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해의 팔도강산

<전국노래자랑> 30주년 기념 방송 현장에서, 송해의 긴장과 몰입을 여덟 시간 동안 관찰했다. 그가 진행해 온 26년 역사를 온전히 헤아릴 순 없었다.

꽃다발을 받아 들고 “이것 참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때, 내내 굳어 있던 얼굴이 이렇게 풀렸다. 지난 26년 동안 만났던, 일요일 정오의 웃음이다.
꽃다발을 받아 들고 “이것 참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때, 내내 굳어 있던 얼굴이 이렇게 풀렸다. 지난 26년 동안 만났던, 일요일 정오의 웃음이다.

올해로 30년째다. <전국노래자랑>은 1980년 11월 9일 일요일 낮 12시 10분 첫 방송 이후 시간도, 날짜도 바뀌지 않았다. 이후 1984년부터 지금까지 진행자는 송해였다. 지난 11월 3일 오전 10시, KBS 신관 공개홀 진행자 대기실엔 송해 혼자 있었다. 두꺼운 원고지에 손글씨로 쓴 대본을 거울 앞에서 읽고 있었다. 녹화는 5시부터였다. 그가 말했다. “사진? 몇 ‘카트’ 찍을 거 아니요? 그야 얼른 찍어요. 난 이거(대본) 보고 있을게. 녹화 전엔 내가 말을 못해요.” 이날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상반기 및 연말 결선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출연자들이 모인 특집이었다. 1986년 연말 결선에서 배철수의 ‘사랑 그 아름답고 소중한 얘기들’을 불러 대상을 받은 안관수 씨의 이마는 24년만큼 넓어져 있었다. 오후 1시. 같은 자리에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송해에게 꽃다발을 건넸을 때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그러곤 “전구욱!”, “안녕하세요오!”, “이거 감사합니다!”라고, 무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카메라를 보면서 발성했다.

오후 2시, 그는 무대 구석구석과 악단, 출연자들의 리허설을 살폈다. 새벽 4시에 산책하면서 그날의 날씨를 갈음하는 농부처럼…. 오후 3시엔 최종 리허설이 준비됐다. 출연자들이 송해와 이정민 아나운서를 맞았다. 그가 말했다. “여기서 내가 큰절을 하면 출연자들은 일단 퇴장하는 게 좋아요. 그게 보기도 좋고, 멘트할 때 옆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면 보기에 아주 산만하거든.” 공개홀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채형석 피디는 말했다. “아무래도 송해 선생님 경험이 가장 소중하죠. 무대에선 선생님 말씀이 대부분 옳아요.” 다시 대기실에 들어갔을 때, 송해가 말했다. “아유 몇 카트나 쓴다고 이렇게 종일 졸졸 따라다녀? 방송하기 전에 이렇게 귀찮게 하면 이게 ‘자마(방해의 일본말)’가 돼서 못 써요. 이젠 정말 집중해야 해.” 녹화 30분 전이었다. 26년 동안 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남자의 나이는 올해 여든셋이다. 녹화가 시작됐을 때, 그가 “전국!” 하면 객석은 “노래자랑!” 했다. 그가 “얼씨구나 지화자!” 하면 객석은 “조오타!”고 받았다. 객석 앞에선 연신 웃는 얼굴이라서, 볼은 부풀어 있었다.

송해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한 26년 동안 1백20명의 PD가 그를 거쳐 갔다. 그는 “그 많은 피디들이 지독한 시어머니를 거쳐간 셈”이라고 말했다. <전국노래자랑>은 매주 방송이 그대로 역사가 되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가족오락관>,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도 끝났다. 송해는 91년에 건강 문제로 쉬었던 몇 개월을 제외한 모든 무대의 중심에 있었다. 그를 무등 태운 젊은이의 어깨에서 떨어져 어깨뼈가 빠지거나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도. 한 프로그램의 정체성이자, 시청자의 할아버지이자. 친구이자 오빠로서…. 녹화 30분 전, 송해와 헤어지면서 물었다. “긴장 안 돼세요?” 그는 말했다. “평생 한 건데 뭐가 떨려? 다 대본이에요, 대본.” 녹화 중, 카메라가 1번 출연자를 비출 때 송해가 진행자석에서 걸어 나왔다. 마이크를 든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고 추임새를 넣자 관객들은 그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쳤다. 송해의 작은 몸이,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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