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은 아무나 하나

한 개의 도미노 블록이 전체 도미노의 운명을 좌우한다. 매체는 그 한개를 얕본다. 매체가 ‘개인’이 눈여겨볼 만한 걸 추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매체는 ‘대중이 유명인을 바라서’라고 했다.

‘추천’이란 검색어와 가장 근사한 목적어는 여행이다. 구글검색창에 추천을 입력하고 ‘운 좋은 예감 I’m Feeling Lucky’ 버튼을 눌렀을 때의 결과다. 여름휴가 기간을 거치며 축적된 데이터다. 당신이 여행지 추천 사이트를 찾을 확률이 높다고 여기는 이유다. 검색 결과 페이지를 건너뛰고, 단번에 원하는 사이트를 찾아주는 ‘운 좋은 예감’ 버튼은 사용자가 채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구글은 이 버튼으로 매년 약 1억 달러의 손실을 본다. 광고 페이지 유입률이 줄기 때문이다. 구글의 검색력을 상징하는 버튼이므로 쉽게 빼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기업 윤리를 강조하는 구글로선, 이윤 추구만으로 기울지 않겠다는 의지의 전시가 이 버튼의 가치라고 보는 듯하다. (구글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브린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밝힌 내용들이다.) 산술적인 이익으로 판단되는 시장에서 ‘운 좋은 예감’ 버튼의 입지가 좁아진데는 ‘개인’이 인터넷의 진짜 정보를 선별하는 지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배경이 있다. 개인은 근사치가 아니라 ‘단 하나’ 혹은 ‘다른 하나’를 찾을 만한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운 좋은 예감’ 버튼의 쇠퇴를 통시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인간의 목적어, 욕망은 본래 근사치를 낼 수 없다. 스티븐 베이커는 <뉴머러티>에서 카네기 멜론 대학의 기계 학습 과정 교수, 제이미 카보넬의 말을 인용한다. “평균 모델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가 가진 여러가지 흥미의 평균치가 아니거든요.” 카보넬 교수가 남북전쟁의 역사와 컴퓨터 생물학에 흥미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아마존>은 생물학의 역사에 관한 책, 과학적인 문제에 대한 남부와 북부의 대립을 보여주는 책을 추천했다. ‘운 좋은 예감’이 데이터를 처리하는 수준과 다를 바 없었다. 개인의 욕망을 정확히 파악해내기에 아직 시스템은 성기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추천한 노래 한 곡을 이길 만큼 복잡하고 정교하지 못하다.

현대의 욕망을 집대성하는 잡지는 추천의 파괴력을 일찍이 알았다. ‘이럴땐 이런 음악’ ‘아무개 감독의 인생을 바꾼 영화’같은 기획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끝도 없이 재생산됐다. 추천이라는 기획은 한 번 더 꼬거나 다른 기획을 더하는, 느리게 진화해 가는 시스템일 뿐이지만 참여하는 인물은 늘 새롭다. 매체는 지루한 건 못 참는 십대 아이들 같고, 유명세는 그 아이들의 기호만큼이나 빨리 뒤엎인다. 유명세를 쫓는 게 매체의 욕망이란 말은 반쪽에 불과하다. 매체는 연산 체계가 아니다. 그런데 어째 한국의 매체에서 만나는 ‘추천’은 시스템보다 나을 게 없다. 이때의 ‘추천’은 개인의 정보 접근에 가하는 일종의 공해 같다.

<네이버>가 ‘캐스트’를 신설하면서 만든 많은 콘텐츠를 관통하는 형식이 추천이다. ‘테마영화 추천’, ‘그의 플레이 리스트’ 따위가 직접적인 경우다. 이 추천 목록은 <10아시아>에서 나온다. <10아시아>가 인터뷰로 만나는 인물들에게 추천 목록을 받고, 이를 ‘다양한 장르의 중독성이 있는 음악’,‘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영화들’따위로 소개한다. 모든 인터뷰이들에게 추천받는다는 기획은 처음엔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꾸준하게 이어지면서 문화예술계 종사자가 ‘어떤 취향’를 가졌는가의 중요성을 각인시킨다는 의의가 생겼다. 뭘 들었기에 그런 음악을 만들었는지, 뭘 보았기에 저런 드라마를 영화를 만들었는지, 사소하게는 차에서 틀고 다니는 음악이 뭔지 알고 싶어서 대중들은 추천 리스트를 살핀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망스럽다. 예컨대 제이슨 므라즈와 너바나, 라디오 헤드, 학창시절의 대중가요로 점철된 ‘그의 플레이 리스트’가 그럴 만한 거리가 될지 의문이다. 전문성은 차치하고라도 참으로 어떤 취향도 없는 리스트다.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본 할리우드 영화 몇 편이나 광고를 통해 들은 음악 몇 곡을 좋아하는걸 취향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혹시 그건 ‘추천’이라고 부를 게 아니라 ‘유명세의 확장’이라고 명명하는게 적절하지 않을까?

이제는 매체뿐만 아니라 단행본도 추천한다. 유명세가 검증된 사람들이 꼭 한 번 거쳐 가는 과정이 ‘추천하는 책’이다. 그들이 추천하는 책, 그들이 가 본 가게, 그들의 쇼핑 리스트가 담긴 책이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목적이 추천도서 리스트를 확인하는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한 메이저 출판사 편집자 K의 말이다.“뭐 추천받겠다고 읽는 게 아니에요. 카페에 꼭 커피 마시러 가는 게 아니듯이 말이죠. 대중들은 어떤 책을 읽은 명사의 경험을 보고 싶어해요. 대중들은 지식이 아니라 대리 체험을 필요로 해요.”

하지만 ‘대중’이란 단어에는 함정이 있다. ‘대중’이 원하는 건 꼭 보편타당할까? 다수의 욕망은 대체로 옳지만, 더 나은 길을 ‘개척’하진 않는다. 더 나은 길의 개척, 진보는 인류의 지상명제에 가깝고 소수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한다. ‘대중적’임을 증명하는 유명세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사회에서 개척은 쉽지 않다. 하물며 매체가 유명세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스튜디오 보이스>는 추천이라는, 전통적인 잡지기획을 극단적으로 성취한 경우다. 1976년에 창간 타블로이드형 신문으로 발행하다가 1979년부터 잡지 형태로, 2009년 9월호를 마지막으로 온라인 매거진으로 전환했는데, 이 기간 동안 <스튜디오 보이스>는 추천이란 형식을 벼랑까지 몰고 가는 콘텐츠로 유명했다. 예컨대 ‘만화책 속의 성문화’, ‘드로잉으로 보는 건축가의 욕망’, ‘흑인이미지의 과거와 현재’, ‘로버트메이플 소프가 남긴 것’ ‘파리의 재즈’같은 주제를 매달정해서 책의 2/3를 채웠다.

그들은 집요하고도 세밀했다. 매호가 특집이었다. 독자들은 혼란스러웠다. 매체가 추천이란 형식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은 다 아는 걸 정리하는 게 아니라 세상엔 볼 게 너무 많다는 혼란을 주는 거라고 믿는 듯했다. 혼란을 위해 성실해지는 과정의 중심에 편집자가 있었다. 유명세보단 전문성을 취했고, 잡지의 역할이 당대의 욕망을 전시하는 거라면 동시대의 지역 사회가 가진 욕망의 정수를 전시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즉, 대중에게 등을 돌리는 것도 편집자의 역할 중 하나였다.

얼마 전 국립중앙도서관은 <공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같은 책이 포함된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 80선’을 ‘추천’했다. ‘개인’을 얼마나 우습게 봤기에 이런 책들을 추천 리스트라고 소개했을까? 아마도 대중성과 보편성을 고려했다고 답변할 텐데, ‘운 좋은 예감’ 버튼보다도 인터넷 서점의 ‘이 책을 구입한 분들이 구입한 다른 책’이 보여주는 근사치보다도 못하다. 연산 시스템의 추천이 전문가 집단이 내는 추천보다 나은 사태다. 개인을 ‘대중’이란 말에 묶어두었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대중’이란 말에 사로잡혀 있다면,매체든 전문가든 명사든 그들이 고려하는 수준, 펼쳐보일 수준은 뻔하다. 그들에겐 평균치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대중’이 있을 뿐, 목적어가 있는 ‘개인’은 없기에. 매체의 추천이란 형식은 개인이 대중을 만남과 동시에 개인이 개인을 만나는 일이다. 매체는 개인에 대해 한 개의 도미노 블록처럼, 하나이면서 전체의 책임감을 손끝 떨리게 감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를 우습게 보면 전부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