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없이는 못살아

10년 전에도, 지금도 똑같은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선다. 여자농구의 세대교체는 아직도 요원하다.

지난 9월, 여자 농구 대표팀은 세계선수권 8강에 올랐다. 2007년 아시아 농구 선수권 우승, 2008년 베이징 올림픽 8강 등에 이은 쾌거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대한 기대도 덩달아 높아졌다. 과연 한국 여자 농구가 다시 살아난 걸까?

분명 최근 대회에서 대표팀은 목표 이상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팀이 강해졌다기보다, 강한 선수들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농구는 세계 4강에 들었다. 당시 정선민, 전주원, 박정은 등이 중심이 된 대표팀은 한국 여자 농구의 황금 세대로 불렸다. 그들이 2004년 아시아 농구 선수권을 기점으로 대표팀을 떠난 이후 국제대회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아테네 올림픽 본선 전패, 세계선수권 13위 등, 새롭게 꾸린 젊은 대표팀의 경기력은 예상보다 더 나빴다. 결국 도하 아시안게임 4위 이후 협회는 다급해졌고, 노장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올해 세계선수권 대표팀의 평균 연령은 29.4세로 대회에 출전한 16개 팀 중 제일 나이가 많았다. 베스트 5의 평균 나이는 무려 32.8세였다. 아시안게임이야 잘 치른다 해도 그 이후의 상황은 어려울 게 뻔하다.

박건연 SBS 스포츠 여자 농구 해설위원은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는 가장 큰 원인으로 유소녀 농구의 침체를 꼽았다. “프로에서 초등학교까지 피라미드 구조가 이뤄져야 하는데, 중고 팀 숫자 차제가 너무 적어요. 팀 선수가 5명이 안 되는데 경기는 해야 하니까 정식 선수 경험이 없는 선수까지 출전하죠. 공격할 땐 가만히 서 있고 수비할 땐 한 명만 졸졸 쫓아다니고 그래요. 관중들도 그거 보면서 웃죠.” 현재 전국엔 28개의 초등학교, 21개의 중학교, 20개의 고등학교 여자 농구 팀이 있다. 피라미드는커녕 원통에 가까운 구조다. 여고 농구 팀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해당 시, 도가 체전 자체를 출전할 수 없기에 팀이 없어지진 않지만, 몇몇 명문 고교 팀을 제외하곤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다.그러나 유소녀 농구의 침체라는 측면만으로 세대교체 실패를 모두 설명하긴 어렵다. 국내 대다수의 스포츠, 특히 여성 스포츠는 자의든 타의든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취하고 있다. 유독 여자 농구의 세대교체가 어려운 건 프로의 문턱에 들어섰을 때 생기는 제도가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자 프로 농구 6개 구단은 매년 드래프트를 통해 선수를 뽑는데, 1라운드에 뽑힌 선수와는 의무적으로 5년 계약을 맺는다. 선수가 매년 한 경기에 10분 이상 출장할 경우, 5년 후 FA가 된다. 그러니까, 열아홉에 데뷔한 선수가 스물셋에 FA가 되어 억대 연봉을 챙긴다? 턱없이 짧다. 남자 프로 농구 선수는 군 복무기간을 제외하고 5년을 뛰어야 FA가 된다. 프로야구는 9년이다. 게다가 선수들은 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프로에 뛰어든다. 유소녀 인프라마저 허약한 상태에서 기존 선수들과 기량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신인이 들어와서 어느 정도 경기력을 보이기 위해선 최소 4~5년 정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제도에서 누가 선수를 키우려고 할까요? FA 5년은 너무 짧아요.” 박건연 해설위원의 말이다. FA는 선수들의 권익을 위한 제도다. 그러나 되레 이 제도가 대다수 젊은 선수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1라운드 출신 선수는 그나마 상황이 낫다. 기량이 뛰어나고 팀이 선수의 가능성에 확신을 가질 경우, 5년이란 시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일예로 신한은행의 최윤아는 2004년 데뷔 후 세 시즌가량을 백업 선수로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 감독의 과감한 지원 아래 2008~2009 시즌 MVP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성장했다. 더 큰 문제는 2라운드 이하로 지명된 선수들이다. 1년 이상의 계약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 그렇다고 팀이 4~5년 동안 2, 3라운드에서 뽑은 선수를 기다려줄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매년 드래프트에 참가해 신인 선수를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를 뽑아 ‘일자리’를 만드는 건 구단을 떠나 기업의 책무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신인을 뽑지 않는 일엔 구단에서 큰 부담을 갖는다.

우리은행은 지난 드래프트에서 4명의 선수를 뽑았다. 이례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좀 달랐다. “세 번째 선수는 그 선수가 안 뽑히면 한 학교 출신 선수가 아무도 안 뽑히는 상황이었어요. 물론 실력도 있는 선수였지만, 어떻게 안 뽑겠어요. 네 번째 선수는 우리 연고지 선수였고요. 매년 신인은 뽑아야 하는데, 기량이 뒷받침되지 않아 고민이 많아요.” 우리은행 정태균 감독의 말이다. 협회와 연맹은 드래프트 성적을 기준으로 유소녀 지원금을 배분한다. 선수가 뽑힌 학교와 뽑히지 않은 학교 간 금액 차이가 생긴다. 학교 입장에선 한 명이라도 선수를 배출해야 농구단을 꾸려나가는 데 숨통이 트이고, 구단은 이런 상황을 감안해 선수를 선발한다.

실제로 우리은행이 2008년 드래프트에서 선발한 세 선수 중 현재 남아 있는 선수는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뽑힌 박혜진뿐이다. 나머지 두 선수는 이미 팀을 떠났다. 여자 프로농구 전체를 살펴봐도 2008년 드래프트 선수 15 명 중 단 8 명만이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2군이 존재한다면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지만, 현재 여자 프로 농구엔 2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가 훈련에 집중하며 재기를 노릴 시스템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구단과 협회, 연맹, 선수들까지 모두 2군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프로 농구 감독 A의 말은 놀랍다. “여자 프로 농구단 운영하는 데 한 해에 35억~50억 들어요. 다들 이 숫자를 들으면 의아해하더라고요. 너무 적다고. 그런데 구단 쪽에선 협회나 연맹에서 2군을 운영해주길 공공연히 말하고 있어요. 돈 쓰기 싫단 거죠.”

협회나 연맹 차원의 2군 육성은 어떤 프로 스포츠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구조다. 2군은 팀의 미래에 직결되는 일로, 구단에서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FA연한은 짧고, 신인들의 발전 속도는 더딘 상황. 1군에 있는 신인들조차 활용하지 못하는 현재 구단은 특별히 2군까지 운영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
“비시즌 동안이라도 협회나 연맹이 육성군을 만들어 훈련시킨다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몇몇 구단은 숙소나 체육관 대여도 가능하다고 밝힌 상태죠.” 정태균 감독의 말이다. 지난해 샐러리캡 파동 당시 구단이 빼든 카드가 드래프트 불참이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구단이 새로운 선수를 발굴하는 데 인색한가 하는 단면을 잘 보여준다. 협회와 구단이 최근 아시안게임 대표 선수 차출을 놓고 큰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협회나 연맹이 세계대회가 있을 때마다 선수가 없다고 볼멘소리를 할 게 아니라 직접 선수 육성을 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최근 협회와 연맹, 구단은 뒤늦게 유소녀 지원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연맹 차원의 유소녀 캠프와 대회를 열고, 중고교 지원금 역시 매년 늘리는 식이다. 아래부터, 기초부터 바꿔 세대교체를 단행하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정작 프로의 틀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에 대해선 구단과 협회, 연맹 모두 손을 놓고 있다.
정선민은 지난 시즌 MVP를 받았다. 그러나 시상식장에서 그녀는 웃지 못했다. 그녀는 “그만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빨리 좋은 선수가 나와서 이 자리에 후배들이 섰으면 합니다. 마음이 무겁네요”라는 말로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김지윤은 병상에 누운 채 아시안게임에 참가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했다. 대체할 만한 선수가 없다는 걸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정선민과 김지윤에겐 잘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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