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자

전작 <고민하는 힘>과 신작 <살아야 하는 이유>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있다. 개인의 각성을 강조하던 ‘재일한국인 최초의 도쿄대 정교수’ 강상중은, 자살한 아들을 가슴에 품고, 소세키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는 말을 주워섬기며, ‘우리’가 있는 광야로 나아갔다.

“이 세상의 살아가는 모든 것, 언제까지고 건강하기를, 안녕.” 삶의 무의미에 대해 극도의 신경증적인 고민을 이어가던 강상중 교수의 아들이 남긴 유서다. 아들이 죽고 몇 달 후 일본 도호쿠 지방에선 전대미문의 지진과 원전사고가 일어났다. 아들이 바라던 “세계의 파멸”이 온 듯했다. 지진 피해 현장을 찾았다. 그 불모의 땅에서, 한 노인의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어”라는 읊조림을 들었다. 살아야 할까? 살 수 있을까? 강상중 교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답이 아닌 질문으로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썼다. 소공동 환구단 앞에서 그를 만났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으면서, <고민하는 힘>에서 밝힌 할리 데이비슨을 타겠다는 노년의 계획은 아직 못 이뤘겠단 짐작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입니다.

계획은 변함없고요? 그럼요. 오히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많이 생각납니다. 혼다나 스즈키, 아니면 외국 걸로는 BMW나 부가티의 카탈로그를 가끔 보는데요, 할리 데이비슨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없는 것 같아요.

계획이 좀 미뤄진 셈인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쓰게 만든 사건들로 인해, 새로운 계획이 생긴 건 아닐까 했어요. 두 가지입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들과 나누는 가상의 대화를 메르헨, 그러니까 동화 형태로 쓰고 싶어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처럼, 우화적, 동화적인 수법으로요. 두 번째가 오토바이 여행인데, 지금은 업무가 있으니까요.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 각지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유럽의 유명한 교회뿐만 아니라 아시아나 중남미, 아프리카, 세계 각지의 교회들이요.

교회, 게다가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의 교회라고요? 한국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서 오토바이를 타고 비무장지대에 간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오토바이로 성지순례를 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중남미나 아시아 각지의 유명하지 않은 교회를 다닐 걸 생각하면 기대가 됩니다. 하나의 낙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체 게바라 때문은 아닌가요? 하하하. 아닙니다. 영화에서 본 이미지로 이야기하자면, 장 폴 벨몽도가 나오는 <사자라고 불린 남자Lowe, Itineraire D’Un Enfant Cate(한국 제목: 여정)>겠네요. 인생의 마지막에 오토바이가 아니라 요트를 타고 항해를 떠나는 남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걸 오토바이로 하는 거죠.

극한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후, 종교를 갖는 경우가 있죠. 종교가 있었는지 혹은 갖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이 책을 쓰는 일이 당신에게는 종교적인 일이 아니었나 싶고요. 일본에는 기독교 신자가 매우 적지만, 한국에는 꽤 많죠. 완전한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믿는다고 말로만 하고, 믿는 흉내만 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종교에 대해선 여러 가지 말이 많죠. 사후의 세계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건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 없는 얘기고요. 하지만 종교가 단지 헛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종교, 이 종교냐, 저 종교냐가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죠. 어떤 것을 믿으려고 할 때 열리는 종교적인 세계가 있고, 뒤집어서 말하면, 믿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제가 직면했을 겁니다. 그래서 바로 지적한 것처럼,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 자신을 열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치유되었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니까 치유랄까, 낫거나 안 낫거나, 가 아니라 이걸 쓰면서 내면 속에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던 마그마와 같은, 아말감과 같은 것이 정돈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요.

“병은 끝나지 않았다”고 쓴 대목이 생각나네요. <고민하는 힘>에서 마치 부드러운 선생님 같았던 당신은 <살아야 하는 이유>에 와서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으로서 글을 쓰는 문학청년처럼 보이기도 해요. 대단한 칭찬으로 들리는 동시에, 마음대로 해석해보자면, 제 스스로가 철이 없고 풋내기여서 그런 면이 드러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말하자면, 60이 넘어서야 비로소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진정으로 대면했어요. 원래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드러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따뜻한 이불을 덮고 편안하게 잠드는 것을 바라는데요, 지금의 저는 부드러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잘 수 없어요. 편안하게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얘기한 것과 같이, 이 책에서 문학청년의 모습이 비친 게 아닐까요.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단어가 있죠. “거듭나기.” 당신의 비극 또한 “거듭나기”의 한 사례라고 보나요? 그래서 제가 거듭났다는 게 아니라, 거듭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서 스스로에게 거듭나라, 거듭나라, 들려주는 거죠. 그렇게 누군가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자세로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당신은 현대의 종교가 자본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책을 낸 순서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치 어머니는 현대의 종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 상황과 맞물려서 생각해보죠. 봉준호 감독의 <마더>나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소설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있습니다. ‘어머니적인 것’이 세계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적인 것이 새롭게 세상에 인식되는 시기는 전쟁이나 기아 혹은 한 사회의 유대가 붕괴되고, 깊은 우울에 빠진 시점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어머니가 재인식됩니다. 제가 쓴 <어머니>라는 책에서의 어머니는 개인적인 추억의 대상인 동시에, 종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최후로 의지할 대상, 끈끈하게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는 대상입니다. ‘모성숭배’라는 차원이 아니라, 최후에 사람들이 기대야 할 게 뭔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부상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종교와 어머니는, 믿음으로서 다른가요? 종교적인 것과 어머니적인 것은 서로 통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통하긴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결과적으로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죠. 종교적인 사랑은 인간의 애정이 가져올 수 있는 과오, 잘못된 결과까지도 전부 감싸 안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다를 겁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한하다는 식으로 많이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어떤 광기가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봉준호의 영화도 그러한 점, 어머니의 사랑 속에 담긴 광기의 측면을 조명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로서도 어머니의 사랑에 광기가 어려 있다는 걸 감지하는 순간이 있었고요.

당신의 어머니만큼이나 살았고 자식도 가졌습니다. 당신에게도 자식에 대한 광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네, 있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사랑하게 되면, 때때로 애정이 맹목적으로 흐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강했던 것이긴 한데요, 제가 아버지로서 가졌던 사랑,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게 가졌던 사랑을 돌이켜보면, 부모의 사랑이 광기를 포함하게 된다는 건 그 사랑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애일 수 있습니다. 자기애가 극한까지 가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변환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단순한 타자, 타인에 대한 사랑뿐이라면, 그렇게까지 극도의 광기를 포함하는 사랑에 이르진 않을 것 같아요. 남녀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자신을 잃을 만큼의 맹목성을 보이는 거죠.

결혼 전에 다른 사람과 연애할 때는 그런 경험이 없었나요? 차인 적은 있어요. 하하. 하지만 그렇게 광기 어린 걸 해본 적은 없습니다. 어떤 거냐면, 차분하게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내가 지금 딛고 선 대지가 갈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소멸할 것 같은 불안이 있었지만, 자기를 잃을 만큼 어쩌지 못한 건 아니었죠.

성숙했던 건가요? 사랑을 받을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 사랑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랑 받아 마땅한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들을 겪으면서 배운 거죠.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변질되고 전환되는 부분이 있다는 걸요. 나르시시즘이 포함된다는 걸요.

사랑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마주했군요. 제 책에서는 ‘진지함’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나오는데요, 진지함, 진지한 인간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보죠. 지금 한국과 일본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지함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안 좋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바보라는 이야기가 나오죠.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은 철저하게 진지한, 그래서 바보스러움과 우직함을 견지하는 이반의 이야기를 우화적, 민화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진지함이라는 건 세상에 대해, 사물에 대해, 사람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접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