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2010년 1월의 서울엔, 여섯 대의 차와 나만 남아 있었다

캐딜락 SRX 90년대의 ‘캐딜락’엔 어떤 상징성이 있었다. 부동의 ‘사장님’ 차였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GM을 흔들었을 때, 모든 상징은 흐려지고 거대한 미국 차라는 허례만 남았다. 캐딜락 SRX는, 과거의 영광을 그저 기본기와 실력으로 되찾고자 한다. 외관은 화려하되 촘촘한 선들의 조합이다. 직선의 쓰임새가 과감하면서도 허술해 보이지 않는 건 전체를 조율하는 어떤 통일성 때문이다. 엑셀러레이터와 엔진은 예민하다. 살짝만 밟아도 RPM이 치솟는다. 그럴 때 한 번 더 밟으면 이 차의 가속력을 느낄 수 있다. 뒷좌석에 대한 배려도 충실하다. 운전석과 조수석 뒤엔, 뒷좌석에 앉은 사람을 위한 화면이 하나씩 달려 있다. 헤드셋을 쓰면, 완전히 독립적으로 음악과 영상을 즐길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차는 가족도 섭섭하지 않을 차다. 운전의 재미를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을 위한 차이기도 하다. 아무도 없는 올림픽 대로를 남자 혼자 휘젓기에도, 물론. 7천2백50만원.

아우디 뉴 R8 5.2 FSI 콰트로 이 차의 생김은 움직이지 않아도 꿈틀거릴 것 같은, 유기체에 가깝다. '저런 모양으론 공기도 타고 넘겠지’ 생각할 때 뒷유리 안으로 5.2리터 FSI 엔진이 보인다. 차체 중심에 최대한 가깝게 끌어당긴 심장이다. 1미터 25센티미터의 낮은 차체는 노면에 바짝 붙어 있다. 밟으면 밟는 만큼 튀어 나가고, 꺾으면 꺾는 만큼 돌아 나간다. '운전이 편한 슈퍼카’라는 모호한 역설이 R8의 운전석에선 명징하게 성립한다. 최고출력 525마력. 제로백 3.9초, 200킬로미터까지는 12초. 최고 속도는 시속 301킬로미터다. 매년 24번째 토요일에 열리는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몇 번이나 우승했던 R10의 우성인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2010년형 R8이다. 시트에 엉덩일 깊숙이 묻고 앉았을 때, 시동을 걸었을 때, 이 차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다. 혼자서만 달리고 싶어진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사라진 서울에서, 딘도 카펠로처럼. 24시간 내내라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으로. 올해는 마냥 행복하길 바라는, 소년 같은 마음으로. 2억1천6백만원.

BMW 미니 캠든 캠든은 미니쿠퍼 S를 기본으로 만든 미니 50주년 기념 모델이다. 도시에선, 포르쉐를 따라잡겠다고 덤빈데도 무시할 수 없는 차. 그리고 상황에 따라, 짙은 영국 발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차량의 상태, 주의사항, 날씨 등을 1천5백 개 문장으로 전한다. "연료가 없어요, 채워주세요”하고 알려주거나, 남자가 “안전벨트를 체크했어요” 하면 여자가 “좋아요!” 하고 받는 식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혼자서 달려도, 외롭진 않을 거야. 캠든이니까. 내년 9월까지만 생산된다. 3천9백95만원. 닛산 로그 4WD 디럭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선, 가볍게 돌아가는 핸들, 기민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반응하는 차체, 어머니가 운전해도 편안할 것 같은 정숙성. 하지만 1000~2000rpm 사이에서 엑셀러레이터를 밟을 땐 2,500cc 엔진 배기량이 무색할 정도의 힘도 느껴진다. 인테리어는 실용과 중용이다. 호화롭지도, 아쉽지도 않다. '이 정도면…’ 하고 끄덕이게 된다. 로그rogue는 악동, 개구쟁이라는 뜻인데도. 3천4백60만원.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4 3.0 TDV6 HSE ‘랜드로버’와 ‘오프로더’는 동의어다. 디스커버리4는 5년 만에 출시됐다. 출력은 29퍼센트, 토크는 36퍼센트 향상됐다. 연비는 리터당 9.3킬로미터다. 바윗길, 빙판길, 내리막길 등 노면의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터레인 리스폰스’는 그대로다. 출력과 변속을 알아서 제어한다. 진흙에서 바퀴가 헛돌 땐 ‘샌드 론치 콘트롤’로 탈출한다. 자갈밭을 달리기 전엔 차체를 14센티미터까지 높인다. 그러면서, 강남대로에선 어떤 세단보다 부드럽게 치고 나갈 줄 안다. 3.0리터 디젤 엔진을 얹고도 고요하다. 깔끔하게 포장된 아스팔트를 괜히 원망한다. 아무리 정숙해도 이 차는 디스커버리 니까. 극한까지 몰아 세워도 안전할 거라는 믿음, 한계를 시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물을 잔뜩 머금은 뻘이라도 모른 척 달려보고 싶은. 어떤 산의 정상이라도 넘고 싶은. 8천9백90만원.

메르세데스 벤츠 S 63 AMG L S는 벤츠의 최고급 라인, AMG는 벤츠의 고성능 버전이라는 뜻이다. AMG 모델의 원칙은 “원 맨-원 엔진” 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이 손으로 만든다. 63은 엔진 배기량이다. 6,208cc 엔진이 들어 있다. S 63 AMG는 셋의 아찔한 조합이다. 제로백이 4.6초라는 사실도, 시속 250킬로미터였던 속도 제한이 풀렸다는 것도, 운전석 위에선 그저 쾌락처럼명징하다. 코너에 들고 빠질 땐 패들시프트로 엔진브레이크를 조롱한다. 무게와 크기를 짐작할 수 없었다. 놀라움은, S 클래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의외의 호사에서 온다. 운전석에 장착된 열한 개의 공기 주머니가 핸들을 꺾을 때마다 바깥쪽으로 향하는 허리의 관성을 잡아준다. 굳이 근육을 쓰지 않아도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 '디스트로닉 플러스’ 라고 불리는 기술도 적용됐다. 앞 차와의 거리를 알아서 조절한다. 시속 0~200킬로미터 사이에선, 앞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끼어들거나 운전자가 미처 감속하지 못할 때 알아서 감속한다. 2억3천5백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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