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디자이너 톰 포드를 만났다  | GQ KOREA (지큐 코리아) 남성 패션 매거진

상하이에서 디자이너 톰 포드를 만났다 

2015-11-18T10:54:57+00:00 |ENTERTAINMENT|

톰 포드는 ‘끝’ 대신 ‘어둠 속으로 사라지다’라는 뜻의 필름 용어, ‘페이드 투 블랙’을 자신의 영화사 이름으로 정했다. 그건 끝이되 끝이 아닌, 아직 다 보여주지 못한 것들이 뒤에 잔뜩 있다는 암시였다. 톰 포드를 만났다.

회색 수트를 입고 쥐색 보타이를 맨 운전기사는 뒷좌석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우선 차 안의 온도가 괜찮은지 물었다. 그는 살면서 만난 중국인 중 뒷머리가 제일 깔끔한 남자였고 ‘템퍼레처’의 발음을 가장 정확하게 하는 운전사였다. 창밖 거리에는 종이컵에 든 국화빵을 사 들고 퇴근하는 떠들썩한 무리가 있었지만 차 안은 흡사 동굴처럼 고요했다. 적당한 실내 온도와 완전한 방음, 청결한 시트와 조용한 운전기사. 톰 포드가 공항으로 보낸 검정 벤츠에는 이런 식의 톰 포드다운 환영 인사가 있었다. 소란스러운 상하이 저녁 풍경을 완벽하게 안락한 차 안에서 텔레비전 드라마 보듯 스치는 동안, 톰 포드가 할 수 없는 일은 과연 뭘까 궁금해졌다. 어쨌거나 ‘세련’과는 거리가 먼 중국에서 이 정도의 우아한 마중이라니. 물론 그가 보낸 상하이 부티크 오프닝 초대장을 봤을 때부터 어떤 ‘클래식한’ 인사를 기대하긴 했다. 그는 1년에 열여섯 번의 컬렉션을 치러야 했던 시절에도 구찌 쇼를 보러 오는 모든 에디터의 호텔방으로 꽃을 보냈으니까. 꽃송이 사이에는 빳빳한 봉투에 든 카드도 함께 있었다. 거기엔 끝이 뾰족한 글씨체로 “이 도시에 온 걸 환영해요. 사랑을 담아서, 톰” 이라고 적혀 있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잉크의 색깔이었는데 남색과 검정의 중간색이었다. 그래서 카드를 받을 때마다 톰 포드가 실크 가운을 입고 앉아서 두 병의 잉크를 정확한 비율로 섞는 광경을 상상했었다. 천천히 유영하듯 주행을 마친 검정 벤츠는 난징 로드의 톰 포드 부티크에 도착했다. 특유의 고딕 로고, 검정과 골드가 섞인 옛날식의 호화로운 분위기 때문에 톰 포드 매장은 어느 도시에 있건 늘 백 년도 넘게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고고해 보인다. 예정 시간인 오후 일곱 시 정각에 톰 포드가 도착했다. 요란한 팡파르나 거만한 의전은 없었지만 매장 안에 갑자기 아주 고급스럽고 자극적인 향이 꽉 찼기 때문에 그의 등장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톰 포드는 직접 만든 ‘프라이빗 블렌드’ 중 늘 타바코 바닐라만 쓰는데, 영리하게도 이 사실을 흘리듯 밝혔고 덕분에 한 병에 4백50달러나 하는 향수는 별다른 광고 없이도 훨훨 팔려나갔다. 매장 안에서 대륙 특유의 기질로 호기롭게 떠들던 사람들은 공기 중에 ‘미스터 포드’의 향이 섞이는 순간 각자의 행동을 밀봉한 듯 멈췄다. 톰 포드는 크고 늘씬하고 곧았다. 피부는 살짝 태닝되어 있었고 짧은 머리는 이마 가운데를 경계로 완벽한 호를 그리며 갈라져 있었다. 높은 이마 때문에 그는 예상보다 훨씬 더 지적으로 보였다. 행사가 끝난 후, 톰 포드는 페닌슐라 호텔에 저녁 식사를 마련했다. 아주 작고 지극히 사적이며 꽃과 식기, 테이블보까지 극단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에서 톰 포드의 손님들은 보스턴 랍스터와 스프링 아스파라거스, 메이어 레몬을 먹었다. 수트를 갖춰 입은 웨이터들은 ‘뵈브 클리코 라 그랑담 1998’을 연신 잔에 채웠고, 와규 비프와 래디시 케이크를 먹을 무렵엔 ‘프랑수아 미쿨스키 브루고뉴’와 ‘알테니소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두 종류의 와인이 서브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과 타르트를 먹을 때, 톰 포드가 일어서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약간 수줍어하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저녁 내내 샴페인과 와인 대신 물만 마셔서인지도 몰랐다. 오직 손님들만 취하고 톰 포드는 그들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아직 밤은 멀었건만, 파티의 주인은 깍듯한 인사와 함께 퇴장했다. 이건 좀 의외였다. 톰 포드는 포르노 시크의 창시자, 섹스와 육체의 황태자, 관능과 유혹의 판타지 아니었나. 그런 그가 냅킨으로 꼼꼼히 입을 닦고 밤과 술을 내동댕이친 채 표표히 사라질 줄이야. 톰 포드가 떠난 후엔 모든 게 시들해졌다. 결국 파티는 타바코 바닐라 향이 멈춘, 그 즉시 끝났다.

인터뷰는 오전 열 시였다.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무슨 옷을 입을지 궁리했다. 그가 구찌 시절 만든 잔인할 정도로 팔이 좁은 재킷은 이젠 너무 작아졌고 이브 생 로랑의 스웨터는 뭐랄까, 위험 부담이 있었다. 톰 포드 여성복이라면 최고의 매너를 발휘할 기회겠지만 그건 너무 비싸서 아직 셔츠 한 장도 못 샀다. 결국 톰 포드와는 전혀 상관없는 디자이너의 하늘색 팬츠 수트를 입고 검정 오페라 펌프스를 신었다. 스위트룸의 문을 열었을 때 예의 그 향기와 함께 테이블 위의 흰 꽃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톰 포드는 소파 앞에 우뚝 서서 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피크 라펠의 투버튼 검정 수트와 흰색 셔츠, 도트 무늬 검정 타이 차림에 셔츠 칼라는 금색 핀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한 남색 포켓스퀘어와 검정색 고어 부츠. 수트와 셔츠에는 주름 하나 없었고 구두는 완벽하게 닦여 있었다. “어서 와요.”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는 에디터가 소파에 앉을 때까지 서 있었고 곧 음료를 권했다. 뜨거운 커피 한 잔과 얼음을 넣은 다이어트 콜라가 테이블에 놓이고 그는 특유의 표정, 그러니까 실눈을 뜨고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첫 질문을 기다렸다. 방 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인터뷰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에서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방 안이 세상의 모든 빛을 모은 듯 밝았는데도 톰 포드의 얼굴은 전날밤에 본 것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했어요. 아, 우선 사과 먼저 할게요. 당신이 어제 흰색 턱시도를 입고 있었던 걸 기억해요. 오늘은 하늘색 수트를 입었네요. 그런데 난 어제와 같은 옷이에요. 일할 땐 늘 유니폼처럼 이렇게 입거든요. 똑같은 수트가 스무 벌 있는데 상하이엔 일정이 짧아서 두 벌만 가져왔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어제와 다른 옷이긴하네요. 당신은 오늘 아주 멋져 보여요. 이 방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고.

당신이 구찌 시절에 만든 재킷을 입고 그 시절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최근에 살이 좀 쪄서 말이죠. 그 재킷들은 언제나 팔 두께가 관건이거든요. 살이 쪘다니 믿을 수 없네요. 그전엔 혹시 슈퍼모델이었어요?

와, 바람둥이 같은 얘기네요. 칭찬을 더 할까요? 전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고 개성이 확실한 사람들을 좋아해요. 오늘 당신의 모습을 봐요. 옷도 구두도 간단한 화장도 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잖아요. 패션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바로 그거예요. 스스로를 아는 것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오페라 펌프스를 신었네요. 다음 시즌엔 여성용 오페라 펌프스를 만들 거예요. 당신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아주 옛날 남자 같아요. 옛날식으로 칭찬을 하고 사람을 대하고 예의를 갖추잖아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요즘은 매너를 지키는 남자들이 별로 없어서 문제지만. 엄마가 잘 가르쳐줬어야 하는 건데. 어렸을 때 바닥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도 엄마가 들어오면 전 일어서야 했어요.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곤 했죠. 그렇게 안 하면 혼쭐이 났어요. 엄마는 내게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게 아니란 걸 가르쳤어요. 여자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겉옷을 받아주고 길 안쪽에서 걷게 하는 건 남자의 기본 예의예요. 테이블에 가까이 올 땐 일어서고 떠날 때도 일어서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남자들이 가장 섹시해지는 방법은 문신을 하고 모히칸 머리로 미는 게 아니고 예의를 갖추는 거예요. 효과가 확실하죠.

그래서 늘 꽃을 보내나요? 옛날 신사들처럼? 그럼요. 누군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갈 수 없다면 전 꽃을 보내요. 좋은 시간을 보낸 후에도 꽃을 보내고 사과를 할 때도 꽃을 보내요. 꽃을 고를 시간도 없이 바쁜 사람은 우주에 없어요. 시간이 없는 게 아니고 마음이 없는 거겠죠. 슬픈 건, 정중한 행동이 가끔 모던하지 못하다는 인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옛날식 범절이 좋아요. 제가 자란 미국 남부에서는 꼬마들도 어른을 부를 땐 미스터와 미스를 붙여요.

당신 같은 남자도 아침에 오늘은 뭘 입을지 고민하나요? 오늘은 당신을 만나야 했으니까 수트를 입었어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지만 사진 편집을 하느라 시간이 너무 금방 간 거예요. 평소에는 옷 입는 데 보통 30분 정도 걸리는데 오늘 아침엔 고민할 틈이 없어서 가장 빨리 멋있어질 수 있는 방법을 택했어요. 사실, 어두운 수트와 화이트 셔츠가 저한테 제일 잘 어울린단 걸 알거든요.

하지만 요즘은 너무 수트만 입는 거 아니에요? 구찌 시절엔 청바지도 입고 티셔츠도 입고 카우보이 셔츠도 입었잖아요. 그건 당신이 날 톰 포드 공식 석상에서만 봤기 때문일 거예요. 일할 땐 늘 수트를 입어요. 회색, 검정색, 짙은 고동색 수트를 입고 거기 어울리는 색깔의 셔츠를 고르죠. 타이나 포켓치프를 가끔 바꾸는 것 말고는 별로 다를 게 없어요. 하지만 산타페에 가면 청바지와 웨스턴 셔츠, 카우보이 부츠 차림이에요. 매년 크리스마스엔 리처드와 함께 미스틱 섬에서 지내는데 그땐 옅은 분홍색이나 파란색 팬츠를 입고 맨발에 로퍼를 신어요. 또, 스키를 타거나 말을 탈 땐 거기 맞는 옷이 있죠. 해변에선 웃옷을 벗고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어요. 영국에선 가끔 사냥도 하는데 그땐 또 사냥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요. 하지만 일할 땐 수트 차림이 맞는 것 같아요. 도시에서 반바지를 입거나 맨발에 샌들을 신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건 참 얼마나 경박한지.

어젯밤엔 잘 잤어요? 네, 아주 잘 잤어요. 많이 자는 편은 아니지만 술을 끊은 후엔 푹 잠들어요. 술을 마시면 처음엔 곯아떨어지지만 새벽에 깨잖아요. 그러곤 영영 잠들지 못하죠. 숙취에 시달리면서 동트길 기다리는 건 끔찍해요.

기분은 어땠어요? 처음 여기 올 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어요. 런던에서 새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번엔 다른 때보다 많이 진행을 못했거든요. 그래서 불안했어요. 그저께는 베이징에 있었고 어제는 상하이, 오늘은 홍콩에 가야 돼요. 평소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에 갑자기 모든 게 너무 빠르단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바쁠 땐, 밤에 더 외롭지 않아요? 다른 호텔방에서 밤을 보내는 기분은 참 별로일 것 같아요. 외롭단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어차피 인생의 반을 호텔에서 보내는데다 필요한 것들을 다가지고 다니거든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살고 있기도 하고. 매번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혼자 있을 기회가 거의 없어요.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봐 줄래요? 혼자 있는 거라고 냉큼 대답하고 싶으니까.

당신은 완벽주의자, 맞죠? 말도 말아요. 거의 미친 놈이에요. 이건 아냐, 그럼 저건? 그것도 별로야. 이게 나은가? 그럴 리가. 더 아름다운 게 있을 거야. 이건 어때? 그건 또 뭐야. 이런 질문과 답을 혼자서 끊임없이 해요. 누군가는 그게 제 성공의 원천이라고도 했지만 가끔은 두려워요. 도무지 멈출 수가 없거든요. 게다가 마음에 들어도 아주 예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늘 흠을 찾는 것 같아요. 백 퍼센트 만족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스스로에게만 가혹하군요. 맞아요. 내가 만드는 것과 나 자신에게 유별나요. 거울을 볼 때도 난 완전히 비판적이 돼요. 톰 포드의 코트나 재킷을 매장에 내놓기 전 살펴볼 때처럼 스스로를 관찰해요. 어제 더 일찍 잤어야 했어. 눈 밑에 그늘이 졌잖아. 살을 좀 더 빼야겠군. 그러고 있는 남자를 생각해보세요. 게다가 전 더 이상 젊지도 않잖아요.

톰 포드의 완벽주의는 구찌 시절에도 유명했죠. 피날레의 몇 분을 위해서 2주 전부터 태닝을 하고 머리를 5일 전에 자른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자른 지 5일이 지났을 때 당신의 머리가 제일 멋지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예요? 말했잖아요. 크레이지!

하긴, 낡은 청바지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때가 탄 운동화를 신었을 때조차 그것들의 낡음과 늘어짐, 때의 정도가 너무 절묘하다는 게 ‘미스터리’였어요. 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청바지와 티셔츠를 위한 전담 재단사가 있어요. 티셔츠를 가슴에 맞춰서 사면 소매가 벙벙하잖아요. 그래서 소매를 이렇게 뒤로 당겨서 잘라내는 거예요.청바지도 마찬가지예요. 허벅지 부분을 팽팽하게 당겨서 몸에 딱 맞게 만들어요. 훌륭한 재단사 덕분에 제 몸이 실제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는 거예요. 캐주얼을 잘 입는 게 원래 굉장히 힘들잖아요. <싱글맨>에서 존이 입었던 청바지가 제 거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건 1962년도에 만들어진 청바지였어요. 배경이 1962년이어서 그 시절의 청바지를 수소문해서 구했죠. 가끔 옛날이 배경인 영화에서 남자들이 워싱된 청바지를 입고 나오면 정말 화가 나요. 그땐 워싱이 없었어요. 그런 것들을 놓치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죠.

또 참지 못할 일이 있어요? 스스로 멋쟁이라고 자부하면서 향기나 목소리에는 신경을 덜 쓰는 남자들이요. 멀리서 봤을 때 정말 멋있었는데 가까이 오면 땀 냄새가 나거나 목소리가 아주 이상하다면 그때부턴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요. 목소리나 향기, 말투와 움직임이 사람을 얼마나 관능적으로 만드는지 안다면 그렇게는 못할 거예요.

당신이 어떤 인터뷰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싶은 사람을 고용하라고 말한 걸 봤어요. 당신과 일하려면 분명한 매력이 있어야 한단 얘기였을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 끌리죠? 우선 예의가 있고, 매너 얘기를 계속하게 되네요. 가식적이거나 인종 차별을 하거나 성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 바른 언어를 쓰고 완벽한 문법을 구사하는 사람. 정중한 남자와 깍듯한 여자. 그리고 누군가를 대할 때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사람도 존경해요. 힘든 일이 생기면 누가 진짜 친구고 누가 아닌지 알게 되잖아요.

변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널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어, 라고 말하나요? 설마. 다만 마음 속으로 그들을 분류해요.

어떤 여자가 아름답던가요? 여자들은 다 아름다워요.

그중에서도 톰 포드 옷을 입은 여자가 특히 아름답겠죠? 내가 만든 재킷을 입고 구두를 신고, 선글라스를 끼고 향수까지 뿌린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광고에서 모델에게 시도했던 헤어스타일까지 하는 경우엔 뭐라고 얘길 좀 해주고도 싶어요. 오히려 톰 포드 재킷을 입고 프라다 스커트에 빈티지 구두, 다른 브랜드의 가방을 든 여자가 훨씬 멋져요. 그리고 전부 다 사기엔 톰 포드가 좀 비싸잖아요.

누구든 돈이 많으면 스타일이 좋아질까요? 돈이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스타일이란 게 없어요. 같은 옷도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입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것저것 다 사면 되니까. 스타일은 돈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거예요. 단순히 옷이 아니라 옷을 입는 방식, 태도, 말투 모든 게 포함된 거죠. 스타일이 좋은 사람은 베개 커버를 입어도 예쁘다니까요.

얘기를 하는 동안 오전의 햇살은 더 뜨거워졌다. 톰 포드는 에디터와 마주 보는 자리가 아닌 테이블 모서리를 사이에 둔 바로 곁에 앉았는데 그 덕에 그의 턱수염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밤색과 회색이 미묘하게 섞인 수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 같았다. 너무 부드러워서 수염이라기보다는 강아지라든가 고급 카펫처럼도 보였고. 그는 처음에 앉았던 자세, 등을 곧게 세우고 다리를 꼰 후 턱을 약간 당긴 얼굴각도를 유지한 채 가끔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것 말고는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자리에서 들썩이는 일이라곤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눈의 표정이 하도 풍부해서 딱딱하거나 귄위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는 살짝 팔을 잡거나 재빨리 윙크를 하거나 무릎을 톡톡 두드리는 친밀한 행동이 몸에 밴 남자였다. 자주 싱긋 웃고 드물게는 소리 내서 웃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눈가에 작은 새의 발자국 같은 조그만 주름이 잡혔다. 그러고 보니, 톰 포드는 올해 쉰 살이 되었다.

당신이 톰 포드라는 이름으로 만든 남자 옷이 아주 클래식한 수트여서 놀랐어요. 그전에 당신이 만든 옷들은 더 파격적이고 야하고, 뭔가 전날 숙취에서 덜 깬 록스타 같은 면이 있었잖아요. 구찌에서 일했던 그 시절은 세상이 우울하고 어둡던 시기였어요. 경제적 위기를 겪는 나라도 많고 에이즈가 갑자기 퍼져서 다들 불안해하던 그런 분위기. 전 그때 사람들이 몰두할 다른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섹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전 그걸 제 식으로 표현할 자신이 있었어요. 알잖아요, 그 광고들. 섹스와 충동과 격정, 그런 이미지였죠.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됐죠? 이젠 어딜 가나 섹시함을 내세워요. 인터넷만 켜도 아주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나죠. 아베크롬비에서조차 섹스를 강조하니까. 이젠 좀 질렸어요. 충동적인 섹스 말고 우아하고 관능적인 섹스를 더 좋아하게 됐죠. 톰 포드의 옷도 이젠 ‘섹슈얼리티’보다 ‘센슈얼리티’를 보여주고 싶어요.

톰 포드의 여자도 구찌 시절과는 달라졌어요. 더 화려하고 과감하지만 깊이가 다르달까. 성숙한 이브 생 로랑 같아요. 뉴욕에서 치른 첫 번째 여성복 쇼가 미국 시트콤 <아이 러브 루시>에서 힌트를 얻었단 얘기 들었어요. 한국에서도 <아이 러브 루시>를 볼 수 있나요?

채널에서 볼 순 없어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죠. 요즘은 인터넷 안에 모든 게 있잖아요. 맞아요. 나도 침대에 내 컴퓨터와 함께 들어가는 일이 많아요. 어쨌든 그 시트콤은 끝내줘요. <아이 러브 루시>의 한 에피소드에 1950년대의 살롱쇼가 나와요. 모델로 할리우드 스타의 부인들을 세우고 주인공이 하나하나 소개를 하고 설명을 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요즘은 아무도 그렇게 쇼를 안 하잖아요. 이거 내가 한 번 해보자, 그랬죠. 구찌에서 하던 빅 쇼는 아니었지만 다들 좋아해줬어요. 이제 큰 쇼는 안 할 거예요. 제가 옷에 대해서 설명하고 옷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생각 중이니까. 미디어가 아닌 고객을 위한 쇼를 하고 싶어요. 큰 쇼를 할 땐 뉴스와 이슈들을 생각하느라 정작 그 옷을 입을 고객들은 잊기도 하거든요.

남자 쇼도 그렇게 한번 해봐요. 콜린 퍼스와 니콜라스 홀트도 모델로 세우고요. 하지만 이제 그들을 잊어야 해요.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있거든요.

새 영화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어요? 미안해요. 얘기 못해요. 전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미리 얘기하는 걸 싫어해요. 떠벌리다가 뜻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그리고 전 영적인 걸 믿어요. 특히 동양의 정신적인 어떤 것들에 굉장히 공감해요.

그게 뭘까요? 미리 말하면 에너지를 뺏긴다는 믿음 말이에요.

톰 포드는 톰 포드만 입나요? 네. 전부 톰 포드예요.

그런데 시계는 탱크 솔로를 찼네요? 저도 같은 시계가 있어요. 아직 톰 포드 시계가 없어서 롤렉스와 까르띠에를 차요. 전 남자들이 조금 작은 시계를 차는 것을 좋아해요. 빅 다이얼이 유행이어도 내키지 않더라고요. 맞다, 여름엔 흰색 밴드로 바꿔봐요. 살짝 그을린 손목에 차면 정말 멋져요.

그와 김인숙 작가의 사진집을 함께 봤다. 토요일 밤 독일의 한 모텔, 방방마다 벌어지는 기묘한 얘기들을 연출한 컷들을 보면서 톰 포드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곤 자신이 처음 함께 일한 캐시 하드윅이 한국 여자였다고, 이제 그녀는 일흔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아직도 자주 만난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이런 얘기까지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웃었다. 커피 한 잔을 더 청하려 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톰 포드의 어시스턴트가 들어왔다. 예정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로비에는 다음 인터뷰를 위한 스태프들이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다. 톰 포드는 원래 얘기가 한창 재미있을 때 다들 떠나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고, 눈꼬리를 떨어뜨린 채 슬픈 시늉을 했다. 그 얼굴은 아직 다 묻지 못한 말들에 대한 상냥한 위로가 되었다. 그 방에 들어갈 때처럼, 나올 때도 톰 포드는 문 가까이 걸어 나와 배웅을 했다. 무릎을 구부린 채 볼키스를 하는 그의 모습은 아주 먼 과거의 남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