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시겨

“눈물은 왜 짠가”라고 노래하던 시인 함민복은 이제 “눈물을 끊어내는 눈꺼풀”에 대해 말했다. 강화도 사투리는 쓰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곳은 강화도였다.

서울이 아닌 강화도에 있으면서, 손님을 맞는 데 익숙해졌겠어요. 손님들이 강화도에서 기대하는 건 뭐던가요?
이쪽에 일이 있어서 들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가끔 있어요. 많진 않아요. 별로 연락 안 하던 사람들한테서 연락이 오기도 해요. 요새는 제가 인삼가게 한다는 소문이 나니까, 거기 있겠지, 싶어서 들러요. 뭘 기대할까요. 모르겠어요. 하하.

포항 가면 과메기 먹고 뭐 그런 것 말이죠.
저한테 그런 걸 물어 보는 사람들이 있긴 해요. 요새는 학생들이 문학 기행으로 꽤 와요. 선생님들 인솔로 오면, 학생들 만나는 시간도 갖고 그러죠. 제가 동행해서 설명도 해주는데, 그렇게 해설해주는 게 불법이라 그러더라고요. 여기 사는 사람이 해도 그렇대요. 그래서 그냥 다른 것 없이 해주고 그래요.

뭘 추천하나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한데, 문인이나 나이 드신 분들 혹은 학생들이 오면 공통적으로 평화전망대를 얘기해요. 역사적인 장소로는 광성보. 그리고 이쪽의 뻘이죠.

가장 애착이 가는 장소는 아무래도 뻘일까요?
13년 동안 뻘 옆에 살았으니, 관심이 많았죠. 근데 근래에는 평화전망대에 많이 놀러가요. 연미정이라는 데가 있거든요. 임진강하고 한강이 만나는 데 있는 큰 정자예요. 거기서 작년 겨울 전까지 일요일마다 길희성 교수님이랑 몇명 해서 평화적 명상을 하고 평화 얘기를 나누는 모임을 가졌어요.

평화전망대라…. 계기가 있나요?
‘평화의 씨앗들’이라는 모임이 있어요. “우리가 평화의 마음을 가질 때 통일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철원에서 정지석 목사님이 사명감을 갖고 시작하신 일이죠. 올해 3월 1일에 국경선평화학교 개학식 때도 갔었는데요. 그 모임에 나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아무래도 강화군 쪽이 민통선이다 보니, 그 영향도 있고요. 북녘 마을이 가장 잘 보이는 평화 전망대일 거예요.

아직 평화에 대한 생각이 시에 드러난 건 읽지 못했는데요.
제가 시작이 늦어요. 생각한 걸 바로 쓰지 못해요. 결혼한 지 2년 됐는데, 이번 시집에는 결혼 얘기 한 편 실었어요. 결혼 생활이라는 걸 좀 해보고 써야죠. 뻘 얘기도 몇 년이 지나고 쓰기 시작했어요.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요.
예. 어설프고 정리가 안 된 걸 사람들이 보면 우스울 것 같고, 참 미안해지니까요.

강화도 오기 전에 산 곳이 금호동이죠? 금호동의 함민복과 강화도의 함민복은 좀 다른가요?
아무래도 다르죠.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금호동에서 썼어요. 금호동 쪽 산동네 얘기가 많죠. 개인적인 얘기도 많고요. 여기 와서 10년 동안은 시집을 안 내다가 바닷가 얘기를 담은 <말랑말랑한 힘>을 냈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가난한 얘기를 쓴다고 그래요. 의도적으로 그런 얘긴 안 쓴 시집인데 말이에요. 이미지 때문인지 몰라도 주로 제 시집을 안 읽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아요.

만만치 않은 세월이 흘렀으니 다르긴 다르겠죠. 헤어스타일은 항상 같으신 것 같지만.
하하. 맨날 비슷하게 짧게 깎아요. 근데 처음 여기 와선 길렀어요. 이렇게 길러서 꽁지로 묶고.

사진으로라도 꼭 한 번 보고 싶네요.
없어요. 사람들 안 만나고 그럴 때거든요. 강화도 주민들이 뒷모습 보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다고 수군대고 그랬어요. 하하.

사람들이 함민복에게 바라는 건 ‘가난한 시인’이죠.
그렇게 남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함민복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라고 덧붙이고요.
하하하.

하지만 사람들이 함민복에게 희망을 거는 게 각자의 죄의식을 더는 거라면, 좀 무리한 추측일까요? 여기에 대해 불편하거나 불쾌하다고 느낀 적은 없나요?
불편하죠. 누구나 변화가 오면 변화에 맞춰서 사는 거고, 나만 지킬 생각은 없어요. 변하는 것 자체가 내 모습이겠고요. 근데 어디 가서 제가 장사한다고 하면 깜짝 놀라요. 예전에는 나 혼자였지만 이제는 결혼도 했으니까, 같이 살아나가야 하잖아요. 인삼가게도 강화도 분들이 추천해주고 도와주셔서 어렵게 시작할 수 있었어요. ‘양팔 저울’이라는 제 시에서 “입과 항문. 구멍 뚫린 접시 두 개” 라고 썼어요. 내가 무엇을 갖고자 하는 욕망과 욕망을 다스리는, 배출해서 없애는 게 평행이 돼야 하는데, 평행을 유지하는 게 참 힘들어요.

가난을 이렇게 구분한다는 게 송구스러운데요. 적극적인 가난을 택했다고 생각했어요.
직장떠날 때는, 열심히 해도 당분간 큰 변화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 부분이 용기를 줬죠.

인삼 장사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죠?
저는 뭐 일을 잘 못해요. 손재주가 없어요. 포장할 때 도와주고, 추울 땐 사람들 인삼차라도 끓여서 내가고요. 또 저녁 때 삼을 영하 2도쯤 되는 저장 창고에 넣거든요. 그때 무거운 거 들어주고 그러죠. 장사는 영 쑥스러워서 못하겠어요.

그래도 가정을 가지면서, ‘양팔 저울’ 같은 균형을 찾는 중이네요.
그렇죠. 혼자 살 때는 자신과 타협했어요. 쓸데없이 관대해지기도 하고, 용서해주고. 그러다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학하면 끝이었는데, 같이 산다는 건 같이 타협을 본다는 거니까, 신경을 많이 쓰죠.

‘부부’에서 쓴 대로, “긴 상”을 함께 들어야 하는 삶이요?
제가 결혼 전에 주례 보면서 그 시를 썼잖아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긴 상이 따로 있지 않아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긴 상이에요. 하다못해, TV 프로그램은 뭘 볼 것인가까지 조율해야 하잖아요.

시를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나요?
결혼하고 아직 실질적으로 시를 쓰진 않았는데, 수평에 대해 생각해요. 전에는 혼잣말처럼, 내가 본 풍경을 얘기하는 차원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너무 참여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시집 제목도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이라고 지었어요. 어떻게 보면 내가 중요한 일들을 안 하고 살았구나, 싶죠. 중요한데, 마음속에 있는데, 실천 못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정신대 할머니들 계신 곳에 꼭 가봐야지 했는데, 10년이 넘도록 못 갔어요. 그래서 이제 실천하자, 이런 거죠.

예전에 자신을 가난하고 착하고 순수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열심히 안 사니까 선량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던 게 생각나네요.
사실, 그렇죠. 당연하게도. 게으른데다가 경쟁을 해야 한다면 포기했어요. 치열하게 사는 다른 사람들도 저 같은 마음이었겠지만, 그들은 당면한 삶에 부딪히면서 어쩔 수 없이 했잖아요? 혼자만 생각하고 살아서 가능했죠.

열심히 산다는 건 의도치 않은 잘못을 저지를 확률을 높이는 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함민복이 열심히 실천하는 삶을 산다고 해도, 선량한 마음을 저버릴 것 같진 않아요.
허허, 참 힘들죠. 그걸 좁혀가는 과정에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일치할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게 사는 모범적인 사람도 있긴 해요. 옳은 게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는. 사진 찍는 분인데요. 제가 인천시 문화상인가를 받을 때 군에서도 나오고 그분도 왔어요. 근데 행사 끝나고 군에서 밥을 좀 괜찮은 걸 먹으러 가자고 하니까, 그분이 그래요. “어디서 된장찌개나 먹읍시다. 군에서 나오는 돈이면 세금 아닙니까.” 대단하죠. 그 사람 보면서 많이 반성해요.

생활을 꾸리면서 자족적으로 살던 시절을 후회하진 않나요?
뭐 그렇게 후회하진 않아요. 지나간 것과 후회는 연장선에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후회한다면 끝나지 않았어요. 과거는 백미러를 보는 것과 같아요. 과거와 지금의 내가 백미러 보듯이 연결돼서 나아가죠. 곧 크게 후회하지 않아요. 가족들한테 도움을 못 준 것, 그거 하나예요.

이번 시집의 몇몇 시가 시창작 연습 같은, 그러니까 처음 시를 쓰는 상태처럼 비쳤어요. 하나의 대상을 놓고, 의식적으로 쓰는 거요.
2부에 ‘줄자’ 나오고 그 부분 아닌가요?

맞습니다. ‘나침반’ 이런 시들요.
문명사회가 너무 각박하게 흘러가고 있는데요. 이 흐름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이 너무 견고해요. 그래서 이게 뭔지 생각해봤어요. 생각해보니까, 계량화할 수 있는 것들이 이 사회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도량형과 인간의 관계 맺기를 사람들이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도량형이 너무 일방적으로 굳어진 것 같아서 그걸 좀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말이죠. 강화도에 오래 살면서 든 생각인데, 애초에는 그런 시들만으로 시집을 냈으면 했어요. 하지만 게으르게 써나가다 보니까 출판사 계약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죠.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쪽으로 쓸 거예요.

의식적으로 시를 써야지 하고 쓰는 쪽이 아니지 않나요? 경험한 것들이 시가 되어 왔죠.
그렇죠. 금호동 살 땐 금호동 얘기, 바닷가 와서는 바닷가 얘기였고요. 인삼 센터 앞에 주차장이 있거든요. ‘화살표’도 ‘외바퀴 휠체어’도 그 주차장에서 본 것들이에요.