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의 설계자들

대중과 언론의 속성만 이해하면 여론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그 뒤엔 이성적인 설계자들이 존재한다.

아버지가 큰 형님을 고발했다. 지난 9월 2일 신한금융지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한 직원들한테 라응찬 회장은 아버지였다. 신상훈 사장은 큰형님이었다. 이백순 신한 은행장은 작은 형님이었다. 아버지는 작은 형님을 시켜 큰 형님을 검찰에 고자질했다. 횡령과 배임이 죄목이었다. 주주들은 분노했다. 사람들은 실망했다. 큰 형님은 존경 받던 금융인이었다. 남의 돈을 만지는 금융인에게 배임과 횡령만한 수치는 없다. 문제는 아버지의 체벌 방식이었다. 검찰 고발 말고도 방법은 많았다. 회사 안에서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작은 형님은 공개적으로 큰 형님을 망신 시켰다.

신한 사태는 은행 지배 구조 문제가 얽힌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사건이다. 장기 집권해온 1인자 아래 2인자는 제거될 수밖에 없는가. 지배 주주가 없는 금융 기업의 평화로운 경영권 교체는 불가능한가. 무미건조한 논의다. 흥미진진한 건 따로 있다. 집안 싸움 탓에 주주들이 화가 났다. 일본 주주들을 만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아버지와 큰 형님은 멀찌감치 앉았다. 주주회장에선 고성이 흘러나왔다. 큰 형님은 억울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모두 적개심, 배신감, 분노, 실망, 슬픔 같은 사건의 감정적 측면들이다. 아버지는 큰 형님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사건을 감정 싸움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성적 논의들은 현직 경영자들 한텐 득 될 게 없다. 대기업과 달리 금융 기업엔 주인이 없다. 주인 없는 기업에서 주인 아닌 사람들이 주인 행세를 하다가 누가 주인이냐 싸우고 있다. 이제까진 주인 없는 기업이 더 민주적인 기업이라는 사회적 주장이 대세였다. 주인이 없어도 집안 싸움 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정책과 여론의 큰 흐름이 바뀔 수도 있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게 유리하다. 어차피 대중 독자들한테 중요한 건 금융 산업의 미래가 아니다. 금융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권리 따윈 애초부터 독자들한텐 없었다. 흥미로운 건 아버지와 큰 형님의 멱살잡이다. 언론은 독자의 관심을 먹고 산다. 당연히 언론도 아버지와 큰 형님의 비행기 좌석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를 중개 방송한다. 그곳에 팔리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큰 형님을 검찰에 고발했다.

여론은 설계할 수 있다. 대중적 감정과 언론의 속성과 이성적 목적만 이해하면 된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감정이다. 사건의 본질과 배경은 중요하지만 고루하다. 대중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건 감정적으로 공감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다. 감정은 타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느끼게 해준다. 사건 속 감정은 필요악이란 얘기다. 그걸 이용하면 된다. 감정을 움직이면 대중을 사로잡고 언론을 현혹해 세상을 흔들 수 있다. 어차피 본질이 휘발될 거라면 사람들을 감정의 외줄 위에서 놀게 하면 그만이다. 그 사이에 원하는 걸 얻을 수도 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어지럽히는 숱한 사건이 다 그런 식이다.

오은선 대장이 카첸중가에 정말 올랐느냐를 놓고 논쟁이 뜨거웠다. 정상 정복 여부가 사건의 본질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거짓말 여부에 호기심을 느낀다. 같은 얘기 같지만 정반대다. 올랐느냐 아니냐는 매정한 사실이다. 거짓 여부는 분노와 실망을 양산한다. 김연아와 오서 코치가 결별했다. 진실보다 중요한 건 배신이었다. 누가 먼저 등에 칼을 꽂았느냐 만큼 짜릿한 궁금증은 없다. 타블로의 학력이 논란거리다. 네티즌의 관심은 타블로가 정말 스탠포드를 졸업했느냐에 머물러 있지 않다. 타블로가 거짓말쟁인지를 궁금해한다. 타블로가 별 볼 일 없는 사기꾼이라면 속 시원한 여론 화형식을 치를 수 있다.

케이블 TV의 소재였던 4억 명품녀가 국정 감사장에서도 화두가 됐다. 국세청 홈페이지는 세금 포탈 여부를 수사하라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외무부 장관 딸의 특채 논란이 문제가 되는 건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국민의 절망 때문이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부가 대운하 사업의 진실을 감춘다고 믿는다. 그들은 속은 것 같아서 화를 낸다. 지금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수많은 사건은 모두 몇 가지 원초적인 감정들 안에 갇혀 있다. 실망, 배신, 분노, 억울함, 상실감, 절망 같은.

그 감정 뒤엔 무엇이 숨겨져 있다. 신한 사태는 정부가 거대 금융 기업에 대한 경영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결판날 수 있다. 대중의 실망이 관치 금융의 앞길을 터주는 셈이다. 정체불명의 4억 명품녀 덕분에 국세청은 새삼 정의의 심판관으로 거듭났다. 계층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졸부를 발본색원하면 정부도 공정사회를 더 크게 외칠 수 있다. 오은선 대장은 등산 도중 비극적으로 사망한 고미영 대장과 경쟁 관계였다. 오은선 대장은 블랙야크의 후원을 받고 있다. 고미영 대장의 후원사는 코오롱이었다. 히말라야 14좌 등정은 등산 장비 기업들의 대리전이었다. 오은선의 실패는 분명 누군가의 승리다. 신임 조직 수장의 낙마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숨겨진 DVD를 찾아 방송에 찔러준다. 방송사는 특종이라며 방송한다. 사람들은공분한다. 물러나라는 여론이 빗발친다. 다 같은 이치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목적이 있는 이성적 설계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감정의 쓰나미로 논리를 깔아뭉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 영화 한 편에서도 같은 설계도가 적용 된다. 영화 <아저씨>는 장기 밀매에 이용당하는 어린아이들을 내세워 관객을 분노하게 만든다. 죽어 마땅한 악당들을 정의의 사자한테 먹잇감으로 내던져준다. ‘아저씨’는 기꺼이 악당들을 쳐죽인다. 분노, 불신, 화풀이의 대상을 만들어주면 감정이 표출된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끊임없이 감정을 쏟아낼 대상을 만들어주는 일련의 여론 설계들이다. 그렇게 감정을 설계하고 나서 언론에 사건의 실마리를 흘리면 그만이다. 언론은 대중적 공분이 터져 나오는 사건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클릭 수와 시청률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언론에 보도되는 많은 사건이 제보를 통해 취재가 시작된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사건이 사실은 특종이 아니라 설계된 감정들이다. 그 뒤에서 이성적인 목적 달성이 이루어진다.

당진의 작은 제철소에서 사고가 났다. 지난 9월 7일 29세 청년이 섭씨 1600도 용광로에 빠져 죽었다. 연합뉴스와 MBC <뉴스데스크>가 짧게 소식을 알렸고, 곧 잊혔다. 죽음을 세상에 알린 건 짧은 추모시였다. 누군가 기사에 댓글로 남겼다. 포털의 화젯거리가 됐다. 언론에 포착됐다. 하지만 언론은 죽어버린 청년에게는 무심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글쓴이가 살아 있는 취재거리였다. 시인은 안양에 사는 허 모 씨였다. 청년의 죽음은 그렇게 흘렀다.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해서, 어떻게 전파되고, 타올랐다가, 증폭되고, 버림받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대중은 사건에 관심이 없다. 사실과 배경은 건조한 읽을거리다. 대중은 사건에 감정적으로 개입하고 싶어 한다. 추모시는 사건에 슬픔을 덧씌웠다. 대중이 느끼고 싶어 하고 언론이 전달할 수밖에 없는 건 본질이 아니라 감정이다. 대중이 고파하는 감정을 던져주면 손쉽게 여론을 지배할 수 있다. 한사코 언론 취재를 거절하던 허 씨가 말했다. “저에게 관심을 보일 일이 아닙니다. 언론이 취재를 해야 한다면 바로 사고가 일어난 사업장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당신의 심장을 조종하고 있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