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표정이 있다

자신의 웃는 얼굴이 좋다고 했다. 시는 표정 하나 남길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이성복이었다.

패션지가 왜 나를 인터뷰하냐고 했죠? 대학 때 찍은 사진들에선 꽤 화려하던데요?
에이, 무슨. 나한테 좋은 옷은 나를 신경 쓰지 않게 하는 옷이라.

색깔이 화려한 건 배제되겠네요.
남의 이목 끄는 건 옷이건 뭐건 싫어. 제일 좋은 옷은 옷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옷.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게 많잖아? 제일 좋은 선생은 선생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선생. 제일 좋은 시는 시라는 생각이 없는 시. 음, 그리고….

어떤 색을 좋아하세요?
한참 좋아했던 색은 하늘의 푸른색이었는데, 중년에 녹색으로 바뀌더라고. 그런데 지금은 또 녹색이 싫어. 다시, 그 푸른색.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에서 “젊은 시절 우리는 만나는 여인들의 옷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더 나이 들어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고의적인 환상에 의해 옷이 믿음을 대신하게 된다”고 쓰셨어요. 그런 사물이 있나요?
오. 고 부분 중요하지. 늘 시가 안 되니까…. 옛날에 그 시를 썼던 만년필을 구하면 다시 잘 쓸 수 있을 것 같고, 그래.

무슨 만년필인데요?
독일제인데, 뭐 있어. 지금 나는 시에서 겨울나무 같은 상태거든. 내년이 되면 다시 잘살지, 지금 이게 마지막일지, 알 수 없는.

다시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으세요?
지금은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얘기하면 믿음이 차별을 만들고, 늙었나 젊었나를 결정한다. 어릴 때는 생일하고 생일 아닌 날하고 엄청 차이 나잖아. 그런데 노인한테는 생일이건, 설이건 똑같아. 물질 원소로 치면 물. 예를 들자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물똥은 정말 더러워 보이잖아. 생명의 원천이 다 더러운 모습인데, 물기 빠지고 나면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는 거지.

인터뷰 전에 꺼내 보여주신, 가방에 든 수많은 문장이 담긴 쪽지는 어쩐지 부적처럼 보였어요.
오죽 기억을 못하면 그래 하겠나. 지금 내 이빨도 하도 많이 써서 오래 쓴 자동차 타이어처럼 밋밋하거든. 지금 이빨의 요철이 없는 상태야. 인간은 생득적인 것들이 빠져나가면, 어떻게든 그 자리에 있기 위해 믿음을 불러낸다고.

옷이든 색깔이든 뭘 좋아한다는 것, 그러니까 취향조차도 사실은 자기가 뭔가를 좋아한다고 ‘믿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이를테면 임플란트.

시인에게도 취향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취향이 아니라 어떤 시인에게 되풀이되는 이미지, 어떤 표정들, 육십을 먹어도 계속 나타나는 시선. 그게 없으면 작가라고 할 수도 없지.

문학에 대한 의무감이 없어서일까요? 지금 세대의 시 쓰기는 취향의 확장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는 본질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거야. 근데 취향이라는 건 말하는 거지. 그러니까 듣지 않고 말한다는 건 시가 아니고 예술이 아닌 거야. 정치가나 웅변가일 수는 있어도 시인은 아니라고 생각해. 시인은 자기의 생각이나 세계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의 세계에 의해 버무려지고 조형되는 어떤 존재, 세계가 시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빌려주는 거라. 근데 요즘 시인들은 세계에 널린 사물의 결을 무시하고 있다고.

쓰는 것보단 듣는 게 더 중요하다?
‘이성’할 때 ‘이’자가 ‘다스릴 이’거든. 이발사도 그 자를 쓰거든? 이발사가 이성이 발달했다는 게 아니라, 머리를 결에 따라 고르는 게 이발사라. 예술가나 작가는 세상에 나 있는 그 결을 발견하고, 그에 의해 주조되는 존재. 그러니까 작가라는 존재는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낳는 사람이야. 봐봐, 엄마는 애를 낳는 거지. 분만하는 건 견디고, 수용하고, 인내하는 거지. 엄마가 뭐 오늘은 손톱, 내일은 이빨 만드나? 우리는 정말 하나도 만들 수 없다고.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겸손하지 못하다고. 카프카가 그랬어. “우리가 어떤 것을 거칠게 대하면 그것은 천박한 것이 되고 품위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초대받은 손님처럼 대한다면 그것은 언제까지나 가치를 잃는 일이 없을 것이고 귀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도 그렇고, 문학이 세상을 떠받드는 손님으로 묘사하진 않죠.
작가는 세상을 드높이는 존잰데, 세상이 허위로 가득 찼을 때는 깨는 작업이 필요한 거라. 그래서 그래 보인다. 근데 세상을 취향으로 재단하는 식이라면 그게 예술이겠나.

<아, 입이 없는 것들>이 나오기 전 11년간 쳐온 테니스조차도 당신에게는 ‘취향’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테니스, 지금 하는 골프까지, 운동 정말 못한다. 그 일종의, 낚시하는 사람이 병렬식으로 낚싯대 여러 개 놓듯이 한 거야.

왜 테니스였을까요?
재밌어서 했지만은 아무 목적도 없지 뭐. 그래 해가지고 뭐 하겠나, 선수 되겠나.

이제는 골프죠. 연습장에서만, 제일 짧은 채로 어떻게 한 번 제대로 칠 수 있을까 한다. 뭐, 매일 그냥, 운동하듯이. 골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할 수 있고, 다른 사람 없어도 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의미 부여를 좀 해서, 당신이 쉬지 않고 운동을 하는 건 평생 소홀히해온 몸을 발달시킴으로써 시에서 몸의 감각을 발휘하고자 하는 어떤 노력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거의 같다고 생각해. 시하고 스윙하고. 카라바조 그림 중에 ‘다윗과 골리앗’ 알지? 다윗이 골리앗 머리 들고, 이 씨발놈이, 하는 표정으로 있는 거. 한 번의 스윙과 한 번의 시 쓰기. 둘 다, 짧잖아. 머리가 아니라 리듬으로 하는 것이고.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고.

이성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 뭘까요?
그러니까 실제로 스윙할 때 신경 써야 할 자세나 그런 부분이 열여섯 가진가 그렇대. 근데 사람이 한순간에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지금 나하고 이야기하면서 바깥 소리 안 들렸지? 지금은 들리지. 그러니까 그게 되겠나. 거의 똑같아. 그러니까 난 시나 스윙이나 거의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고.

골프의 경우, 무한한 연습과 공부를 통해 스윙을 할 수 있는 신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겠죠. 시를 쓸 수 있는 신체는 어떤 것 같나요? 물리적인 신체가 아니고 말이죠.
스윙을 할 수 있는 게 몸이듯이, 시를 쓸 수 있는 거는 몸에 해당하는 정신의 어떤 부분이겠지. 근데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거의 같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안 해야 될 걸 안 하는 거야. 내가 생각만 안 하면 거길 가는데, 거기에 가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사라져버리는 어떤 것. 김수영은 시 쓰는 사람이 시 쓴다는 의식을 없애는 것이 똥구멍 빼는 것만큼 힘들다고 했어. 그게 말이 안 되는 거거든? 말이 안 되는 걸 하는 거, 그때 가장 맑은 목소리가 나오는 어떤 것. 그러니까 시는 내가 쓰는 게 아니라, 어떤 상태에 있는 나를 통과하지.

시인은 매질이네요.
어떤 식당에 가서 소고깃국을 시키면, 국이 식어서 나와. 왜 그러냐면, 고 국을 담기 위해서는 그릇 자체를 덥혀놔야 하는 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뜨겁게 있는 거야. 내가 차가움으로써 그 국의 뜨거움을 빼앗는다든지 밍밍하게 만들지 않는 것. 시인의 할 일은 그런 거라.

지금은 시를 쓸 수 있는 신체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시에 썼듯이, 바다에 내리는 눈 같아. 뭐 있어? 아무것도. 인생이 안 그러나? 한 번 스윙하고 한 사람 인생하고 다를 게 뭐라. 지나가면 남는 게 있나? 아무것도 없지. 시 앞에 서면 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패스한 지 몇 년인지 몇십 년인지 몰라. 패스 안 했을 때는 첫 시집 뿐인지도. 오죽하면 작업실에 술을 갖다 놨나. 요새는 마셔도 안 돼. 시를 삼사십 년 썼는데, 못 쓸 거 뭐 있나, 쓰면 쓰지. 근데 이게 싫은 거야, 다, 아무 의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