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을 마치며 별의별 것에 다 참견했다 – 2

2010년을 마치며, 있는 대로 오지랖을 넓혀 별의별 것에 다 참견했다. 시종일관 바른 말만 하려다가, 그렇지않아도 지루한 판인지라 유머도 섞었다. 여기에 없는 열한 명의 남자 이름은 약 일백 페이지를 넘긴 후, MEN OF THE YEA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올해의 점포 정리 ‘식스투 파이브’
비가 패션 브랜드를 만들어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고 전속 모델로 나왔을 때, 이걸 어쩌나 싶었다. 어디서 본 세부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식스투 파이브’는 비의 이력에 도움은커녕 오점만 남겼다. 그리고 올해, 비 사장님의 옷 가게는 고별전(사실은 땡처리)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재능 많고 욕심도 많고 기를 쓰고 하는 데는 따라갈 자가 없는 비가 이제는 음악만 만들길. 뻔한 얘기지만 가수는 무대 위에서 제일 멋지다. 여러 가지 하는 게 ‘월드스타’의 자존심은 아니다.

올해의 패션쇼 2010 F/W 앤 디 앤뎁 옴므
기괴한 헤어 메이크업도, 생선처럼 삐쩍 마른 모델도, 해롱대는 음악도 2010 F/W 앤디 앤뎁 옴므 쇼엔 없었다. 그 대신 단정하게 빗은 머리, 회색 울 수트가 어깨와 허벅지에 팽팽하게 맞는 건장한 모델, 저절로 흥분되는 뮤즈의 음악이 그야말로 호탕하게 등장했다. 오랫동안 길렀던 부스스한 머리를 짧게 잘랐을 때처럼 시원했달까. 몇 년 전, 차승원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던 송지오 쇼라면 우위를 겨뤄볼 만하지만 올핸 다른 후보 없이 1위다.

올해의 오프닝 명동 H & M
모든 뜬소문을 한 방에 잠재우며, 지난 2월 27일 명동에 H&M이 문을 열었다. 오프닝 당일에만 2만 8천여 명이 모였고 약 6억 5천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특히 소니아 리키엘과 협업한 니트는 27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는 데만 한 시간씩 기다렸다는 하소연이 난무했을 정도. 게다가 평소 고고한 모습만 보였던 남자들도 니트 하나를 붙들고 ‘머리끄덩이’라도 잡을 기세였으니, 당분간 어떤 가게에서도 이 정도의 사투는 없을 듯.

올해의 엔딩 <지붕뚫고 하이킥> 마지막 장면
<지붕 뚫고 하이킥> 마지막 장면 엔딩을 보고 절망이나 분노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누군가는 친절한 해석으로 위로를 건넸다. 따뜻하고 온유한 일이다. 그러니 됐나?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엔딩에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소위 대중의 표상으로 둔갑하는 것에 분노한 사람들은 누가 어떻게 위로할 텐가? 새삼 이유를 달진 않는다. 이 엔딩은 불멸일 테니까.

올해의 어플 카카오톡
스마트폰의 사용성을 이메일과 인터넷에서 메신저로 확장했다. 문자 요금 부담 없이 실시간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화방을 만들어서 실시간 회의를 여는 기묘한 풍경도 연출됐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하면, 카카오톡이 다른 메신저 응용 프로그램에 비해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간편한 주소록 연동에 더해, 사진 업로드가 된다는 점이었다. 대화 말고 다른 사람 사진 구경 하려고 카카오톡을 설치한 사람이 많았다.

올해의 커플 공효진 하정우
각자 알 만한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있지만 이들은 올 해 두 개의 광고에 커플로 등장했다. ‘체인지 유어 라이프’를 외치는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와 ‘맥주 맛도 모르면서’를 외치는 맥스.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 보였던 이 두 사람은 꼭 사촌 남매처럼 눈 속에서 서로 기대 있거나 나무 평상에 앉아 맥주 맛을 아느니 모르느니 옥신각신했다. 이들이 장동건, 고소영을 제치고 올해의 커플로 선정된 이유는 무엇보다 기억에 또렷이 남는 ‘뚱딴지 궁합’ 때문이다.

올해의 가게 일 치르꼬
일 치르꼬에서는 구두를 사는 것보다, 내게 맞는 구두를 고르는 게 더 황홀하다는 걸 알게 된다. 같은 상표의 구두를 파는 가게는 있어도 구두에 몰두하는 고상한 ‘오타쿠’들이 있는 구두 가게는 일 치르꼬뿐이다. ‘피팅’에 근거해서 각자의 발에 맞는 올바른 구두를 찾아주는 집요한 탐험도 일 치르꼬에만 있다. 지구 어디서도 같은 걸 찾을 수 없는, 알든 별주 모델들은 기분 좋은 덤이다.

올해의 루머 아메리칸 어패럴
누군가의 트위터에 미국에서 아메리칸 어패럴의 모든 제품이 1달러에 팔린다는 소식이 떴고, 별안간 가게가 사라질지 모르니 미리 사둬야 한다는 소동이 불처럼 번졌다. 모든 건 새빨간 거짓말. 근거도 없고 출처도 불분명하다. 그 후 몇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메리칸 어패럴은 멀쩡하다. 트위터 루머의 가장 막강한 후보는 마크 제이콥스가 ‘뱅뱅’과 협업했다는 소문이었다. 하필이면 ‘뱅’이란 향수를 만든 마크 제이콥스를 탓해야 할까?

올해의 순간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펫 숍 보이즈의 무대.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Jealousy’를 들으며 우는 사람이 많았다. 이어서 ‘Being Boring’이 나왔을 때, 눈물의 정체를 짐작할 만한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지.’ 그 노래가 그런 가사였다는 게 그제야 생각났다. 어떤 20대의 쓸쓸한 후일담도, ‘Being Boring’의 한 구절보다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날 밤에는 닐 테넌트가 성경에 손을 올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노래를 불렀고, 20대가 저물어도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는 걸 펫 숍 보이즈의 무대는 보여주었다. 기뻐서, 또 한 번 울었다.

올해의 게스트 <놀러와>의 쎄씨봉 친구들.
송창식이 TV에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올해의 게스트로 충분했는데, 쎄씨봉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조영남, 김세환, 윤형주가 함께 나왔다. 기타를 들고 나와 하모니를 냈다. 이하늘과 길, 김원희가 탄성을 지르고 우는 등의 호들갑을 떠는데, 그것이 호들갑으로 보이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들이 부른 건 정말 ‘노래’였다. 숨길 수 없는 친구들이었다.

올해의 망언 “<인생을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
이 문구는 ‘참교육 어머니 전국 모임’과 ‘바른 성문화를 위한 전국 연합’이 유력 일간지에 개재한 광고다. ‘참’과 ‘바른’이라는 선한 단어가 이런 식으로 결합됐을 때, 또한 그들의 믿음이 이런 식으로 강요될 때…, 언어는 가장 맹목적인 폭력의 도구가 된다. 이런 정도의 공포를 유발하는 광고가 21세기 한국 일간지 역사에 또 있었을까? 하지만, <인생은 아름다워>를 본 어떤 ‘아들’이 순수하게 드라마의 영향만으로 게이가 될 확률과, 그 ‘아들’이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AIDS에 걸릴 확률, 그리고 마침내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걸 SBS가 책임져야 하는 논리는 뭘까? 논리 없는 분노의 공적 표출이라는 점에서, 올해의 망언으로 선정.

올해의 실언 “배추가 비싸니 내 식탁에는 대신 양배추 김치를 올려라.”
지난 9월 30일, 이명박 대통령의 말이다. 9월 30일 현재, 배추는 한 포기에 8천9백 원, 양배추는 1통에 9천4백80원에 팔리고 있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말했던 건 마리 앙투아네트였나? 이승만 대통령은 “춘궁기라서 국민들이 굶고 있다”는 전언에 “쌀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 않나”라고 되물었다는 말도 ‘패키지’로 전해온다. 과연,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전통적이고 ‘글로벌한’ 실언이다.

올해의 어처구니 로봇물고기
이런 어처구니가 있어서 옛 어른들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니, ‘삽’ 먼저 단속해야 맞으려나. 로봇 물고기를 만든다고 했다. 대당 2천4백만 원으로 예산 60억을 투입하는 일이다. 세상에 눈먼 돈이 그리 많나 싶어 쓴웃음이 다 나온다. 나중에 어디 수영장에나 안 가 있으면 다행이지 싶다.

올해의 간과 파 이스트 무브번트
처음 파 이스트 무브먼트의 이름을 들은 건 <패스트 앤 퓨리어스 : 도쿄 드리프트>에서였다. 데리야키 보이즈가 되고 싶은 한국 교포들인가 보구나. 칸예 웨스트와 넵튠즈의 지원을 업고도 데리야키 보이즈는 빌보드 정복에 실패했다. 아, 정말 동양인은 안 되나 봐. 그리고 4년이 지나 올해 늦은 여름, 뮤직비디오에 소주와 막걸리, 한국어가 등장하는 뮤직비디오를 봤다. 노래가 심상찮다 싶더니 10위, 6위, 2위, 그리고 어느새 1위. ‘원 히트 원더’면 어떤가? 빌보드 1등이다, 1등.

올해의 팀 SK와 이번스와 두산 베어스
적수가 없었다. 한국시리즈에서의 SK와이번스는 완전히 다른 팀이었다. 정규 시즌 한때 삼성에 1위를 위협받기도 했지만, 정작 큰 무대에선 4:0으로 완벽히 제압했다. 김광현 카도쿠라의 원투 펀치, 준 감독급 포수 박경완의 존재, 정근우와 김강민을 축으로 한 탄탄한 수비는 포스트시즌에서 더욱 단단하고 견고했다. 4년 동안 세 번의 우승. 2010년을 넘어 2000년대 최고의 팀으로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두산 베어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올해의 음모론 차두리 로봇설
로봇이라고 수식한 배경에는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신체 조건이 주효했지만, 좀 더 결정적인 증거는 얼굴에 있었다. 사람들은 차두리의 웃지 않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안면 근육 콘트롤러는 차두리 몸에 있어서 차범근이 원격 조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제까지 제기된 모든 음모론 중 가장 명쾌하고 유쾌한 증거가 함께였다.

올해의 자동차 아우디 A8
아우디 A8은 2010년 말, 가장 눈부신 진화를 보여주었다. LED 주간 주행등은 패션의 속성을 넘어섰다. 대신 기함 본연의 품위에 걸맞은 일종의 언어가 되었다. 인테리어는 편의장치나 호화로움에 대한 어떤 차원을 넘어 그저 아름답다. 출시 전에 이미 2백 대가 사전 계약됐고, 출시 일주일 만에 1백 대가 더 팔렸다. G20에 참여한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벤츠와 BMW 대신 아우디 A8 방탄차를 한국에 실어왔다. 아우디는 오래 벼린 기술과 감각이 안팎으로 총동원된 정점인 A8을 출시함으로써 한 해를 마무리했다.

올해의 어부지리 코리아 그랑프리 우승자 알론소
그날, 영암엔 시작 전부터 예측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다, 더 굵어졌고, 대회는 실시간으로 지연됐다. 비는 그쳐도 젖은 노면에서,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다. 이변은 19바퀴째 일어났다. 2위로 달리던 웨버의 머신이 미끄러져 벽에 부딪쳤다. 1위는 베텔, 2위는 알론소인 상황에서 베텔의 머신엔 불이 붙었다. 엔진 과열이었다. 결국 레드불 팀의 두 선수가 사고로 경기를 포기했고, 3위로 달리던 알론소가 코리아 그랑프리 최초의 우승자가 됐다.(결국, 종합 우승은 베텔이 차지했지만.)

올해의 카메라 캐논 550d
니콘의 D7000도 뛰어났고, 일부 기능이 빠지면서 평가절하된 면은 있지만 캐논 60D도 만만치 않은 제품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런저런 미묘한 가치 평가를 누르는 건 가격이다. 550D의 가격으로 그 정도 하드웨어를 달성하기는 앞으로도 힘든 일 같다.

올해의 동명이인 김정은
김정은을 검색했을 때 ‘배우’ 김정은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은이 뒤섞여 있는 검색결과라니. ‘김정은의 초콜릿’이나 ‘배우 김정은’이나 ‘김정일 김정은’처럼 서로를 배려하는 구체적인 검색어 입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같이 쓰고 보니 김정은을 검색하기 위해 김정일이 먼저 떠오른다는 건, 분발을 요하는 부분이 아닐까? 예컨대 아버지 김정일을 치면 첫 번째 연관 검색어는 ‘3천 궁녀’다. 한편 농구선수 김정은은….

올해의 승부 두산과 삼성의 플레이오프
모든 경기가 한 점차 승부. 여섯 번의 역전, 두 번의 연장. 방망이를 꼿꼿이 세운 타자들은 도망가면 따라잡고, 벌려놨다 싶으면 다시 신나게 두들겼다. 매 경기 여섯 명, 일곱 명의 투수들이 불려나가 기진맥진. 삼성의 철벽 불펜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침내 5차전, 삼성이 5점 차를 따라잡아 연장에 갔을 땐, 절로 박수가 나왔다. 11회 말, 결승타가 나왔을 땐, 한국시리즈가 남았는데도 꼭 포스트시즌이 다 끝난 것만 같았다.

올해의 주장 박지성
팀의 리더는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맡는 게 좋을까, 통솔력이 뛰어난 사람이 맡는 게 좋을까? 박지성은 2010년 월드컵을 통해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걸 확실히 보여줬다. 주장은 무엇보다 존재감이다. 박지성은 2002년 월드컵이 이룩한 성과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프리미어리거의 아이콘이었다. 그로 인해 선수들은 안정감과 의욕을 잃지 않았다. 맨체스터에서 관찰한 결과, 그는 아시아 축구의 주장이기도 했다.

올해의 게임 문명 5
문명은 설명서를 베개로 써도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복잡한 게임이다. 꾸준히 마니아 층은 공고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 문명을 모두가 알게 된 건 게임 속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간디는 “순순히 금을 넘기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위의 말로 게이머에게 지원을 호소, 또는 협박한다. 간디의 캐릭터와 유혈사태란 말의 독특한 이질감은 네티즌을 열광시켰고,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리메이크 사진과 글귀가 탄생했다. 그렇게 문명은 패키지 게임이란 약점에도 불구하고, 2010년 가장 주목 받는 게임이 되었다. 사실 애초에 재미만 붙이면 적수가 없는 게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문명하셨습니다.”

올해의 과대평가 G20
라디오에선 11월 11일부터 12일까지, ‘거리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유쾌한 한국을 보여주자’는 취지의 캠페인을 했다. 서대문구청은 G20 기간에 음식물 쓰레기를 회수하지 않겠다 발표했다가 취소했다. 단체 이름이나 메시지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고 경찰이 검문한 어떤 사람의 옷엔 ‘유니세프unicef’라고 적혀 있었다. 강남 일대 전봇대에 내걸린 화분들은 회의 전날까지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있다가, 회의 기간 동안 화사했다가, 지금은 얼어 죽었다. 어쨌든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하고, “G20의 성공은 국민의 성공”이라고들 하니, 이제 한국은 곧 선진국이 될 것이다.

올해의 가사 모임별 ‘태평양’
이 노래의 가사를 여기에 옮겨 쓰지 않는다. 이 노래의 가사만큼은 직접 노래로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임 별은 <월간뱀파이어> 형태를 벗어나 처음으로 음반을 내놓았고, 이 노래는 ‘너와 나의 지난날’에 대한 한 떨기 에델바이스였다. 그날 밤 술 마시고 홍대 앞 주차장 모든 차를 밟고 다녔던 일마저 미화시킬 수 있는 폭력적인 꽃. 더구나 그 가사를 알아듣는 일이 노래방 복도에서 듣는 것처럼 에코로 휩싸일 때, 우리는 누군가와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럴 만큼 참 아름다웠기에.

올해의 웹툰 <이 말년 시리즈>
‘병맛’이야말로 웹툰의 대세라지만, 올해 이말년은 ‘병맛’으로는 차마 넘지 못할 것 같았던 어떤 선을 넘었다. <이니셜 M>, <조선 쌍놈>, <힙합 베짱이> 같은 작품에는 아이디어도, 재치도, 서사도 없다. 일단 억지에 가까운 소재로 웃기고 시작하지만, 작품을 보면 인물들은 하나같이 애절하다. ‘병맛’을 끝까지 밀어붙인 곳에서, 애가 타는 인생을 보았다.

올해의 명불허전 임요환
스타크래프트 2 데뷔전에서 서버를 마비시켰다. 부랴부랴 주최 측은 서버를 늘렸고, 이윤열과의 8강에선 352만 클릭이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다른 선수들의 평균 클릭 수는 30만 정도. 32강 안정민과의 경기에선 한 기의 유닛도 잃지 않고 ‘무손실 경기’로 승리를 거뒀다. 아직도 임요환의 해병은 죽질 않는다.

올해의 뚝심 류승완
검검사나 기자 혹은 기업 총수라면 뜨끔했을까? <부당거래>는 시작부터 끝까지 풀리지 않는 영화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같은 언론사를 직설화법으로 노출하면서 어떤 의도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류승완 본인은 개의치 않는다. “아니, 광화문 네거리에서 카메라 ‘앵글’이 나오는 큰 전광판 있는 신문사가 거기밖에 없어요.” 의도 같은 건 없다는 듯이. 없어도 좋다. 다만 세 명의 남자가 정강이 ‘까고’ 뒤통수로 받고 업어치고 매치면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말초적인 쾌락만으로도, <부당거래>는 빛나니까.

올해의 1면 <경남도민일보>8월 30일자
8월 30일자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가 각종 비리로 사퇴하자, 김태호가 두 번이나 도지사를 지낸 경남의 일간지 <경남도민일보>는 ‘권력 감시 역할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제목의 사과문을 1면에 발표했다. 신문의 1면은 그들의 정치적 어젠다와 입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얼굴과 같다. 지금껏,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일간지의 1면 헤드라인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언론의 감시견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선명하게 경종을 울린 사례도 없었다.

올해의 부담 <즐거운 나의 집> 신성우
하긴 그가 담백했던 때를 떠올리자니…. 저 유명한 표기법을 다시금 되살려, “해과 쥐기 전에 과려 했쥐” 노래하던 때부터 언제나 상징 이상의 상징으로서 비유법조차 물리치는 이였다. 부담도 즐거울 때가 있다는 걸 여러 사례로 알게 되었지만, 그가 대사를 시작하는 순간 뭔가는 꼼짝없이 얼어버린다는 점에서 즐겁기는 좀처럼 힘들다. 2AM이 ‘전활 받지 않는 너에게’를 부르는 장면이 막판까지 이 부문 수위를 다퉜다는 사실로, 조금이나마 이 두꺼운 부담감을 해소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올해의 라디오 DJ <홍은희의 음악동네>의 홍은희
다섯 살 조카에게나 쓰던 말, 사랑스럽다. 그 말이 절로 튀어나오니 당황스럽다. 홍은희는 사연을 읽든 노래를 소개하든 항상 조곤조곤 동그랗다. 그리고 데구루루 구른다. 구슬과 이슬이 그리하듯이. 뭔가 어려운 고민이 있어 그녀에게 답을 청하면, 해법은 고사하고 “어떡해요” 하나로 위로가 온다. 일부러 위하는 척하지도, 애써 모르는 척하지도 않는다. 아이였다면 엄마라고 불렀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 일단 듣고만 있는다.

올해의 이별 앙드레김
아무도 그의 패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스케일에 대해, 연예인에 대해, 이마를 맞대는 쇼의 엔딩에 대해 말했다. 혹은 대책 없는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김현철과 이혁재가 마주 보고 앙드레김 흉내를 낼 땐 다 내려놓고 웃기도 했다. 그의 핵심은 사람들의 웃음 속에 가려져 있었다. 어쩌면 평생 몰랐을 이야기들, 알고 나서 새삼스럽게 따뜻해졌던 한 남자의 면면들. 아직도 신사동 앙드레김 건물 쇼윈도는 철마다 새로운 옷이 걸리지만…. 모두, 그가 떠난 뒤에 알게 됐다.

올해의 다관왕 이대호
아카데미나 그래미에서 7개 부분을 석권했단 말은 심심찮게 들어본 적이 있어도, 프로야구에서 7관왕이라니. 이대호는 올해 뛰는 것 빼고 모든 부분에서 최고의 타자였다. 잘 맞추고, 잘 넘기고, 잘 살아나가고, 멀리 쳤다. 9경기 연속 홈런으로 보란 듯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MVP를 수상하는 자리에서 “4년 전에 수상하지 못했을 땐 비참했습니다. 속으로 칼을 갈았죠.”라고 말했다. 그 해, 이대호는 4관왕을 거두고도 MVP 수상에 실패했다. 올핸 도무지 적수가 없었다. 29년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시즌을 보낸 타자의 첫 MVP였다.

올해의 철의 여인 보아
보아는 밀어붙였다. 누가 뭐라든, 누가 뭐라 하지 않든, 숨기지 않고, 생각했던 대로, 여봐라는 듯, 그냥, 했다. ‘허리케인 비너스’와 ‘Copy & Paste’는 결코 독보적이랄 수 없는 노래였지만, 보아는 우주의 단독자처럼 쩌렁쩌렁했다. 키 높이 구두니 뭐니, 커 보이는 스타일이니 뭐니 그런 거 없이 보아라는 이름만으로 크게, 채웠다. 무대에 오른 사람으로서의 용맹함은 허튼 소리 따위 모두 잠재웠고, 그리고 그토록 닳았던 단어 카리스마가 그녀에게 가선 고양이 꼬리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벌떡 일어나 박수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전하고 싶다.

올해의 희망 조국
섣부른 기대를 걸어 정치인으로 추켜세우고 싶은 뜻이 없다곤 안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희망은 ‘반가움’ 정도로 해석하면 좋겠다. 워낙 (넓은 의미의) 인물 없는 정치 지형도 안에서 그의 존재는 그저 흥미로웠다가, ‘인권위 탈퇴’라는 결단과 <진보집권플랜> 같은 인터뷰집을 통해 반갑다는 말의 포문이 열렸다. ‘조국의 희망’이 전에 없이 좋은 말이 됐다.

올해의 행동 뉴타운 컬처 파티 51+
뉴타운 컬처 파티 51+두리반이라는 이름은, 밥집이었다가, 용산의 억울함을 잇는 또 하나의 터전이었다가, 음악과 사회운동이 결합한 창조적이고 자생적인 사건이 되었다. 올해 5월 1일이었고, ‘게토’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두리반에서는 음악을 행동의 무기로 삼은 공연이 열렸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도 ‘락’을 좀 압니다. 어렸을 때 ‘락’을 들고 거리에 나갔거든요.”

올해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고, 현장을 분석하고, 원인을 확정 짓는다. 최소한의 논리다. 천안함을 둘러싼 논쟁에선, 발생과 확정만 있었다. 나머진 엇갈리는 분석과 의혹의 연속이었다. 물기둥은 실제로 있었을까? 중어뢰의 폭발력과 그날 발생한 지진파의 폭발력의 맥락이 맞지 않는다는 건? 녹슨 어뢰 추진체의 설계도는 가짜로 밝혀졌고, 러시아 천안함 보고서는 이 추진체가 이미 6개월 이상 수중에 있었다고 판단했다는 설에 대한 설명은? 그 유명한 ‘1번 어뢰’ 안에서 발견된 가리비는 지금 제거되고 없다. 의혹은 의혹으로만 남았다. 그런 채 뭔가를 확정 짓는 데 필요한 건 언론의 단정과 정부의 정책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상한 일엔, 논리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올해의 서울 2010년 1월 4일
새해 첫 출근 날, 서울은 온통 하얗게 뒤덮였다. 그리고 이내 멈췄다. 분명 불편했을 것이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한 번쯤은 아름답구나 멀리 보았을 것이다. 바로 그때의 기분 같은 서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시사철, 대대손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