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Q>의 친구들 | GQ KOREA (지큐 코리아) 남성 패션 매거진

<GQ>의 친구들

2016-02-18T11:09:45+00:00 |ENTERTAINMENT|

텔레비전, 길거리, 스크린, 엘리베이터 안, 택시, 인터넷…. 모두 어수선하다. 찧고 까불고 나대고 매너 없고 척하는 것들이 만날 큰 소리다. 하지만 품위로 기억할 수 있는, 여기 소개하는 <GQ>의 친구들.

유재석 시선을 낮추고 작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남자가 신사로 보인다면 남다른 감식안을 가진 것이다. 유재석은 그렇게 드문 신사다. 하나, 거절에 대해 그는 언제나 개연성 있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거절을 ‘미안’을 넘어 ‘죄송’을 건넌 ‘송구스러움’ 으로 표현한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일은 거절을 하지 않는다. 둘, 자신에게 맞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대로 한다. 그의 자동차는 그랜저 XG다. 자신에게는 완벽한 자동차이며, 회사가 내준 이동용 차량이 있어, 굳이 수입 자동차로 바꿔야 할 까닭이 없다고 말한다. 셋, 술 먹고 흐트러지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것,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모습이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넷, 자신을 낮추는 것이 어렵지 않다. 상대보다 낮아져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는 부드러운 배려를 그는 기뻐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새가슴’이기 때문이라며 웃는다. 다섯, 자신의 사람에 대해 용기를 낼 줄 안다. 나경은 아나운서와의 연애가 노출되었을 때 그는 기자회견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당일 아침 마음을 바꾸었다. 연인의 일터인 아나운서실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철수시킨다는 조건과 맞바꾼 회견이었다. 그리고 첨언했다. 자신은 이런 일이 익숙한 사람이고 연인은 그렇지 못하니 관심 가져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그 관심을 자신에게만 집중해 달라고. 여섯, 그는 신사가 된 것이 매우 기쁘다고 한다. 스타, 달인, 천재 등 어울리지 않는 수식보다 신사라고 해주니 좋다고. 자, 유재석은 신사인가? 이 여섯 가지는 우리 시대 남자들이 참 가지기 어려운 신사의 한 부분이라 다시 묻는다. – 컨트리뷰팅 에디터/ 조경아

강유미 강유미가 개그맨이 되기 전 백화점에서 캐셔로 일한 얘기는, 그가 주성치 영화를 본 횟수만큼이나 많이 한 얘기다. “정말 한 100번 정도 한 것 같아요. 질문이 항상 똑같아요. 개그맨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개그맨이 돼서 힘든 점은?” 그 질문을 안 한 게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동시에 ‘컨트리뷰팅 에디터로 고용해도 괜찮겠다’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학교 다닐 때 그녀는 일부러 정규 공부를 멀리하고 독학을 했는데, 마릴린 먼로의 배기통 포즈, 제임스 딘의 올백 머리, 우디 앨런의 뉴욕 냉소, 이빨에 김 붙이고 웃기는 주성치 개그 등으로 인생 공부를 했던 것이다. 와 <사랑의 카운슬러>에서 입시 학원 광고와 사랑밖에 모르는 순정만화, 연애 잡담의 클리셰를 조롱할 수 있었던 건, 굳이 공을 돌리자면 주성치 선생님 덕분이다. 알고 보면 마른 여자인 강유미가 무대 위만 오르면 여전사처럼 기선을 제압하는 것도 다 시고니 위버, 린다 해밀턴 선생님 덕분. 굳이 공을 돌리자면 말이다. “옛날엔 가족들만 모여 있어도 어떻게든 웃기고 튀어볼려고 노력했다니까요. 하하.” 백화점 캐셔 얘기 덕분에무슨 소녀 가장이 데뷔라도 한 인상을 심어 주게 됐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인생이 조금은 바뀐 것도 사실이다. 연기자, 만화가로서의 꿈을 조금씩 이루고 있으니.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 들었어요. 인터넷을 봐도 세상에 웃긴 건 도처에 있잖아요. 직업이 개그맨인데, 그분들보다는 더 웃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서 방금 말한 것을 종이에 적어 ‘나의 사명’이라 이름 붙이고 지갑에 가지고 다닌 적도 있다. 지금 당장의 사명은 해외 여행, 남자친구, ‘강유미, 이민기와 함께 영화 주연!’ 뉴스지만. 얼마 전엔 현빈이라더니? 하긴 여자는 변덕스럽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유미가 말한다. “연민 가는 변덕 아니에요?” – 에디터/ 나지언

장윤주 메이크업을 하면서부터 오전 인터뷰가 힘들었다고 쫑알거리던 장윤주는 자신이 무슨 얘길 했는지, 올해 들어 인터뷰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아직은’ 어떤 게 정답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 출판사는 그녀의 모든 걸 오픈하는 책을 내보자고 제안했지만 아직 어린 자신을 시시콜콜 알려야 하는 책은 부담스러워 고사했다. 스물여덟 살의 숙녀는 풍부한 표정과 큰 제스처를 섞고 참새처럼 가는 다리를 떨면서 말했다. “20대는 아직 좀더 지를 수 있는 시기잖아요. 아직은 자유할 수 있는.” 에디터에게 이 말은 ‘아직은 얽매이고 싶지않은 시기’라는 말처럼, 또는 ‘아직은 모든 게 조심스러운 시기’라는 말처럼도 들렸다. 그녀가 바라는 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오케스트라 40인분의 장쾌한 감동이 아니라, 타인에게 들려진 자신의 생각이 동의를 얻었을 때 찾아오는 그런 감동 말이다. 생각보다 ‘아직은’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장윤주는 “아직은 숙녀다운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흔적을 남기고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좋은 어른’아닐까요?” 여자의 가장 큰 특권은 아기를, 그것도 제왕절개가 아닌 자연분만으로 낳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델 장윤주는 ‘좋은어른’을 그렇게 정의했다. – 에디터/ 김형준

이순재 며칠 전 방송에선 게시판에 ‘악성 댓글’을 올린 것도 모자라 손자를 자기 대신 경찰서에 출두시키던 음흉한 할아버지가, 에디터 앞에선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과 ‘사실주의’와 ‘정극 연기’의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 얘기했다. 이런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프랑스 철학자 드니 드디로의 저서 <배우에 관한 역설>에는 ‘시시하고 후지게 연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기 성격 그대로 연기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가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며 혼이 빠지도록 웃을 수 있는 건, 배우 이순재가 50여 년 동안 전혀 다른 ‘진짜’ 연기만을 선보여왔기 때문일 거다. “그래도 손자를 경찰서로 보낸 건 너무 했어요. 게다가 <대부>를 패러디한 장면의 뻔뻔함이란.” 그는 에디터의 말을 받자마자 요즘 드라마 작가들의 ‘작가 의식 부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대본 말미에‘영화 <졸업>의 결혼식 장면처럼’이라고 쓰는 게 창피한 건 줄 모른다고.” 그는 다시 장삿속을 먼저 챙기고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배우 아닌) 연기자를 꾸짖는다. 현장에서 사명의식이 희박한 후배들을 질타한다. 이순재가 말하는 연출가의, 작가의, 연기자의 ‘신사됨’은 오히려 고결하고 금욕적인 ‘선비’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더하고 뺄 것 없이 꼭 이래서 이순재의 신사됨은 설득력이 강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며칠 뒤, 에디터는 아들(준하)이 되찾아준 ‘새 신을 신고 팔짝 뛰는’ 일흔세 살 배우의 연기를 깔깔대고 보다가 먹던 밥상까지 뒤집어엎을 뻔했다. – 에디터/ 김형준

배종옥 참 많이도 울고 울렸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그녀는 오열했다. 그녀 때문인지, 덕분인지 몰라도 에디터의 누이와 엄마 사이엔 묘한 경계선 하나가 그어졌다. 서로에게 슬픈 존재가 되기 싫어 만든 묵시적 경계구역 같은. 그녀는 <허브>에서도 울었다. 정신지체 3급의 딸을 둔, 동시에 암과 싸워 이겨야 했던 그녀는 방산시장에서 생선 파는 아주머니보다 억센 꽃집 주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울었다. 그리고 캄캄한 영화관엔 흰색 휴지가 도깨비 불처럼 날아다니며 여기저기 눈물로 젖었다. “꼭 그만큼 힘들었어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야무지게 혼자 선 줄로 알았는데.” 배종옥식으로 주어, 서술어, 띄어쓰기, 받침 하나 빼먹지 않고 끊어 말하던 그녀는 갑지가 비문 섞인 불완전 문장으로 술회했다. “정토회라는 걸 시작했어요. 그리고 많이 돌아보기 시작했고, 착한 일도 하고 싶어졌어요.”아직도‘무지개 여우’처럼 욕심이 많단 것도 알았다. 촬영하고, 딸도 돌보고, 책도 읽고, (매니저의 말에 의하면)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정토회도 하고, 대학원에서 언론 정보학 박사과정도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나면 한나절이라도 여행을 떠나다가 큰 맘 먹고 외국 나가서 또 배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해야 해요. 그게 제 일이거든요.” 신사, 숙녀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그녀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촬영했다. 정수기가 고장나 미지근하게 희석된 인스턴트 커피까지 최선을 다해 다 마셨다. – 에디터/ 장진택

정일우 윤호는 거침이 없다. 정일우는 꺼리는 게 많다. 친구들과의 추억은 친구들끼리만 공유하고 싶어한다. 윤호는 공부는 못하지만 의리를 아는 아이다. 정일우는 내성적이다. 오디션을 보러 가서도 항상 구석에 앉아 있는다. 하지만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끌리게 돼 있다. 정일우는 점점 윤호를 닮아가고 있다. 지금 MBC의 <거침없이 하이킥>은 할머니, 손녀, 며느리가 함께 보는 국민 시트콤이다. 그리고 손녀들은 모범생인 윤호의 형, 민호보다 윤호를 좋아한다. “요즘은 윤호가 정일우인지 정일우가 윤호인지 헷갈려요.” 이제 윤호는 정일우다. 수줍던 정일우의 목소리는 점점 윤호처럼 거침 없이 커져만 가고 있다. 어른은 소년의 미래다. 정일우한텐 이순재가 미래다. 그는 이순재처럼 되고 싶다. “선배님처럼 피곤해도 피곤한 내색 안 하고 촬영장에 먼저 와서 준비하고 후배들도 챙기고. 정말 신사죠.” 입에 발린 것 같지만 자신감에 찬 어투다. 순한 양의 눈을 가진 것 같아도 그 뒤로는 충혈된 야심이 번쩍거린다. 하지만 정일우식 이순재는 아직 세월과 연륜이 필요하다. 적어도 그는 당당하고 신사답고 싶다. “평소엔 남들 시선 신경 안 쓰고 살다가 막상 위기가 닥치면 남보다 먼저 나서는 그런 친구 있잖아요. 그런 남자가 멋있는 남자죠.” 맞다. “평소엔 자기만 생각하는 것 같아도 막상 필요할 땐 그 자리에 있는 남자. 신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스스로 신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남자가 되고 싶어요.” 윤호는 말썽쟁이다. 정일우는 용감하다. 둘이 만나서, 이제 신사가 돼 간다. – 에디터/ 이정윤

백건우 백건우는 3년째 베토벤과 함께 살고 있다. 베토벤 전곡 녹음 프로젝트 때문이다. 그리고 올 12월엔 예술의 전당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연주한다. 음악가에게 전곡 연주는 작곡가에 대한 경의이기도 하다. 온몸으로 연주하다 보면 어느새 그 작곡가가 된다. 백건우도 베토벤이 다 됐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베토벤의 음악처럼 힘이 있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그런 연주를 하고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은 어린아이가 연주하거나 대가가 연주하거나 각각 나름의 깊은 맛이 있어요. 겹겹이 쌓인 것 같아요.”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은 매일 다르다. 그래서 3년은 너무 짧다. “이 작업이야말로 평생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결코 질릴 수가 없죠. 칠 때마다 새로우니까.”그는 베토벤과 백년가약을 결심한 듯 단호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고약했다. 아니다 싶으면 나폴레옹에게도 함부로 했다. 베토벤이 살아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는 그를 신사라고 할 수 있을까? “베토벤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사는 아니죠. 옛날엔 사회적으로 예의범절이라는 게 정리돼 있었으니까.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신사죠. 하지만 다들 자유만 찾다 보니까 이젠 신사가 없는 것 같아요.” 백건우도 그를 변호하진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이 베토벤을 음악으로 이해했으면 한다. “그의 음악은 참 여러 세계를 그려요. 아이, 성인, 슬픔, 기쁨, 인생의 모든 게 다 담겨 있어요.”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한다는 건 인생을 이해한다는 거다. 백건우도 음악가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중이다. 여전히, 그렇게. – 에디터/ 이정윤

김미화 그녀가 봉숭아학당의 교편을 놓은 뒤로, 우리는 김미화의 반듯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고 있다. 저녁 6시에 시작하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2003년부터 진행하고 있고 주중 오후 1시면 시작하는 시사토크쇼의 방송횟수도 어느새 이백서른일곱 회를 넘겼다. 집 강아지 미간에 검정색 절연 테이프를 붙여놓고 킬킬대던 때를 생각해보면‘, 코미디언 김미화’에게서 코미디언이라는 단어가 깨끗이 지워진 건 아닌지 아쉽기도 하다. 아쉽고 걱정인 건, 하지만 대중매체를 통해서만 그녀와 만나는 대중뿐이다. 김미화에게 코미디언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도 되는 연필로 쓴 사랑이 아니라, 건물의 머릿돌에 힘주어 새긴 준공연도처럼 마모되지 않는 깊은 음각의 글씨 같은 거니까. “열심히 하는 게 재밌잖아요.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사는 거. 게다가 코미디언이 시사나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수준 높은 코미디 아니겠어요?” 순리, 경험, 선의의 경쟁을 삶의 우선 순위로 두는 김미화에겐 신사와 숙녀의 구별이 없다. “신사니까 이래야 해, 숙녀는 저래야지”라는 걸 의식하지 않고 지금에 충실한 게 제일이란다. 에디터의 어머니는 김미화와 같은 마흔네 살에 큰 수술로 자궁을 들어냈다. 스스로 일 중독이라는 그녀에게 건넬 수 있는 에디터의 인사말은 “건강 잘 챙기세요”였다. – 에디터/ 김형준

배용준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존재감은 신사에 가까웠다. 부드럽지만 단단하고 가득 차 있지만 꽉 막히지않은 어떤 것. <외출>을 찍고 나서 모든 스태프들은 한 통의 카드를 받았다. 발신인은 모두 배용준이었다. 한 사람의 배우라고 하기에는 너무 명민한 사업가처럼 보이고, 지능과 추진력이 훌륭한 기업가로 보기에는 배우로서의 열정이 너무 뜨거운 배용준은 촬영 내내 살가운 오빠, 든든한 형, 될성부른 후배, 뜨뜻한 동생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촬영이 끝난 어느 날 배용준에게서 온 손글씨의 소식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 유학을 앞둔 조명 스태프에게는 독일에 관한 이야기가 깃든 MP3 플레이어를,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음향 스태프에겐 담담한 조언과 함께 게임기를 보내는 식이었다. 그건 전략으로도 전술로도 어려운 일이고, 사업 마인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사의 품질은 그렇게 목격된다. 배용준은 창간 6주년을 맞는 <GQ>의 질문에 밀크 초콜릿 같은 미소가 아니라 방금 제대한 듯한 젊은 남자의 호방한 웃음으로 답했다. “신사요? 하하하.” 신사라는 걸까, 아니라는 걸까? 그럼 신사는 어떤 남자냐고 질문을 바꿨다. 속이 반듯한 남자, 진심 어린 배려가 몸에 밴 남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신은 신사인가? 그는 다시 웃는다.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하기도 어려운 듯한 난처한 웃음이 듣기 좋게 울린다. 어떻게 고쳐 물어도 그는 웃음 이외의 대답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배용준은 신사다. 내가 신사요, 하는 신사는 신사라고 하고 싶지 않으니까. – 컨트리뷰팅 에디터/ 조경아

진태옥 화이트 셔츠, 화이트 레페토, 흔들림없는 뒷모습. 변하지 않는 태도. 박정자는 말했다. ‘여자<GQ>가 있다면 그건 진태옥’이라고. 니트를 입은 진태옥은 처음이었다. 셔츠말고 니트를 입어선지 오늘에야 진태옥의 체구가 그렇게 가녀린 걸 알았다. 잔을 채운 녹차를 반쯤 비우고서야 알게된 또 한 가지는, 수화기 건너편을 고분고분하게 제압하던 목소리가 실은 왈츠의 템포처럼 부드럽다는 거다. 진태옥에겐 지적이고 당당한 여자, 자기 관리 철저하고 신뢰를 주는 여자가 40년 전부터 쭉 ‘뮤즈’였다. 그건 누가 봐도 진태옥, 자신이다. “제가 숙녀라고요? 저를 만든 건 어머니의 DNA, 그리고 세상에 나와 경험한 모든 것일 뿐인데. 젊었을 땐 다시 되뇌기 싫던 기억도 지금 진태옥을 만든 자양분이니까, 이젠 다 사랑해요. 1990년부터 S.F.A.A.에서 컬렉션을 발표해온 70대의 숙녀에게 가장 무례한 행동은 ‘서울 컬렉션은 의상 전공 학생들을 위한 디자이너들의 행사’란 말이다. “우리 나라는 밀라노나 파리처럼 바잉을 위한 컬렉션이 불가능한 시스템이에요. 학생들만 많은 행사라고요? 다음 세대가 될 학생들이 당연히 많이 와야죠.” 진태옥에게 진짜 신사란, 반기문이고, 남을 배려하는, 자기 일에 충실한, 문화 깊숙이 산책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남자는 셔츠를 입고 진짜 신사가 돼요. 단추를 두세 개 푼 셔츠 소매를 걷어올린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차례를 양보할 때 거기 신사가 있죠.” 진태옥의 남자용 화이트 셔츠를 다시 볼 순 없을까? “저도 그걸 바래요.” – 에디터/ 박정혜
박정자 침착한 얼굴로 초코 우유를 한 모금 마신 그가 말한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어요. 너무 큰 쇼크를 받았어요….” 재활용 판자로 만든 스툴에 앉은 그의 몸이 유난히 직각으로 보인다. 흰 치마로 감싸져 두드러진 무릎엔 깍지 낀 손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신의 아그네스>를 공연하던 중, 그는 사고로 입 속을 꿰매는 수술을 받았다. 공연을 쉬는 건 그의 생각에 ‘없는’ 일이었기에, 과다한 양의 진통제를 투여한 채 무대에 섰다. 머릿속이 혼미해졌고 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대본을 들고 연기했다. 공연이 끝나고 설명을 들은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쳤지만, 몇몇은 환불을 요청했다. “세상이 너무 건조해졌달까. 배우는 로봇이 아니잖아요. 인터넷도 아니고 컴퓨터도 아니잖아요.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무대에서 실수는 여러 번 했지만 이런 일은….” 그는 이어지는 지방 공연 모두를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아니다, 또 맞서자, 나를 또 넘어서는 게 중요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연극 배우 박정자는 지금 그렇다.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로, 어떤 위엄이나 용맹함을 떠올리는 건 쉽기도 할 테다. 무대에서 그를 마주한 적이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는 무기를 소지한 장군도, 현수막을 내건 선동가도 아니다. 다만 어떤 진심, 그걸 드러내고 있었다“. 어려워요. 진심은, 그거는, 셀로판지 같은 걸 거예요. 투명히 다 보이는 듯, 마음속의 요동, 숨, 호흡을 어떻게 다 알아 차리겠어요. <굿나잇 마더>를 할 때 그걸 연습하고 공연하는 동안 실제로 내가 많이 늙어 있었어요. 너무 수심이 가득해서. 진심을 통하지 않고 내가 배우라는 도구로만 했었다면 안됐을 거예요.”그 말들은 볕 좋은 날 적당히 찬 마루에서 귀를 파주던 누군가의 목소리로 환치되었다. 찡그려 뜬 눈에 초점이 맞진 않지만, 늘 떠올릴 수는 있는 그런 기운, 그런 진심들. “몇몇 어울리는 사람들과 있으면 그이들은 내가 가장 여자 같다고 말해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입을 모아 얘기해요. 그렇게 보여요?” 이미 매듭이 잘 된 고름을 다시 한 번 잡아당긴 그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기품이 있다면 그건 어떤 걸까요?” 라고 말했다. 그는 한바탕 웃고 나서 한복치마 속에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주위가 조용했다. – 에디터/ 장우철

이형구 이형구의 연남동 작업실은 꼭 의과대학 실험실이나, 고고학 연구소 같은 모습이다. 뼛조각들이 바글바글하고, 공업용 장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책상엔 인체 해부에 관한 책이나, 작업할 때 썼음직한 장갑이 뒤집어진 채 벗겨져 있다. 그는 올여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를 위한 작업에 몰두해 있다. “뭐랄까, 총체적으로 보여드리는 전시가 될 것 같아요. 이제까지 실험한 것 중에 잘된 애들을 선별해서 갈 겁니다.” 그가 말하는‘잘 된 애들’이란 실제로 어떤 ‘애들’모양이다. 만화 캐릭터의 골격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조합해 어떤 동작이 있는 형태로 재현해내는 ‘아니마투스’ 시리즈는 그가 오랫동안 작업해 온‘몸’에 대한 관심이 이룬 최신의 결과들이다. 그는 그 뼈들에 기분이 있다고 말한다. “작업 과정이 정말 길어요. 마지막엔 일일이 갈아내는 데 뼈가 가진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세심하게 다뤄야 하죠.” 그렇게 완성된 결과들이 전시장에 걸리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웃는다는 걸 발견했다. “정말 저는, 말하자면 심오한 자세로 작품에 임하고 딱 냈는데, 사람들이 웃더라고요. 놀랐어요, 그리고 인정했죠. 나쁘지 않다, 찰리 채플린도 생각하게 되고요.” 단호하지만 억세지 않은 경상도 억양, 검지로 안경을 올린 그가 멋적게 말한다. “어떻게 보면 창조주죠. 걔네들한텐….” 오늘은 조수들이 오지 않는 날이라며 지금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 에디터/ 장우철

배한성 또 차 얘기다. “그 찬 왜 파셨어요?”“그게 은근히 허리를 괴롭히더라고. 늙었나봐.” 요즈음은 노홍철이 빨간색 마티즈를 타지만, 9년 전엔 배한성도 빨간색 마티즈 오너였다. 그리고 그만한 크기의 일제 SUV를 타다가 뒤집어질 뻔해서 팔고, 한국에서 가장 먼저 뉴미니를 타다가 얼마 전 팔았다. 허리가 점점 아파져서. 그는 덩치 큰 차를 싫어한다. 비싸기도 하거니와 기름도 많이 먹고, 땅도 많이 차지하고, 주차하기도 힘들고, 승차감도 출렁거리고, 운전도 재미없고,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이고, 무엇보다 배한성이 싫어해서. 그날은 17년 된 차가 고장나서 에디터 차를 함께 타고 카센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머리를 만지고 얼굴에 뭔가 바르고 하얀 셔츠에 까만 바지, 커머번드도 하고 보타이 매고, 검은 뿔테 안경까지 썼다가 페도라를 손으로 돌리는 동안 수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그는 요즈음 좀 철없는 컨셉트로 가나 보다. 송도순에게 매일 구박받은 역을 자청하며 약간은 헐렁한 분위기로 퇴근길 교통정보를 알려 주더니, 오늘은 콜롬보 형사, 가제트, 맥가이버에 이어 가필드 흉내까지 내며 그러지 않아도 웃음보가 더진 포토그래퍼를 바닥에 구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찍힌 배한성의 턱시도 컷은 너무 많아서 뭘 고를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걸 골랐다. “아이고, 신사들은 꼭 이런 걸 입어야 하나? 신사되기 참 힘드네.”복잡한 수트를 비평하는 불쾌한 안면에 플래시가 터졌다. “선생님, 그래도 수트 자주 입지 않으세요?” “아내, 내가 그럴 일이 뭐 있겠어. 목소리만 나가는데.” – 에디터/ 장진택

박원상 “몽타주도 안 되는 게.”<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은 말했다. 보고야 만 약간 나온 똥배, 솔직히 길지 않은 다리, 어느 집안에나 꼭 있는 먼 친척 누구네 삼촌 같은 얼굴, 마침표를 좀처럼 주지 않는 느릿느릿한 말투. 이런 착한 몽타주로도 우리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게 배우, 그러니까 이건 분명 특별한 직업임에 틀림없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으로 발작적인 웃음을 주더니, 연극 <슬픈 연극>에서는 그와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것만로도 우리를 시름시름 앓게 했다.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 걸까? “꿈꾸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끝까지 즐기면서 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겠죠. 전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일이, 전 참 좋거든요.”그는 연극이 참 좋았다. 청년 박원상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게 과장법이 아닐 만큼. 그러고 보니 그에 관해 말할 때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다. 그는 똥배만 가진 게 아니다. 넉넉한 꿈도 가졌다. “근데 아이구,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마흔 다섯 살까지 45억을 모아 소극장을 차리는 것, 고 2때 박원상이 꾼 작은 꿈이다. 사실은 커다란 꿈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믿어요. 꿈도 계속 꾸면 힘이 있거든요.” 입은 웃고 있고, 쌍꺼풀 없는 눈은 순간 칼처럼 빛났다. 꿈꾸는 사람은 위험하다고, 밥 딜런이 말했다. 어쩌면 그 미련하면서도 위험한 꿈 때문에 그와 그의 가족들은 냉수 안 나오는 세탁기,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냉장고와 조금 더 같이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정도 들었고, 괜찮단다. 알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그가 93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 탄 노래 ‘아무 말도 말아요’처럼. 모든 꿈이 그렇듯이,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는 법이니까. – 에디터/ 나지언

최준상 “귀를 보면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이름은 씽씽이. 5년 됐어요. 처음엔 겁이 많고 불안해 했는데 지금은 여유가 많아요.” 그는 자신의 애마, 씽씽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제 소유의 말이다 보니까 믿음을 주고받으려고 노력하죠.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괜히 낯가지런, 쓸 데 없는 짓도 하고, 시합 전에는 마구간에서 말이랑 같이 자요.” 지난해 아시안게임은 최준상에게 마장마술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동료 선수의 죽음이라는 뼈아픈 일로 온전한 축하는 받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윽고 경기복으로 갖춘 그가 카메라 앞에 나왔을 때‘, 신사’는 개념이거나 이미지가 아니라, 지금 앞에 있는 남자 자체였다. “스포츠 중에서 가장 격식을 많이 따지는 종목일 거예요. 보호를 위해서 헬멧을 쓰는 식이 아니라 격식을 위해서 얼굴만 빼고 다 가리는 게 승마니까요. 진정한 신사는 항상 지킬 걸 지키면서 남들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저도 말을 타면서 배운 게, 동물은 아무래도 사람보다 지능이 떨어지니까 이해해야 하는 게 많아요. 배려하는 습관이 어느새 들게 되었어요.”촬영이 끝나고 원래 입고 왔던 대로 옅은 쪽색 핀스트라이프 수트에 태닝이 잘된 밤색 윙팁구두를 신은 그에게 데이트가 있느냐고 물었다. “예전엔 이상형을 물으면 그런 거 없다고 대답했어요. 그러다보니 조금만 좋으면 감정 가는 대로 흘러가기 쉽더라고요. 나이에 책임을 지고 싶고, 이젠 이상적인 여자에 대해 생각해요. 이젠 사람을 만날 때 그렇게 성숙한 태도로 만나고 싶어서요.”그는 데이트에 가는 건 아니라고 했다. – 에디터/ 장우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