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사이

음악을 글로 쓴다. 미술도, 글로 쓴다. 이미지와 음악이 문장으로 치환되는 순간 창작자와 수용자가 이어진다. 이건, 또 다른 창작일까?



미리 말하자면 이건, 끝나지 않을 논쟁일 수 있다. 쉬이 읽어 넘기긴 어려운 말들로, 논의는 지루하 게 이어졌다. 그 와중에‘평론의 위기’라는 말은 청담동 성형외과처럼 흔해졌다. 하지만 음악 시장이 망가져 도 음악은 팔린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창작과 불황은 판이 다른 문제다. 작가는 창조하고, 평론가는 쓴다. 창작과 비평 사이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비평은 창작의 시 녀’라는 폭력적인 정의부터,‘ 창작적 비평가’혹은‘철학적 비평가’에 대한 루카치의 논의까지…. 음악평론가 조원희 의 말은, 가감 없이 솔직한 평론가의 고백으로 들린다. “창작자들에 대한 동경과 질투가 있어요. 그런 자의식 이 제가 쓰고 있는 비평에 영향을 줄 때도 있어요. 비평가로 서 가져서는 안 될 자세인 건 알죠. 그런 자의식은 위험하다 고 생각하고, 최대한 줄이려고 이성적으로 다스리는데 은연 중에 나올 때가 있어요. 고해성사예요, 이건.” 평론의 출발은 다양할 수 있다. 그 시작은‘마니아’로 보는 게 보편적이다. 조원희도 적극적인 수용자였다. 시작 은 개인적 체험이었다. 듀란듀란의 LP였다.“ 중학교 땐가, 친구 집에서 듀란듀란을 들었어요. 친구가 여기서 드럼이 어쩌고, 베이스가 어쩌고 말을 하는데 모르겠더라고요. 그 래서‘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들의 음악을 듣는 게 무슨 소용이지?’하는 생각을 했죠. 그때부터 기타를 배우고, 체험을 시작했어요. 그게 기본이라고 생각한 거죠.” 1.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2.영화에 대 해서 글을 쓰고 토론하고, 3.영화를 만든다. 프랑스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마니아에서 창작 자로 가는 길을 3단계로 정리했었다. 적극적인 수용자가 비 평가가 되고, 그 힘이 창작에까지 미친다는 분석이다. 음악 도 다르지 않다. 조원희의 고백과도 일치한다. 적극적인 수 용자에서, 창작자로 가는 길을 택했었다.“ 결국‘씨네필’이 영화평론을 하고, 음악 마니아가 음악 비평을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거기서 한 차원 더 가서 뮤지션이 되고 싶었 어요. 그러다 보니 평론가로서의 주해와 평가를 창작자의 입장에서 하려고 했던 거죠.”

첫 직장은 1994년, 계간지 <리뷰>였다. 1998년엔 IMF의 직격탄을 맞았다. 그때부터 1년 동안 음악을 만들었다.“ 아무도 청탁을 하진 않았지만, 저 혼자 절필선언을 했었죠. ‘카사블랑카’라는 일렉트로니카 밴드였어요. 그리고 벽을 만났죠. 그때 이걸 깨달았어요. 내가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 을 것 같긴 한데, 이걸로 돈을 벌긴 힘들다. 꾸준히 하면 빛 을 보겠지만, 그날까지 먹고살진 못하겠구나. 1년 만에 그만 두고 다시 회사를 들어갔죠.” 조원희가 만든 음악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꾸준히 하 면 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천재’들도 있었다. 재능과 태 도의 차이였다. 남에게 들려줘서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게 아 니라, 자기가 좋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악을 하면 그게‘좋은 음악’이 되는 부류였다. 모 차르트와 살리에르에 대한 흔한 비유가 생각났지만… 그건 방향성의 문제이기도 하다.“저는 좀 쉬운 길을 간 거죠. 하 고 싶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험 악한 환경들보다는‘비교적’안락한 환경을 선택하는 사람 이 많은 거죠. 현실적으로.” 한편, 음악평론가 최세희의 입장은 달랐다. “명징한 해석의 언어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예술의 언어가 아니라, 창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트뤼포의 3단계는 제 얘기가 아니었죠. 이미 있는 현상이나 예술 작품, 좋거나 나쁜 현상들을 내 식으로, 나만의 언어로 치환하고 싶다는 욕구였어요. 창작자도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들을 얘기하고, 창작자들로 하여금 또 다른 자기 발견을 할 수 있게 하는. 그게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어떤 궁극이 아닐까요? 비평으로 독자에게 뭔가 주고 싶다는 건 오만한 것 같고, 자기 완결성을 갖춘 비평은 결국 설득력을 얻을 수 있 을 거라고 생각해요.” 독창적인 해석은 이미 창작의 영역이다. 원전과는 별개 로, 창작자와 독자에게 동시에 말을 걸 수 있다. 최세희의 비 평은, 창작의 주체가 되기보단 창조적인 해석에 대한 관심 이었다. 미술 작가이자 평론가인 류병학은 이렇게 말했다. “평을 썼는데, 그 비평문이 작품보다 뛰어날 수도 있죠. 그럼 그건‘작품’이에요.‘창작의 시녀’라고 불리는 비평은 흔히 말하는‘주례사 비평’이죠. 대한민국은 그게 대다수고, 독자는 그걸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

창작자와 비평가에 대한 논쟁은, 그 관계를 수직으 로 파악하면서 시작된다. 창작이 우위에 있고, 원전 없는 비평도 없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비평에도 창작과 같은 잣대를 댈 때, 관계는 수평이 된다. 애초에, 누가 누구의 시녀일 수는 없는 구도였다. 철학 없는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순 없고, 비평문도 다르지 않 으니까. 미술 비평은 그래서 죽었었다. 미술평론가 반이정 은 한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많은 미술 평론가들이 평론의 자주권보단 집단의 이해에 얽혀 평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미술 종합지 평론은 전문가 그룹을 독자로 설 정했음에도 여전히 의미를 알기 어렵고, 저널리즘 평론 중 일부는 일반 독자의 수준을 오히려 하향 평준화시켰다.” 미술을 말하는 비평들은 전문가 집단에서만 소구력이 있었다. 현학적이거나, 투박한 번역체였다. 아는 사람도 읽 긴 힘들고, 모르는 사람은 주눅이 들게 하는 묘한 문장들… . 한 큐레이터는 이렇게 고백해 왔다.“ 보통 외국 글들을 번역 해서 그대로 갖다 쓰는 수준이니까, 개념을 알고 읽어도 모 르겠는 글들이 많은 게 사실이에요. 아니면 개념도 모르고 그냥 번역만 했거나.” 비평과 창작의 이상은 같다. 새로움과 철학이다. 충격과 정수다. 그건 뛰어난 예술 작품의 조건이 기도 하다. 동일한 기조고, 다른 건 형식뿐이다. 류병학의 말이다. “창작이라는 것은 자기가 새로운 작업을 만들어내는 거 죠. 그것도 과거를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 그래야 새로 울 수 있죠. 패러디를 해도, 알아야 뒤집는 겁니다. 비평은 문제제기를 기본적으로 하지만, 대안이 있어야 비평입니다. 비난과는 다른 거죠.‘ 비평은 창작의 시녀’라는 건 지나간 얘기고, 비평하는 사람은 인문학적 지식과 사유가 갖춰진 사람이어야 해요. 그건 직업의 차이지, 내용의 차이는 아니 라고 봐요.” 음악평론가 조원희는 영화를‘창작’할 준비를 하고 있 다. 직접 쓴 시나리오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이 확정됐 다. 마니아에서 창작자로 가는 또 하나의 단계일까? 동기부 여는 다르지 않다. 다만 음악과 영화의 차이다. 조원희는 이 렇게 말했다.“ 비평의 동인이‘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 니라고 생각해요. 창작은 내가 발화를 하는 거고.‘ 나 감독 됐으니까 이제 비평은 안 해’그런 태도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에겐 비평가로서의 자의식도 중요해요, 동시에 창작 자를 지향하는 비평가임엔 틀림이 없고.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창작의 동인이죠. 이건 아주 개인적 인 차원의 얘기예요.” 창작과 비평 사이엔, 작가와 비평가 각각의 자의식이 있다. 이건 창작이 있어야 비평이 존재할 수 있고, 비평 없는 창작도 어불성설이라는 힘겨루기와는 다른 얘기다. 창작적 재능에 대한 의심, 동경과 질투는 오히려 필연이다. 류병학 은 이렇게 말했다.“ 뛰어난 창작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 혹은 동경은 일상입니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죠. 다 른 작가에 대한 존경과 환멸도 비일비재해요. 예능계에선 기본이죠, 다들 양심선언을 안 한다 뿐이지.”류병학은 이어 말했다.“ 창작자에게 자기 철학이 없는 건 말이 안 되죠? 비 평가는 비평가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미학적 관점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새로운 작품을 할 수 있겠 어요?‘ 좋아서 그렸어요. 느낌 괜찮지 않아요?’말이 안 되 는 거죠. 비평도 마찬가지죠. 비평가는 남이 뭐라고 하든, 자 기 철학을 개진하면서 써갈 줄 알아야죠.” 모든 창작품을 예술로 인정할 순 없는 것처럼, 창작품의 호오를 가리는 게 비평의 전부도 아니다. 제대로 된 비평의 조건은‘대안’이다. 대안은 비평가의 철학에서 나온다. 비 평이 예술로 도약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비평을 평가 하는 기준을‘예술’로 삼았을 때, 창작과 비평 사이의 괴리 는 그저 형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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