런 질문 많이 받았어요.

아, 그걸 여쭤봤어야 하는데.
태관 아, 이 사람들이 이래서 오래 걸렸구나 하겠네.

작년 쌈싸페에는 이상은 씨, 드렁큰 타이거, 빅뱅, 장사익 씨도 있었죠. 그땐 장사익 씨의 목소리와 태도,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의 연주가 최고였어요. 그래서 기다릴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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